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1206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두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14-59번지 2층(문래우체국 옆) Tel. +82.10.4940.3035 cafe.naver.com/gallerydoodle facebook.com/GalleryDudl dudl.kr
서울의 빈 중심, 문래동에서 서울을 바라보다. ● 『대기발령상태』는 세 명의 사진가가 세 개의 계절을 통과하며 서울의 작은 마을, 문래동을 기록한 결과물 중 일부를 모아 사진책과 전시로 동시에 엮어낸 것이다. 빠르게 압축 성장을 경험한 서울의 단층을 확연히 볼 수 있는 문래동은 철공인들의 공방 곁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며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직업의식과 근대의식, 새로운 주민이 된 예술가의 작가의식은 '진정성'이라는 범주의 내포를 이루며 근 몇 년 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거기에 새로운 장소를 점유하려는 사진대중의 이미지 소비욕구가 발생시킨 사진의 '변장'은 오해와 함께 공간유토피아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자주 무너뜨리는 사진들 덕분에 변장전의, 마스크를 벗은 문래동의 빈 공간들로 세 사람의 시선이 구체적으로 스며들게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에서 문래동의 틈이 보인다면 그것은 서울의 틈을 엿보는 일이 되지 않을까. ● 이즈음 나는 도시의 빈 공간을 일시적인 전시공간으로 활용한, 대안의 게릴라식 전시형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빈 공간에 작품이 거주하는 동안 신선하고 낯선 호흡들이 다녀가면서 살아있는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모습은 생각만으로 기쁘고, 바쁜 일이다. 닫힌 공간에 숨이 들어가니 기쁜 일이고, 보물찾기하듯 숨은 공간을 발굴해 내야하니 바쁜 일이다. 그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에 한번은 가보자는 생각이 드니 종일 길 위에 있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도림천을 거닐다 저물녘에 문래동근처까지 오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친구의 집이 문래공원 옆이었고, 초대를 받았던 그때도 익숙한 낯설음이 교차하는 해질녘이었음을 떠올렸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빔'의 시간에 마주한 섬뜩한 동네얼굴이었다. 그런 후에 다시 찾게 된 문래동에서 정중동의 텍스트를 보게 되었다.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지나 호박색 조명이 따뜻하게 빛나는 카페로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복고적이거나 낡은 것도 아니고, 조심스러운 개성의 카페였다. 하지만 처음 이 거리에 들어선 자를 소박하게 환대해주는 가정집의 식탁에 앉은 기분. 문래동의 두 번째 얼굴이었다.
우연이 계속 이어지면 필연에 이른다고, 문래동 사진작업들을 들고 나타난 사진가들의 사진 속에 한 때 머물렀던 그 거리의 시간을 다시 보았다. 불과 일 년 전의 일인데 희미한 기억들이 부서져 내린다. 사진 속에는 오래된 철공소와 카페, 선술집, 공방, 작은 갤러리, 밥집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아파트와 높은 빌딩들이 작은 마을을 층층이 에워쌌는데, 순간적으로 뭔가의 사건이 발생한 듯 흔들림을 감지하게 되었다. 낡고 퇴색한 담들이 빼곡하게 그어놓은 시간의 선분들 뒤로 깨끗한 선들이 휙휙 올라가거나 옆으로 퍼져가는 것. 그 속에서 문래동은 폐기와 대기의 상태를 가까스로 유지한 채로 있었다. 관성적으로 되풀이되는 통합 불가능한 두 개의 패러다임이 무모하게 접합하다가 서로에게 없는 것만을 요구하며, 그것이 소통이고 사랑이라 우기는 정치한 사랑의 풍경들이 이러한 것일까. 문래동을 둘러싼 뉴스나 블로거들의 방문기 및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래동 이미지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퇴행의 이미지들로 향수어린 복귀를 말하며 기억의 2차 가공을 시도하려한다. 과거가 현재에서 미화되고 이상화되는 방향으로 자꾸만 변형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문래동의 세 번째 얼굴, 이미지였다. 그 후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문래동의 여러 얼굴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주로 유토피아를 그려내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답답한 상황이 아득하게 몰려왔다.
그런 가운데 뭔가의 징후들을 찾아 나선 이 세 사람의 움직임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사적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허물어져 일터와 삶터가 구분 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이자 앞'마당'인 문래동의 소로에 이끌리게 되었다는 김충원은 그 골목에서 마을의 바깥을 살피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바깥에서 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바라보기를 수십 차례, 김충원의 문래에는 구멍 뚫린 나뭇잎 뒤로 계속 변화하고 있는 구름파편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견고한 모든 것은 허공으로 연기처럼 사라진다'(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에는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내린다.'로 표기됨.) 말이 떠올랐을 것이다. 윤경희가 골라 낸 문래의 문양들이 그러하듯,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은 철자제의 무늬와 곳곳에 새겨진 아티스트들의 흔적들, 작은 갤러리에서 꿈틀대는 창작의 열의들에 이끌리게 된다. 건축가인 윤경희에게 이러한 풍경은 익숙할 터, 수집하듯이 이미지의 조각들을 모아내 새로운 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문래동에 대한 소개 중 일부를 살펴보면 '예술과 철강의 소통'이라는 문구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소통은 역설적으로 이질적인 것의 배치를 통해 이뤄지거나, 그것은 언제나 '오해(메꼬네쌍스)'를 전제로 하기에 '온전한'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사진으로 소통하기' 또한 그런 맥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래동을 도시의 '빈 중심'으로 포착해낸 박선주는 어둡고 적막한 가운데 그 자체로 놓여있는 사물들과 포장에 주목한다. 박선주의 사진 속에는 분명히 지나가는 빛들의 궤적이 있고 겨우 드러내는 사물의 표면이 있다. 주로 철공의 작업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래동이 재개발이 되더라도) 어쩌면 끝까지 남아있을 오브제로, 근대 초기에 파리의 댄디(dandy)들이 느리게 거리를 산책하며 어떠한 속도에도 휩쓸리지 않는 사물들을 주워냈듯, 문래의 골동품들을 수집해냈다.
이처럼 세 사람이 촬영해낸 문래동 사진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가 사진이라는 명사보다 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무엇을 찍었는가에 대한 답을 사진의 바깥, 혹은 틀 지워진 나머지의 공간에서 찾아야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사진의 의미망을 그려내는데 사진의 바깥자리나 뒷자리를 살피는 일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그것이 사진적 리얼리즘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대개가 '리얼리즘'이라는 수상쩍은 범주 안에서 사진을 조망하려고 하지만, 동사의 수행성을 포기한 '리얼리즘'은 허약한 수식어에 불과하다. 문래동 이미지를 보며 '왜 지금 문래동인지', '동시대에 철공과 예술, 과거와 현재가 만나 공존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에 문래동이 서울의 숨구멍이 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을 문래동 안에서 대도시를 바라보며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 내 유년의 마당에는 아버지의 일터, 철공소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덩어리들이 있었다. 후에 작곡가가 된 큰오빠와 예술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나를 보고, 지금의 문래동을 다시 들여다보며 그 옛날 북유럽의 신화를 펼쳐보게 된다. 북유럽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황금의 관리자는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뜨겁게 달궈 부드러워진 금속을 두드려서 화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신화에서 대장장이는 최초의 음악가로 묘사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두드려서' 그것으로 부터 소리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대장장이와 음악과 화폐는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셈이다.(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p.114) 이러한 신화의 플롯은 영화 『호빗』과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황금을 지키려는 욕망과 황금을 빼앗기 위한 탐욕은 설전의 살풍경 후에 교활한 부의 독점으로 이어지고, 이후에도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은 결국 악순환 된다는 이야기다. 신화속의 풍경이 현재 서울의 문래동으로 옮겨 온 것일까. 문래동은 지금 예술가들의 한바탕 축제의 마당으로, 그 터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투로, 곧 이동해야할 운명들의 정거장으로 대기 발령 상태에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 참여한 세 사람의 사진가들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대기 발령인 상태, 아니 우리가 사는 동안 김충원의 저 나무처럼 대기 발령인 상태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게 되지 않을까. 이 사진들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 최연하
Vol.20131208c | 대기발령상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