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0311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 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blog.naver.com/noongamgo
꿈을 소비하는 아이들 ● 요즘 아이들은 바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모들의 극진한 성원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같이 영재로 키워진다. 대부분 그렇듯이 영재의 꿈은 성장하면서 하나, 둘씩 참혹한 현실 속에서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다. 물론 간혹 꿈을 이루어낸 박지성이나 김연아와 같은 천재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과 재원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보여지는 아이들을 향한 조기교육의 귀결점은 불행히도 평생 직업이라기보다는 잉여의 취미생활이 되어버린다. 부모에 의해 강요된 꿈은 '스스로 꿈꾸는 자의 행복한 결말'로 끝날 수 없기 때문일까? ● 반은 꿈꾸지 못하고, 나머지 반은 부모의 꿈을 꾼다는 '꿈없는 세대'의 비애는 결국 나약하고 수동화된 정체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꿈꾸지 못하는 대신 꿈을 소비한다. 하나의 꿈을 다 소비하고 나면 또 다른 꿈을 찾아야 하듯이, 꿈은 쥐었다 싶으면 이내 사라지는 신기루가 된다. 적절한 소비가 적절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하듯이, 꿈의 소비는 결국 아이들을 '필요'로 가장된 마취상태에 빠지도록 만든다. 불행히도 아이들의 삶은 부모들보다 더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옷을 입는다. 단지 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강요된 꿈이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란 압력으로 가해진다. 결국 강요된 꿈은 허구적이고 과대 포장된 자아인식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성희진의 사진은 이러한 아이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로, 현대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바쁜 아이들의 꿈을 존재와 부재라는 변증적 관계를 통해 제시한다. 아이들의 개별적인 이름 대신에 종목과 직업만 남아 있는 작품 캡션처럼,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 누군가일 뿐이다. 이러한 수사를 통해 사진 속 아이들은 특수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라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느 아이들 중 하나인 익명의 존재로 재현된다. 개별성의 부재와 함께 사진 속에서 아이들의 정체성 또한 지워지고, 사진 속 아이들은 부재하는 부모의 그림자로 대체된다. 그 결과 소비의 대상인 꿈만 남고 소비의 주체인 아이들이 지워지는 환상과 현실의 혼재로 이어진다. 분주한 아이들은 꿈을 표상하는 의상과 도구로 무장하고 그들의 주변 또한 이러한 표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정작 아이들의 얼굴은 공허함으로 대체된다. ● 사진 속 아이들을 공적인 존재와 자신을 드러내는 사적 존재 사이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희진의 작품은 그 뿌리를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유형화된 포트레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잔더의 사진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의 고정성, 정면성, 개체의 독립적인 공간 점유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희진은 '거리두기'를 통해서 사회 일반이 가지고 있는 '어린이 이미지'의 정형성과 통념을 벗어난 다소 차갑지만 날카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그의 사진적 표현 양식은 포토저널리즘의 '환경 포트레이트'를 많이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토저널리즘이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철저히 회피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립된 공간 안에 인물들을 설정함으로써 사진 속 아이들은 현실이 아닌 무대 위의 공연자(performer)와 같은 모습으로 재현된 것 또한 동일한 전략의 일부로 보인다.
이러한 접근은 성희진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인물과 배경과의 관계성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부분의 유형학적 인물 사진에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나 소유물은 그들의 얼굴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얼굴이 아닌 오히려 그들의 주변인 경우가 많다. 작가의 사진 속에 그려진 배경 또한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 결과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배경보다 아이들의 얼굴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율배반을 낳는다. 컴퓨터 게임처럼 아이들은 주어진 페르소나에 몰입하고 있는 듯하다. 꿈을 지향하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이 지워지면서 사진 속에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전수받은 가식적 가면만 남게 된다. 성희진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유형학적 외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나 랄프 유진 미트야드(Ralph Eugene Meatyard)의 작품에서 제시되는 가면으로서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면적 속성은 성희진의 전작 시리즈 「어덜키드」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두 시리즈를 관통하는 작가의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어덜키드」에서 두드러졌던 '기이함' 혹은 '괴상함'이 「비지키드」에 와서 간접적이지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현학적인 아이들의 표정과 외형이 「어덜키드」의 전략적 포인트였다고 한다면, 「비지키드」는 절제된 표현을 통해서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애어른'의 또 다른 단면을 제시한다. 사진적 표현방식에서도 이러한 전략은 잘 드러난다. 광선이나 촬영시점을 지극히 평면적으로 가져가고,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저널리즘이나 상업 포트레이트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시선 집중 효과를 철저히 탈피한다. 형식보다는 작가가 지향하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아이들을 고정시키려는 전략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만든 결과다. 성희진의 사진은 무미건조함과 평범함을 표방하는 현대사진적 접근을 많이 닮아 있지만, 사진을 통해서 한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의 허구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적 가치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사진 안에 사회학적 객관성과 극도로 정제된 주관성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었다.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는 그의 부모가 죽은 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형의 그림자를 달리에게 강제로 입힘으로서 평생 다중인격장애라는 문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꿈을 향한 아이들의 바쁜 일정은 오히려 꿈을 상정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더 중요한 순간들을 지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액의 레슨을 받고, 좋은 장비를 갖추는 것이 장래의 '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아이들의 무표정보다도 차갑고 냉혹할 것이다. 성희진의 사진 속 인물의 모습은 누군가의 꿈을 대신하고 있는 안타까운 세태의 반영이거나 아이들 스스로가 원해서 택한 야심찬 희망의 행보일 터. 모두가 현실의 그림자를 지워 버리고자 가상을 향한 몸부림을 자청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아이들이 부모 혹은 세속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좇는 생산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 김성민
Vol.20140311a | 성희진展 / SUNGHEEJIN / 成希珍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