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050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Resilience ● '회복탄력성', 아주 재밌는 말을 찾아냈다. 요 몇 년 간의 나의 작업을 말하기에 아주 적당한 말이다. 이 말은 물질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심리학에서는 이 물리학의 용어를 정신에 빗대어 쓰곤 한다. 이른바 심리적 회복탄력성이다. 물질에 적용될 때는 그 물질이 어떤 변형의 힘을 받을 때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려는 힘을 말한다. 심리적으로 사용될 때는 정신의 스트레스 대항력, 삶의 본원적 의지와 같은 의미로 쓰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존재 일반의 힘의 어떤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쓴다. 밑바닥에 떨어져서도 우리는 다시 재기의 희망을 본다. 심지어 물도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 떠나면 다시 그곳을 채운다. 부정과 해체, 억압의 힘은 꼭 그만큼의 반대급부의 힘, 즉 긍정, 생성, 자유의 힘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일종의 리듬이다. 이는 자연의 한 진리이다. 부정이 일방적인 힘이라면 회복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부정은 꼭 그만큼의 긍정의 잠재력을 축적시킨다. 이것은 힘의 진리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힘은 힘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힘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에게 있어 욕망이란 위기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인간에게 잠재된 에너지로서의 긍정의 힘이다. 이것인 존재론적 회복탄력성이고, 이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
형식 ● 형식이란 질서이기도 하고, 조건 내지 제약이기도 하며, 그것은 우리의 편에서 보면 지각의 틀, 도식이며,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를 틀지우는 조건이다. 물론 존재로서 우리 자신도 이 형식 속에서 살며, 틀을 만들며 산다. 사회의 질서, 도덕, 기존의 문화, 관습, 관행 나아가 환경이나 우주도 틀이다. 형식은 제약하지만, 동시에 형식은 다른 형식을 위한 토대가 된다. 無로부터 자유란 없다. 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틀지우는 형식, 틀을 해체하려는 힘, 또 새로운 틀과 형식을 만드려는 힘이 공존한다. 나는 그 힘을 언제나 '욕망'이라고 불러왔고, 틀을 지우고 해체하고, 그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를 '생명'이라고 불러왔다. life-desire라는 주제는 계속 변주한다. ● 욕망은 제약하는 힘과 제약을 벗어나려는 힘의 단순한 대립관계가 아니다. 욕망은 오히려 틀을 원하고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틀을 창조한다. 無로부터의 창조도 없는 것이다. 일종의 투조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숲 연작은 자연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형의 입체 형태 속에 있다. '속에 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나무들은 이 틀 안에 있는 게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나무들은 오히려 틀을 만들고 있다. 아니 틀 속에 보호되고 있다. 모든 알이 모든 허물이 그렇지 않은가? 집은 틀이지만, 보호자이며, 우주는 법칙이지만 무대이다. 자연은 자기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또 다시 자기 자신을 해체할 생명을 움트이고 있다. 나의 작업에서 나무는 자연이고, 집은 문명이고 질서이자 구조이며, 인간의 형태는 말 그대로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존재이다. 나는 이 단순한 기호들을 오랜 동안 써왔다. 그러나 내가 탐구해 온 것은 이 삼항의 관계이며, 이 삼항을 관통하고 있는 욕망이다. 욕망은 한낱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움과 창조가 일어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생명 그 자체의 힘이다. 그렇다. 그것은 힘이다.
힘 visualize the invisible ●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는 강령은 이미 문화 저변에 깔려 있다. 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힘은 그런 것이다. 나에게 힘은 모든 존재들이 갖는 자기생성의 힘이다. 회복탄성력 역시 힘이다. 「선화랑」에서 열였던 개인전 이후 나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을 드러내 보이는 데 힘을 써왔다. 힘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힘이 보여지고 느껴질 때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힘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형태화되어야 한다. 융기하는 형태가 있다면, 무엇인가 밀고 올라오려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당기는 힘이 동시에 있다. 힘은 항상 운동 속에 있다. 정지 속에서 우리는 힘을 느끼지 못한다.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지만 우리가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힘의 가시화는 환기되거나 직접 느껴져야 한다. 나는 어떤 사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의 힘, 그 사물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의 회복탄력성을 실험한다. 최고의 회복탄력성, 그것이 그 사물이 갖는 힘의 크기이다. 우리는 더 무거운 것을 들어보기 전까지 우리의 힘을 잘 알지 못한다. 모든 운동에는 힘이 들지만, 힘을 애써 쓰기 전까지는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힘의 상대성, 이것이 힘을 가시화하는 데 있어 핵심이다. 나는 한시대의 예술가로서 인간의 근원적 힘을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발언한다. 긍정의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色∙形 ● 색을 한낱 감각이나 기호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색에 대해서 피상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들이 갖는 의지와 힘의 가시적 표명이다. 각각의 색은 어떤 느낌을 준다. 나는 언제부턴가 색을 더 이상 재현을 위해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색을 '의미있는 형식'적 요소로 쓴 것도 아니다. ● 상징인가? 일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나의 색은 색이 주는 어떤 독특한 느낌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것은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떤 실재성이다. 각각의 오브제들은 어떤 색으로 입혀질 때 비로소 그것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색은 그래서 그 오브제에 맞는 옷과 같은 것이다. 형태가 잡히고 고된 연마를 견딘 재료들은 색을 통해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내보인다. 어떻게 보면 색은 그들의 존재방식이고 그들의 기분이고, 그들의 표정이며, 성격이다. 왜 봄의 새싹들은 연두빛인가? 특정 영역의 파장일 뿐인가? 그 색은 빛을 머금고 싶다는 풀의 의지이며 생의 욕망이며, 빛을 먹고 난후 만족의 표정이다. 검정과 백색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닮은 꼴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 생성할 수 있는 광야이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력이며 현실화되기를 기대하는 힘,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현실화하는 능력으로서의 힘이다. 색의 이런 의미를 위해 나는 사물과 완전히 일체화되어 있는 색을 좋아한다. 색이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단색의 비비드하고 티 없는 매끄러움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이는 팝의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색은 존재의 표정이다. ● 한편, 형태는 그 힘과 욕망의 지표index이며 의지이다.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형태는 더욱 단순해지고 추상적인 것으로 되어 왔다. 어째서 '주름'이라는 형태에 그리 오래 끌렸는지, 주름은 왜 여전히 나를 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것은 주름은 상징적 의미에서 보다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 이행해왔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주름들은 실제적인 힘의 흔적들, 힘의 형상들이다.
소멸 ● 이별하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소멸하지 않는 것도 다시 생성될 수 없다. 무엇인가 죽어야만 다른 무엇인가가 산다. 이것이 萬物流轉,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어느 것도 그저 소멸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단지 에너지의 형태만 바뀐 것이라 하지 않는가. 자연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스승이다. 강조하지만 無로부터의 창조란 없다. 나무가 탄다. 검게 그을린다. 그것은 소멸하는 것 같지만 일정한 형태와 색을 만든다. 흑색은 소멸의 힘이자 그것의 흔적이다. 나무에게 불은 붓이고 끌이다. 흔적은 나무와 불의 흔적이지, 불의 흔적만도 나무의 흔적만도 아니다. 그래서 대립하는 것들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죽음과 삶이 그렇고, 소멸과 생성이 그렇다.
사유 ●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그것이 그것 자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보는 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시사 받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론자는 아니지만, 관객 없이는 작품도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관객이 어떻게 느낄지의 문제다. 나 역시 관객이다. 관객은 느끼고 사유한다. 설치는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 때문에 개인전을 열 때면 항상 설치작업을 메인으로 한다. '반가사유상', 천년도 훨씬 전의 이 조각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숭고하며, 완벽히 기술적이고, 울림을 주며, 사유하게 한다. 그것은 예술의 이상이다. 반가사유상은 그 자신이 사유하는 존재이면서 사유하게 한다. 그래서 그 사유의 파장은 자신을 넘어 다른 이에게 전이된다. 이 조각상은 이미 현대의 예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이 반가사유상을 전유함으로써 조각을 사유와 명상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 권치규
Vol.20140509a | 권치규展 / KWONCHIGYU / 權治圭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