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言歌 Songs without words

정은주展 / JUNGEUNJU / 鄭恩朱 / painting   2014_0402 ▶ 2014_0407

정은주_봄날, 그리움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40×65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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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4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관훈동 119번지) 2층 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당신을 기억하는 방법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9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눈먼자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예술의 기원이 전통 미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데리다는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코린트 섬의 한 여인에 대한 전설을 가져온다. 여인은 다음날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연인이 잠든 사이 벽에 그의 그림자를 따라 초상화로 남겨놓는다. 우리는 드로잉, 회화, 초상화의 기원으로 이 전설을 자주 인용한다. 데리다가 이 전설을 그린 그림들을 들고 나온 이유는 '그림자'가 현전하는 부재(present-absence)를 외연과 내포로 담고 있는 이중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연인을 바라볼 때 그는 여인 앞에 현전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 벽 위에 그림자의 선을 따라 그릴 때는 자기 연인을 볼 수 없는 상태, 장님이 된다. 종이에 선을 그을 때 화가는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기억하며 즉 눈이 먼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다. (반대로 모델을 바라보는 순간 화가는 종이의 선에 대해 눈 먼 상태가 된다. 어느 하나에는 장님이 되어 한쪽 기억에 만족해야 한다.) 결국 이 그림자 그림은 현존에 대한 흔적(trace), 현전하지도 부재하지도 않는, 현전하며 부재하는 둘 사이의 유희이다. 정은주의 『無言歌(Song without words)』展의 작품들에도 현전과 부재 사이의 흔적들이 켭켭이 쌓여있다. 풀과 나무, 꽃과 나비, 땅과 숲, 하늘과 바람이 그림자처럼 흔적으로서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각 앞에 명확한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순간처럼(「푸른 숲」), 투명한 강물에 비친 형상처럼(「파동이 일다」), 그 미결정성을 보여줄 뿐이다.

정은주_Fall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40×71cm_2013
정은주_늦가을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26×74cm_2013

정은주는 일상에서 혹은 탈일상에서 만나는 인간보다 훨씬 확실한 존재들을 카메라의 렌즈에 담거나 종이에 그린다. 태초부터 이미 그곳에 존재했음직한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형상들을 인화했을 때 이미 그들은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들의 폐허(ruins)에 가깝다. 꽃잎과 나뭇잎을 한 계절 고이 말려 종이 위에 붙여도(「꽃과 나비」) 그것은 자연의 흔적일 뿐이다. 존재에 대해 이미 눈이 멀어버려 그 시각에 더이상 의존할 수 없을 때, 작가는 눈먼 사람의 손을 개입시킨다. 그가 그린 그림을 프린팅 위에 얹고, 또 그 위에 두텁게 바니쉬를 바른다(「쌓이다」). 작가의 손이 눈먼 자의 시각을 대체하는, 즉 대리보충(supplement)하는 과정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대리보충은 단순한 보충, 부가의 의미뿐만 아니라 '대리', 대신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기존의 것이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부재하기 때문에 대체하는 것이다. 존재가 없는 자리에 흔적들을 쌓고, 눈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손이 만져주는 과정이 정은주의 작업에서 반복된다.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의 대리보충은 말과 글, 음성과 문자, 현전과 부재의 대립에서 전자들에 특권을 부여했던 전통을 비판하고, 후자들에 힘을 주기 위해 사용한 용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미지, 그림은 후자에 속한다. 그림과 글쓰기는 선(trait)으로 구성되는 동일한 행위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부재한 타자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은주가 쌓아놓은 흔적의 대상들이 꽃과 나무, 「하늘과 땅」, 「풍경」처럼 소리내지 않는 존재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대신 선(線)으로, 눈 대신 손으로, 우리 앞에 몸짓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로 울려퍼지는 그들의 노래가 정녕 들리는 듯하다. ■ 한의정

정은주_꽃과나비2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42×37.5cm_2013
정은주_풍경1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 연필, 크레용, 아크릴채색_45×187cm_2013

나무, 꽃, 풀, 나비들이 모두 소리 혹은 말이 없는 존재들인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노래같은 음악을 들려 준다. 이미지로 무언가(無言歌)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 무언가의 쓰여 지지 않은 가사들의 주 소재는 나무다. 나무는 물속세계의 생물을 지상으로 이끈 최초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아마도 최초의 지상의 지배자는 공룡이 아니라 나무인 듯하다. 최초의 사회를 이룬 나무들은 인간들과 닮아있다. 하물며 잘생긴 나무가 있고, 못생긴 나무가 있으며, 평범한 나무가 있고, 몇천년 사는 신선 같은 나무가 있고, 너무 약해서 금방 죽어버리는 나무도 있다. 적당히 먹어야 잘살고, 적당히 주변 친구들이 있어야 어우러진다. 이사도 한다. 태초에 태어난 곳에서 일(가로수가 되거나, 정원수가 되거나. 가구가 되거나 .책이 되거나)때문에 이사를 하고, 잘 적응하는 나무가 있고 적응 못하는 나무가 있다.

정은주_푸른숲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58×116cm_2014
정은주_하늘과땅_에칭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60×106cm_2013

도시로 이사 와서 열열한 서포트를 받는 나무가 있고, 그늘지고 척박한 곳에서 시름시름하는 나무가 있다. 나무도 잠을 자야 하는 것을 아는가? 어떤 나무는 IT업계의 사람들처럼 야간조명을 받으면서 밤새 일해야 하는 나무도 있다. 야간조명은 인간들에게 너무 멋진 풍경을 선사하지만. 나무는 그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 어떤 나무는 역사에 남는다. 벼슬도 받는다. 그리고 추앙도 받는다. 어떤 나무는 아웅다웅하다가 자기와 상성이 되는 나무 옆에 있다가 죽기도 한다. 너무 강한 나무 옆에 있는 나무들은 잘 자라지 못한다. 봄이 되어 준비를 하고, 여름이 되어 만개하고 짝짓기도해서 새 생명도 낳고 매년 살아온 결과물들을 내보이기도 한다. 이쁘게 성형되는 나무들도 있다. 온갖 가위질로 잘 다듬어서 사람이 보기에 이쁜 나무로 변모한다. 어떤 나무들은 자라는 것을 극히 제한시켜서 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분재를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자신의 꿈을 실현 시킨 것을 소유하는 즐거움으로... 나무의 사회와 사람의 사회는 닮아있다. 나무와 함께 사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 일까? 아니라면, 어떠한 생물의 사회도 비슷한 것일까? 나는 나무를 보면 애닯고 좋다. 인간을 보면 신경 쓰이고 화나고 애닯고 좋고 싫은 것처럼. 나무는 사람 같다. 어쩌면 나는 가사가 없는 노래처럼 소리 없는 존재들로 인간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 정은주

Vol.20140403a | 정은주展 / JUNGEUNJU / 鄭恩朱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