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022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서교예술실험센터 SEOUL ART SPACE SEOGYO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9-8번지 Tel. +82.2.333.0246 cafe.naver.com/seoulartspace www.seoulartspace.or.kr
파괴자가 만들어낸 아르카디아(Arcadia, 목가적 이상향) ● 이화평은 개인적 경험과 기억, 그리고 환상에 이끌려 '현실'과 그가 건설한 '관념의 세계'가 (비)순차적으로 조합되고 이격되는 모든 과정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는 작가다. 그의 작품을 건축으로 묘사할 때, 그가 가지는 독특한 특질 중에 하나는 화려하게 치장한 비잔틴 건축 양식을 뒤집어쓰고 건물 내부는 비참한 서사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그는 캔버스 안에서 부유하는 배우들을 배치하며 낡고 냄새나는 기억을 여러 번에 나누어 영역을 지정하며 자신의 의식과 관람객의 시선을 재배치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낸다.
작품에서 눈여겨볼만한 특징은 한 인물이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그림 안에 남는 요소들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단서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화평이 만들어내는 풍경화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작업을 위해서 그가 직접 선택한 배우들은 그에게서 제공받은 역할들을 충실히 행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가 상당히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개연성이 없는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복제된 행위자들은 몸가짐을 통제 당한다. 팔과 다리의 방향, 각도, 풍경의 흐름 등을 교묘하게 통일시키는 작가 고유의 규칙은 어긋남 한번으로도 작품의 실패로 귀결되기에, 관객들은 한가하게 관람하기 어렵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꽉 짜인 구성은 흔히 보수주의의 미감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의 작품이 유토피아적 실험주의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림 안에 내장된 시각적 긴장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피조물들은 미래를 파괴하는 한편, 그들의 아르카디아를 일구고 또한 그들 스스로 의기투합해 유토피아 본질이 된다. 반면에 우리에게 명징한 회복을 촉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배우로 지목된 자들은 그들의 유토피아 안에서 이야기를 재가공하고 최종적으로는 투쟁을 기입해 상처가 예쁘게 전시장에 디스플레이된다. 작가가 광적으로 치장해놓은 가상세계는 어쩌면 그가 안식을 하기 위한 곳, 또는 자신을 향해 부르는 응원가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쉽게 살펴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찝찝하고 오래된 기억을 근사하게 지어 놓고 그 안에 잠복해 있다가, 지긋지긋한 현실의 공포에 포박 당하기 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가 표현한 아름다운 경관은 왼쪽 상단 모서리부터 오른쪽 하단 모서리까지 등가적으로 묘사된 덕분에 구체적 형상을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산천의 나무들과 열매에 인간 군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원근법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그동안에 연출가를 자처했던 작가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난장판 안의 배우가 되어 재현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난다. 다시 말해 평화로운 자연을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창조하고 보다 완결된 형태로 모든 것을 제시하며 스스로가 유토피아의 창조주가 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의 개념은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그 점에서, 현재 도래하고 있는 사회의 일면과 작가의 고뇌를 표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의 그림을 객관적이고 대안적인 풍경으로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화평의 작품을 진지하게 논하려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쌍방의 시점에서 모두 언급해야만 한다. 그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 사회의 경제논리에서 시작하는 냉혹한 구조, 그를 한동안 따라다녔던 추락과도 같은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그림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의 그림은 개인적 관념에서 비롯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가꾸어낸 파괴적 아르카디아가 아니라 천국이자 지옥이고, 아름답지만 추하며,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혹은 그 반대로 디스토피아가 된 유토피아)'이다. ■ 강유진
Vol.20140220e | 이화평展 / LEEHWAPYOUNG / 李和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