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1214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용 스튜디오 YONG STUDIO 부산시 동래구 사직3동 401-2번지 4/6
암묵적 살인과 용인된 혐오 ● 오만한 편견에 대한 물음 『살인-놀이』展에서는 바퀴벌레, 개미 등의 죽음의 현장이 드러난다. 우리 인간의 생활 전반에 비추어 볼 때 '죽음', '현장'이라는 단어의 사용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이 미미(微微)한 현장을 김등용은 분리된 개별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통해 재의미화를 시도한다. 먼저 Thumbprint 시리즈에서 살생의 주체는 분명하다. '지문(指紋)'은 생체인증(Biometrics)의 신체적 특정으로서 본인 고유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살생의 주체가 분명함에도 이 행위는 동물박제에 따른 동물옹호론자들의 것과 같은 여론을 형성시키지 않으며 인간의 세계에서 만큼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는다.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가속된 생태학적 위기와 생명경시에 따른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이 행위만큼은 예외적 문제로 배제되는 듯하다. 이것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말 그대로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살생이다. 그것은 살생의 대상이 '곤충', 보다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벌레'에 기인한다. 살생의 주가 되는 바퀴벌레는 혐오의 주요대상이다. 근대 위생의식의 보급은 바퀴벌레의 혐오에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지금도 대중매체는 그들의 해악(害惡)에 집중한다. 우리의 거주지에 동의 없이 생활하는 바퀴벌레는 '불쾌한 손님', 또는 '혐오스러운 범죄자'일 뿐이다. 그러나 전 세계 3,700여 종의 바퀴벌레 가운데 우리가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바퀴 벌레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이 소수에 의해 고정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방제(防除)를 위한 살생을 응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오히려 장려되는 이러한 살생을 확대하여 드러내는 김등용의 작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등용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3억 년 전 지구에 등장한 바퀴벌레, 인류의 존재 역사보다 긴 바퀴벌레의 시대에 있어 역으로 인간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지는 않는가. 이것은 인간의 오만한 편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가. 그것은 보다 나아가 사회체제와 문명자체에 대한 비판에 닿아 있으며 따라서 김등용의 작업은 우리가 잊어가고 혹은 잃어가고 있는 인간의 세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바로 여기서 '살인-놀이'라는 전시 주제의 의미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기원을 음식과 관련된 것에 두었던 혐오의 의미는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에서 '인간'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사회관계망 가운데 우리는 종종 거대담론을 그 권력으로 하여 친숙하지 않음을 외인(外人)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하고 또한 방제라는 명목 아래 이단자(異端者)의 이름을 덧씌워 재단한다. 여기에서 권력이 동반한 폭력 역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The Play 작업들을 이해할 수 있다.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그리고 개미에게로 이어지는 이 작업들에서 LEGO의 5cm가 채 되지 못하는 칼은 '살해흉기'의 의미를 회복한다. 이때 '나의 즐거움'은 살생이 놀이로 치환 될 수 있는 타당한 근거이며 우리에게 있어 보다 친근한 이들 역시 그저 '놀이'라는 이름에 소모품으로 사용될 뿐이다.
우리는 '나의 즐거움'이라는 쾌락가치의 방자함으로 살인이라는 유희를 정당화 하고 있지는 않는가. 혐오의 대상은 매체에 의해 학습된 것은 아닌가. 또한 그것의 방제는 우리의 오만한 편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가. 김등용의 작업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물음으로 이끈다. 오만한 편견에 대한 재고(再考)의 요청, 곧 그것이 확대를 통한 이미지의 강력함으로 김등용이 목적하는 바가 아닐까. '당신에게 있어 벌레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 담지(談智)
Vol.20131214d | 김등용展 / KIMDEUNGYONG / 金登容 / sculpture.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