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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207_금요일_06:00pm
2014년 쿤스트독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 이것은 2013년 11월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3학년 과정의 학생 몇몇과 가졌던 인터뷰의 내용이다. 당시 내용을 첨삭하여 현재 입장에서 내가 주관적으로 재정리해 본 것이다. 본 전시의 서문을 아래의 것으로 대신 한다. 2013년 11월8일(금) 22:53 ● 사루비아다방의 이관훈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학교 수업은 주제를 정한 후 작가님들과의 인터뷰 후에 저희가 전시를 기획해 보는 것이 이번 학기 목표구요. 아래 것을 주로 여쭐 것 같습니다. 작가님 작품은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전의 작품들과 '해치의 크로스백' 'Tow Pages-Shadow' '63개의 조각으로 옮겨진 이미지''왜 M.뒤샹은 작품 제작 포기선언 후에도 작품을 남겼나...''그림자, 사건 혹은 파국' 등을 인터넷과 잡지를 통해 조사했습니다.
1. 작가님은 작업의 모티브를 보통 어떻게 얻으시나요? (오래전 나의 글『젊은모색 '94』展(국립현대미술관)의 일부로 대신한다) "용서 없이 정렬되어 견고한 매스로 구성되어진 파지티브(positive)한 문장의 열과, 이와 이를 맞추는 빈 행간의 여백으로 짜여 진 텍스트의 구조에 주목해 본다. 도전적인 파지티브의 "나"와 그 나머지의 "나"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떠돌다 남은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닌 흐트러져 굴절된 다른 "나"로서 마주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이것은 평면적으로 펼쳐졌던 사고의 장이 유연한 (입체)곡면으로의 변모와도 같은 것이다. 즉 지금 여기 시․공간의 XY의 좌표장을 가로지르거나 뒤집거나 하여 굴곡진 것, 또는 미세한 틈이나 작은 구멍일 수 있는 Z축을 경험하게 되는 인식의 토폴로지(topology)." 2. 아트인컬쳐 인터뷰에서 '작업을 하면서 욕구를 억제하려 하고 도리없이 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걸 보았습니다. 처음 작업에 착수 하실 때 표현욕구는 작가님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인가요? (내가 아트인컬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나? 어쨌든 이 질문에서 인용된 말은 아마도 나의 첫 번째 개인전(제3갤러리, 1993) 자서 중 "내가 그림 그리기(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지니는 관념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그림이 자기감정의 표출, 부추김에 있다기 보다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잠재우는 장치로서 놓여 져야 하겠다는 것일 게다"라는 문장과 "가셔지지 않은 욕망들이 아직도 나를 부추기려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들을 될 수 있으면 지체시키고 머무르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란 문구로부터 기인한 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문제시 했던 것은 모더니즘의 낭만주의적 가치와 태도, 거대하게 얘기해서 서구의 일방향적인 시간관과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성(근대정신/근대시선)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대한 해체라고 할 수 있다. 좁혀 말해 작품은 작가 개인의 표현의 결과물이라는 근대미술의 믿음에 대한 불신 즉 작품의 기원이 나 개인에게로 향해져서는 곤란하겠다는 것 나아가 작품의 기원 그 자체에 대한 거부의 언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그때 "나에게 그림은 항상 삶의 평형적 지속을 이루고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으로만 남기를 바란다"고 말한바 있다. 따라서 '표현에의 욕구'란 작품을 함에 있어서 내가 문제시하는 핵심에서 겉도는 부분이 되겠다. 내가 굳이 끌리는 측면이 있다면 '갸우뚱한 균형'이라거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식의 역설같은 것이다.
3. 의도를 배제하려 노력하신다고 하셨는데, 작업 하나를 어디까지 작업하시는 건가요? [완성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내가 언제 어디에서 '작품에서 의도를 배제하려 노력'한다고 했지? 이 질문의 답을 이렇게 대신한다) 지금껏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화두가 있다면 미술작품에서 '대상화'에의 경계이다. 이는 위 2번 질문에 대한 답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작품은 우선 재현으로부터 그 시작의 위상을 달리하여 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작품들에서 그런 문제점을 자주 보게 된다. 나는 그에 대한 반성을 작품하기에 못지않게 빈번히 행한다. 작품의 성패와 그 수준은 대체로 내가 알 수 있다. 4. 일상의 재료로 작업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자신의 어떤 신조가 있어서 인가요? 내가 그간에 취해 왔던 재료와 물질, 오브제 등이란 대체적으로 시간성이 반영되는 비고정적이고 변화가능한 것들이라거나 정서적으로 연약하거나 부드러운 것, 크기 면에서 소규모성을 띠는 것들이었다. 이런 특성을 갖는 재료와 물질의 채택은 위 2번과 3번의 답변에서 얘기한 나의 작품에의 관심과 태도를 대신하고 반영하는데 있어서 일단 불만은 없다. 또 우습지만 이러한 특성을 이루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는 나의 게으름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런 재료의 선택과 다룸에 있어서 종종 발견의 기쁨 또는 특이한 일탈의 즐거움이나 쾌감을 맛보는 것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나아가 그런 행위의 과정을 통해 작가로서의 은밀한 자부심을 누리기도 한다. 모순되게도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아직 떨궈내지 못하고 있는 꼭지와 같은 것이다. 그에 대한 유혹은 대단한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나의 취미와 취향에서 선택된 것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5. '논문을 태운 재' 이 작업을 구상하게 된 이유와 의미를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이에 대한 답변은 2012년 사이아트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게재된 나의 짤막한 자서로 대신한다)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Will a phoenix arise from the ashes? J. 발데사리(J. Baldessari)가 1969년에 제작하고 이듬해 유대미술관에서의 『Software』展에 출품한 「소각작품(Cremation Piece)」이 있다. 이전에 행한 모든 그림들을 태워버리고 남은 재를 상자에 담아 벽 안쪽에 설치하고, 그 벽 위에는 상자의 존재를 알리는 기념 소패만이 부착되어 전시되었다. 그는 당시에 자문했다.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재로 되어버린 그림들은 다시 예술의 물질로 될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이후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최상의 작품으로 여겼다. 40여년 전에 발데사리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를 빌어 자문해 본다.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예술은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예술은 재란 물질로부터 나올 것인가? 재가 생겨나서 그것이 기능하게 되는 비물질적인 문맥이 예술로서 기능하게 될 수 있을까? ... 재는 예술로부터 나올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또다시 여기로부터 얼른 도망가야겠다. (느림보)
6. 작가님 자신의 작업을 누군가에게 선물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질문 자체가 낯설다. 선물과는 다른 경우이지만 개인전 초대에 대한 답례로 화랑 측에 소품을 세 번(2008, 2009, 2011)정도 선사한 적은 있다. 물론 이는 전시 전에 화랑측과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 7. 박이소작가의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이 말을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굳이 이 말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대체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충분히 짐작되고 나 또한 대체로 이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맥락하고는 상관없이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거슬리고 거북하다. 이런 소인에 대해 밝힌다면 역설적이게도 나는 지금껏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지점에서 예술의 출구와 가능성을 봐 왔고 이에 대해 애써 지지해 왔다.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잉여의 지점이야말로 예술이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예술이 기거하게 될 공간이라고 여긴다.
8. 작가님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또는 문장은 무엇이 있을까요? (굳이 말하려면...오래 전에) 시간이란 겹겹이 쌓여져서 누적된 주름의 다발과도 같다. 시간은 순간과 순간, 차이와 차이의 경계 사이에 놓여 지는 틈이나 간격이나 여백에 위치한다.(공간, 1997.9) 9.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다면 어떤 전시를 해보고 싶은지? [전시기획연구에 참고하려 합니다.] 가능하면 장기간 전시장을 나의 스튜디오(기거장소)로 사용하고 싶다.
10. 작가님은 관객이 무얼 어떻게 느끼길 바라시나요?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관객을 그리 고려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최고의 관객이 있다면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작품하기에 대한 중요한 전제 하나가 있다. 즉 작품이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예술에서 제일차적으로 떨구어내야 할 허구에 불과한 것이며 나아가 작품은 보편한 것으로 결코 나누어져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고백컨대 이것은 아주 오래 전 나의 스승 홍명섭 선생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예술을 그렇게 믿고 있다. 보편성에의 벡터의식이야 말로 예술을 깍아 먹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 나는 지금도 작품 함에 있어서 그 점을 항상 경계한다. 신통하게도 짐작컨데 지금껏 비교적 다수와 공감되는 듯 했던 나의 작품의 경우(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대체로 나에게 싱겁거나 내가 그리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1. 작가님이 작가로서 포기할 수 없는 점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위 10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대신한다) (그 중에서) "작품이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예술에서 제일차적으로 떨구어내야 할 허구에 불과한 것이며 나아가 작품은 보편한 것으로 결코 나누어져서는 곤란하다는 것" ■
Vol.20140207a | 허구영展 / HEOKUYOUNG / 許求寧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