강희영 홈페이지_www.kangheeyoung.co.kr
강희영 블로그_www.blog.naver.com/artistkhy.kr
초대일시 / 2014_0514_수요일_05:00pm
강희영 1st 개인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관훈동 119번지) 1층 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우리는 삶 속에서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어쩌면 본인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 아닌 이면적인 모습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던 이전 작품 활동 시절 우연한 계기로 거울을 이용하게 되었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형상이 내가 아닌 '또 다른 나'가 나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상하고 미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거울을 캔버스로 제작함으로써, 반사되는 직접적인 형상이 관음증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새로운 시점을 관람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했다. 거울이라는 소재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무한의 재료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매혹되고 집중하며 반사상과 상호연결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비춰진 형상을 통해 반성하고 집중하며 자기 형성적 순간을 갖기도 한다. ● 우리는 거울 위에 그린 그림을 통해서 나와 '닮은' 유사한 형상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거울 안에서 자기 자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의식의 주권 속에서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고, 또한 타인이라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상을 세움으로써 외부의 시선 하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볼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닮음'이라는 존재와 외관의 변증법 안에서 주체를 개입시키면서 서로 대화를 한다. 전시 『닮음의 대화 (Dialogue of resemblance) 』 에서는 우리에게 미묘하고도 심리적인 자신과의 대면상태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나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고 가늠해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단순한 거울에 비친 우리에 형상에서 부터 '닮음의 대화'를 통해 일시적인 불쾌를 넘어 주체적인 분열까지 겪을 수 있다. 단순한 관람자와 거울작품에 비춰진 반사상은 더 이상 연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거울 앞에서 우리는 반사상의 주체에 벗어나 대립을 넘은 위협적인 '닮음'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거울이라는 특정 캔버스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진 삶의 표상은 우리의 단편적인 내면을 표현하며, '나르시시즘'과 '관음증적 사고'를 이용한 반사적 요소와 반영적 형상을 가지고 있는 거울로써 시/공간의 제약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시한다. 우리는 사회에서 본질과 진정성에 대해 잃어버린 채 오로지 관계맺음의 기계적 소통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들을 꾸짖기 이전에 자기 자신은 얼마나 진실 되고 진심어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회유와 환기를 원하고 있다. ● 거울위에 그려진 작가의 소통을 통해서 '닮음'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는 분열적 존재와 함께 본인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거울'이라는 실재적인 오브제를 회화의 도화지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개성 있는 시도로 해석되길 바라며, 사회와 소통에 대한 개인의 해석이 포괄적인 본연의 삶과 인간관계에 관한 성찰의 기회가 부여되길 희망한다. ■ 강희영
반영과 투영, 상징과 표상 사이에 놓인 지각의 증후 -작가 강희영의 '거울 위의 회화'에 대한 소론 이 시대, 욕망조차 나의 것이 아닌 타자에 의한 것이라 했던가.(Charles Baudelaire) 우리는 항상 보는 것, 나를 바라보는 자(타자)에 관한 진실함에 의구심을 지닌다.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나와 너는 단지 상징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 상징이 일종의 표상(Presentation) (표상은 쉽게 말해 어떤 것에 대한 지각이나 기억에 근거해 의식하게 되는 관념 또는 심상을 말한다. 강희영의 경우 거울이라는 지각 대상을 관통하므로 적확하겐 지각표상이라는 것이 옳다.)으로 완성되는(완성되길 원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절대적, 불변의 믿음을 밑동으로 한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이해한다. 따라서 사바(娑婆)에 이름을 올린 다수는 그저 실체를 희망하고 있을 따름이요, 각자의 페르소나(Persona)를 진실로 투영하려할(시킬) 뿐이라는 일반적인 분석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게 아니다. ● 기실 사회 구성원들의 거의 전부는 본질이나 실재는 배경으로 물린 채 소통에 있어 가시적인 것에 초점을 두며, 하나의 거대한 집단인 사회가 요구하는 위장과 기호에 길들여진 채 살아간다. 저마다의 삶의 환경과 사회체계 및 시스템, 처해진 상황과 사건 앞에서 심리적, 외면적, 관계적 페르소나에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상징을 획득한 대신 실재를 거세당한 무기력한 인간 존재는, 또는 기호와 상징으로 치환된 '결핍된 인간 존재'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을 강력하게 욕망하는 분열적 욕망(Jouissance)을 버리지 못한다. (일례로 강희영의 작품 「거울 얼굴 드로잉」(2014)에서 얼굴의 거울은 대상의 외형을 '투영'하는 장치로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심적 상태를 투영 및 변환 증폭하는 트랜지스터이자, 올곧은 자아와 걸라진 욕망, 굴곡과 원형 사이의 교환을 통해 새로운 존재 읽기를 가늠하게 하는 일시적 바로미터이다.)흥미로운 건 지극히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의식화 되지 못하는 '결핍의 인간 존재'가 실은 자주성의 상실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독립적, 주관적 가치관을 잃어버린 개인이 양산되고 시스템이 요구하는 희생에 유구무언하게 되며 비(非)이타적 사고의 형성으로 인한 안일한 이기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타자와 세계를 인식하는 상징계에서만이 노골화 된다. 자기와 다른 타자를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타자라는 '거울'을 통하여 실존하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계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창안한 개념으로, '거울단계'라 한다. 이것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에게 해당하며 유아는 이 시기 처음 머무는 곳이 바로 상상계다. 인지는 해도 인식을 못하는 단계이다.) 에선 애초 도달 불가능하다. 그리고 거개의 사람들이 언어와 문자, 예술이 있는 상징계에서 살아간다.
작가 강희영의 그림들은 각각의 기호를 등록한 채 상징계에 움츠린 모든 타자들의 비도달적 실재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집단에서 드러나는 행동규범, 인간의 사회적 역할에서 인정받기 위한 겉모습(표상)에 대한 고찰을 요구하며, 시장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다양성을 잃어버린 개인의 모습과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한 되돌아보기를 주문한다.(많은 부분에서 상대를 기준으로 하는 오늘날의 환경에서 적절한 화두가 아니랄 수 없다.) ●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거울 얼굴 드로잉」(2014)을 비롯해 「흔적」(2014), 「은밀한 시선」(2014), 「나르시스의 호수」(2013) 등의 거울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드로잉 된 그림들을 통해 표출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전반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하며, 상징적 거세가 이뤄진 세계에서 실존의 참뜻을 헤아린다. ● 재미있게도 작업의 주된 재료인 '거울'은 일차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지각하게 만들며 엄연한 차원 간 경계를 무너뜨린다. (거울은 3차원의 대상이 2차원적 물질에 귀속되면서 본래의 상과 의미가 와해되거나 공간과 서사가 도합 혹은 각기 재해석되도록 한다. 이 역시 경계의 희석을 가중시킨다.) ● 2011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된 거울작업은 자아를 목격하게 하고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이는 대상을 내부로 소환하도록 유도하곤 한다. 이를 풀이하면 거울캔버스에 담긴 다양한 대상은 곧 사물의 관점으로 자신을 객체화하고 표현의 대상과 세계, 세계와 대상이 수시로 주객이 바뀌는 가역적인 관계에 의미를 두고 있음을 지정한다. 그래서 이차적으론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이면서 시-공간특정적 미술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 이처럼 그가 주로 사용하는 '거울'은 본다는 것과 비춰진다는 것, 드러남과 감춰진 것, 주체와 객체, 지각과 사유의 가역성을 암시하는 매체라는 사실에서 주요 소재로 위치한다. 물리적 대상의 반영이면서 대상을 통해 스스로와 마주하도록 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인 셈인데, 이는 "거울이란 사물을 스펙터클로, 스펙터클을 사물로 바꾸고 나 자신을 다른 이로, 다른 이를 나 자신으로 바꾸는 보편적 마법의 도구."라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발언과 등치를 이루면서 사유의 매개라는 것에 방점이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대목은 그의 거울 작업의 경우 보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마저 수용한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진 의미이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의도를 뜻한다. 즉 보이는 것이 존재의 현상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의 의미이다. 이는 꽉 찬 듯 여백이 들어서 있는 그의 그림들에서 확인 가능하다.) ● 중요한 건 그의 거울작업은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황에서 야기된 동시대 예술의 얼굴을 대리하는 민낯과 다름 아니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역학관계를 나타내며, 나아가 보는 대상이 결국 보는 자기 자신이라는 반성적 깨달음을 얹힌다는 것에 있다. 주체와 세계, 지각과 반성과의 가역성을 암시하는 매체로 거울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 시공의 프레임과 상관없이 역동적인 투영이 가능하다는 점도 유의미한 지점을 옹립한다. (때문에 "거울 앞에서 우리는 반사상의 주체에 벗어나 대립을 넘은 위협적인 '닮음'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 '닮음'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는 분열적 존재와 함께 본인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가의 바람은 유효하다.) ● 강희영은 누구나 인지하는 나라는 실제와 어쩌면 '닮은' 형상에 불과한 거울 속 이미지 간 상호성에서 빚어지는 현상에 주목한다. 앞서도 얘기 했듯 그건 무의식 속에 감춰졌던 '보이지 않던 나'에 대한 대면 내지는 파악일 수 있으며, 인식과 탈인식의 간극에 놓인 타인의 시선과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은 실재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목도하는 비참한 현실자체마저 포용한다. 그림 속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를 지닌 동일성에 대한 읊조림, 외부의 거울과 내면의 거울이라는 두 개의 거울을 이용해 자기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며 우리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내레이션마저 읽힌다. 단순한 이미지의 반영으로서의 거울작업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층적 함의가 이입되어 있음이다. ● 그렇다면 강희영은 어째서 거울이라는 재료에 탐닉하게 되었을까. 그것이 만약 현실의 반영이기에 혹은 동시대미술의 다원성 내지는 실험성을 연장하는 것이거나 점차 위력을 소진해가는 회화의 가치를 잇기 위한 것일까. 그것이 맞는 추론이라면 그리 간간하지 않다. 새로운 표현방법에 대한 갈구와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위한 시도였더라도 깊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지와 노력이 무의미하다 볼 수는 없으며, 젊은 작가로서 당연히 지속되어야할 것이기도 하나, 그것만으로는 어떤 변별점을 부여하긴 힘들다. 하지만 반사성을 지닌 거울을 인간 인지와 지각의 한 단면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조형언어의 모체로 삼고 주체와 대상, 지각과 반성을 교차시켜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면 의외의 긍정적 해석의 가능성이 담보된다. 그려진 이미지와 거울에 비친 이미지 사이에 부유하는 상상과 현실의 미메시스(Mimesis), 그 과정에서 새로이 빚어지는 불특정적, 심리적 이미지를 시각언어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발전의 틈을 열어 놓는다. 물론 이러한 측면이 주목받는 작가로 부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그러나 강희영의 작업은 '낯설게 하기'라는 측면에서 아직 걸어야 할 길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새로운 것을 창의적으로 표현한다는 뜻도 있지만 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든다는 의미가 크다. 이에 향후 작업은 일상화 되어 낯익은 개념이나 관념을 특수화 하고 이전과 익히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이어야 한다. 굳이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인 빅토르 슈클로프스키(Viktor Borisovich Shklovski)의 문학적 예를 들지 않더라도 창의적 기법형성에 있어 전혀 낯선 것이 아니기에 익숙함의 낯섦에 대한 경주는 수렴의 당위성을 지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들어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거대서사가 붕괴되고 미시서사인 감성의 개인과 사소한 것들마저 일그러지고 있는 오늘날 '낯설게 하기', '생소함'은 더욱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 틀림없다.) ● 이를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시각언어로 구현할 수 있는 시도가 이뤄져야 한다. (허나 지나치게 하이브리디티(hybridity)할 이유는 없다. 수직적 범주화, 단선적 양식화에 대한 주의일 따름이자 의도를 상정하기 위한 적절함이 관건이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설명(narrative)은 줄이고 스토리의 추렴을 배제하되 타자들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 보다 주력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 의도를 떠나 사유할 수 있는 창, 기회를 확장할 수 있으며 이것이 얼터모던(altermodern) 시대의 지향점이다.(관객참여 형식이 엿보이는 지금의 작업을 확장하는 차원에서도 이 부분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강희영의 작업이 과거 대비 진일보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며, 문화의 다중성인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즉 잡목림적 군락의 양태 속에서 소급하여 회화에 관한 지대한 관심 아래 모더니티의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숙고해야할 이상적 분동(分銅)이다. ■ 홍경한
Vol.20140514e | 강희영展 / KANGHEEYOUNG / 姜喜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