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0127_월요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설날연휴 휴관
스페이스 캔 Space CAN 서울 성북구 성북동 46-26번지 Tel. +82.2.766.7660 www.can-foundation.org
한국사회의 혼성문화와 경계집단 ● 1960년대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발하였는데 냉소적이고 탈역사적인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대중예술에 그 기반을 두었다. 문화예술에 있어서의 그것은 잡종성과 복합성의 미학을 제시하며 상호 텍스트성, 패러디, 혼성모방, 나열과 병치 등 다양한 형식으로 도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것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 내리기는 어렵지만, 리얼리즘의 재현 미학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의 비대중적 엘리트 취향에 반대하는, 어찌보면 어정쩡한 위치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들이 그것을 모더니즘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부정이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즉흥적이고 순간적이며 파편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일찍이 프랑스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도래했음을 선언했다. ● 드보르에 의하면, 스펙터클의 사회는 직접적 삶과 재현 대신에 이미지와 복제물, 곧 허상이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적 사회임을 암시했다. 스펙터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며 동시에 그것의 위력은 자본의 음영이 드리워지는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 발휘된다. 자본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스펙터클이라는 거대한 축적물로 귀결되며 또한 그것은 특정 대상이나 독립된 이미지라기 보다는 사회의 이미지들에 의해 조작되어 형성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스펙터클은 이미 관념적 이미지의 범주를 넘어섰고, 정치, 미디어, 문화, 철학을 지배한다. 동시에 개인의 사회 활동과 대인관계는 물론 삶의 목표와 세계관까지도 설정해 준다. 스펙터클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 가장 큰 배경,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성과 확산은 TV, 비디오, 케이블, 뉴미디어 (근래에 들어서서는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라는 매체에 이르기까지) 등 대중 매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윤상훈, Society of the Spectacle, 인터알리아, 2011, p4.)
이러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과 자본주의 사회, 다시 말해 스펙터클의 사회가 만들어 낸 허상과 허위, 그리고 그로 인한 폐해들은 김동현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발견되고 있다. 특히 그는 당대의 혼성모방과 자아의 결핍에 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국의 하위문화, 혹은 매니아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천착해왔다. 소위 '홍대 문화'라고 통칭하여 불리 우는 이 독특한 이단적 성향의 근본 없는 문화는 젊은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기성세대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볼썽 사나운 반항의 아이콘으로 각인 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럽과 미국의 대중문화라는 것이 음악적 장르의 변화와 함께 동반 성장하였고 이러한 서구의 대중음악은 결국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기득권에 대한 투쟁,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 종족적 자긍심 등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는 그 의도와 기원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개인의 의견이나 철학이 이입되지 못한 채 오로지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옷차림이나 헤어 스타일을 고스란히 복제하는 행위로 그치기 일쑤이다. 단지 시각적 감흥에만 반응하는 우리나라의 문화 주체들의 표피적인 행태를 '대중에 의한 하나의 문화'라고 보기엔 다소 민망할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을 작가는 '표류한다'라는 표현을 빌어 직접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는 한국의 문화 주체들을 일종의 경계집단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경계집단은 본래 속해 있던 특정 문화권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오게 되면서 현재의 상태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는 집단을 일컫는다. 이 경우에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권에 따른 주체의 이동의 관점에서 목격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가 속한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여과 없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돈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했다고 보여진다. 한국 대중문화의 태동은 전후(戰後) 미군들에 의해 파편적으로 수용하게 된 탓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일부 젊은 계층들에 의해 사회적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기성세대들의 눈에는 이러한 행태들이 시대의 새로운 변화로 비추어 졌던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던 가치관을 흐트러트리고 윤리와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새로운 문물의 급작스런 유입이 초래할 치명적인 결과를 이미 한번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어찌 보면 덩치 큰 푸른 눈의 미군들은 더 큰 공포의 대상으로 비추어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지점이 바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타협되지 못하고 있는 세대간의 문화 갈등의 시발점으로 보여진다.
작가는 이러한 기성세대들에 의해 자행된 고급과 저급, 상위와 하위 등으로 극단적으로 분류되는 문화의 일방적 가치판단과 흑백논리를 작품활동을 통해 경계해왔다. 우선 그의 초기작부터 살펴보자. 그는 화면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주변부에 하위 문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기호와 상징의 오브제들을 나열하였다. 해골 문양, 전자 기타, 클리퍼 슈즈, 타탄 체크 (스코틀랜드 전통 문양), 망사 스타킹, 지퍼와 쇠사슬 등 그가 제시한 오브제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의 펑크 뮤지션 들로부터 발생한 매니아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이와 더불어, 과하게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라든가 몸에 꼭 맞는 교복 등은 일본의 오타쿠나 메이드 문화를 대변한다. 인물은 항상 제단 형태의 좌대에 앉아있고, 불교나 동양 신앙의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후광 표현이 다채로운 패턴으로 등장한다. 그 뒤 편으로는 그리스의 신전에서 발견할 수 있을 법한 이오니아 양식의 건물 기둥들을 배치했으며 간혹 성황당의 꽃술이나 꽃띠 따위의 우리 토속신앙의 흔적들도 목격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제단화나 영정 그림과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동서양을 망라하여 보편적으로 종교라 불리는 것들과 개인이 '신앙'으로 여길 만큼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이 시대의 도상들을 한 화면에 뒤섞어 가장 막강한 영적인 결과물을 도출해 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교란시키고, 종교적인 엄숙함과 하위 문화의 도발적 성질을 충돌시켜 부조화적이거나 생경한 이미지로 조작함으로써(이승훈, 제의적 컨텍스트 공간에 남겨진 하위문화의 잔영에 대하여, 2011) 보편 타당하다고 여겨져 왔던 가치들을 해체한 뒤 재조립한다. ● 초기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상대적 소수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왔던 것과는 달리 근작에 이르러서는 다소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기성세대들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선 종교화의 형태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하나의 신격화된 인물이 제단에 앉아 있던 방식은 사라지고 이제 군상이 등장한다. 군상의 등장은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작의 경우 관객 시선의 위치가 작품 속 인물의 시선과 일치하거나 혹은 등장인물이 도리어 높은 위치에서 관람자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수직적 구도였던 것에 반해 근작은 수평적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문화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젊은 세대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과거의 형식에서 이제는 관객 또는 기성세대들에게 관찰 되어지고 평가 받게 되는 형식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소 어둡고 불투명하게 흘러내리는 배경 처리는 문화 경계집단의 암담한 미래를 예견한다. 돛이 없는 작은 배와 뗏목은 금방이라도 뒤집어 질 듯 위태롭다. 방금 막 난파된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 판자에 몸을 싣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태평하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고, 일관되지 못한 행동 패턴을 보여주며 서로가 소통하지 못하고 융화되지 못한 채 각자의 목소리만을 늘어 놓고 있다. 본인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잔뜩 뽐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테지만 정작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엇비슷한 화장법과 모양새로 비추어 질 뿐이다.
초기작에서 화면 전반에 내세워졌던 다양한 오브제 대신 근작에서는 화면의 절반 이상을 '물'이 차지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물의 표현은 스펙터클의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들, 포스트 모던이 추구하는 혼성문화의 흐름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반면 그것의 실체는 잡을 수 없다는 물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속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매개이다. 이것은 동시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의 쉽게 모방하고 금새 흥미를 잃고 삭제하는 가벼운 정체성에 대한 완곡한 은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젊은 세대들이 타자를 복제하여 자신과 동일시하는 행위는 결핍에서 기인한 나르시시즘 탓이고 그것은 분명히 병리적이고 퇴폐적인 현상이라고 현실을 고발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문화가 새로운 문화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한 것이고 문화의 주체들은 잘못된 지점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단지 표류 중일 뿐이라고 피력한다. 이 정체불명의 세대들은 과장된 모습을 하고, 높은 구두를 신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뒤뚱거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껍데기를 잔뜩 부풀릴수록 알맹이의 결핍은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과도기적 풍파를 겪고 나서야 올바른 항로를 찾게 되는 것이고 비로서 새롭고 독창적인 우리만의 대중문화라는 안정적인 부두에 성공적으로 정박하게 되는 것이다. ● 주변을 둘러보면 상황은 꽤나 비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본인 또한 과도기적 표류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솔직한 자기고백이 가능해 졌다고 믿고 있다. 문화의 주체들이 확고한 자아를 찾고 조금 더 안정적인 정체성을 확립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투명하게 고찰해 보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보다 심도 깊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나침반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비로서 남과 다른 차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은 이 과정이 이질적이고 낯설다 할지라도 참고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작가의 최종적인 진술이다. 우선 필자는 작가의 권유를 따라 보도록 할 예정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새로운 현상들을 믿고 관망해 주는 것이야 말로 이 혼돈의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기성세대가 저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이 아니겠는가. ■ 윤상훈
Vol.20140127e | 김동현展 / KIMDONGHYUN / 東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