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Animism展   2013_1206 ▶ 2014_0302 / 월요일 휴관

Candida Höfer_Ethnologisches Museum Berlin III_2003 Courtesy die Künstlerin, ⓒ Candida Höfer, Köln, VG Bild-Kunst, Bonn

초대일시 / 2013_1205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애덤 아비카이넨 Adam Avikainen_알 클라 Al Clah 알랭 레네 Alain Resnais_아나 맨디에타 Ana Mandieta 안젤라 멜리토풀로스 Angela Melitopoulos 안젤라 리치 루치 Angela Ricci Lucchi 칸디다 회퍼 Candida Hoefer_길초실 Chosil Kil 크리스 마커 Chris Marker_다리아 마틴 Daria Martin 디엑 슈미트 Dierk Schmidt_구동희 Donghee Koo 이동엽 Dongyeop Lee_에르하르트 슈트펠츠 Erhard Schüttpelz 에흘러 보스 Ehler Voss_에릭 슈타인브레허 Erik Steinbrecher 한스 리히터 Hans Richter_하룬 파로키 Harun Farocki 하인츠 쇼트 Heinz Schott_임흥순 Heungsoon Im 박호상 Hosang Park_자크라왈 닐탐롱 Jakrawal Nilthamrong 장 펭레베 Jean Painlevé_지미 더햄 Jimmie Durham 요아킴 쾨스터 Joachim Koester_켄 제이콥스 Ken Jacobs 렌 라이 Len Lye_레온 페라리 León Ferrari 마르셀 브로타에스 Marcel Broodthaers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Maurizio Lazzarato 나타샤 사드르 하기기안 Natascha Sadr Haghighian 오토봉 낭가 Otobong Nkanga_박찬경 Park Chan-kyong 파울로 타바레스 Paulo Tavares_김상돈 Sangdon Kim 김수기 Suki Kim_수잔 슈플리 Susan Schüppli 톰 홀러트 Tom Holert_빈센트 모니켄담 Vincent Monnikendam 월트 디즈니 Walt Disney_쿠사마 야요이 Yayoi Kusama 여반트 기니키안 Yervant Gianikian

후원 / 예술경영지원센터_주한독일문화원_주한독일대사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 / 안젤름 프랑케 Anselm Franke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시각예술분과 수석 큐레이터) 협업 / 김현진(일민미술관 학예실장)

아티스트 토크 / 2013_1205_목요일_03:00pm_2층 전시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금요일_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일민미술관 ILMIN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Tel. +82.2.2020.2050 www.ilmin.org

"동물도 영혼에 대한 권리가 있을까? 영혼은 설계될 수 있는 것일까? 중요한 일이 있을때면 항상 기도나 점보기가 성행하는 우리 삶에서 과연 진정한 근대성이 완성된 적이 있을까?" ● 모든 물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인 "애니미즘"을 다루는 이번 전시는 이처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전적 질문을 던지며, 애니미즘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미학적, 지적 논의와 예술 작품을 소개한다. 이 전시는 그동안 현대적 삶과는 거리가 먼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부정적 대상으로까지 여겨져 온 애니미즘에 대한 인식이 결국 서양식 근대화와 식민지 지배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히고, 애니미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도모하고자 한다. ● 이번 전시에는 36명(팀)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한다. 독일 유형학적 사진의 기틀을 만든 여류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Candida Hoefer는 실험실과 박물관을 다룬 사진 연작을 선보이며, 실험영화의 선구자로 시각 문화에 한 획을 그은 렌 라이Len Lye는 20세기 초반의 실험적 영상을 소개한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독일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최신작인「Parallel」(2012)은 컴퓨터로 만들어낸 자연 풍경으로 생명과 자연, 가상의 경계를 언급하며,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알려진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춤추는 해골을 소재로 직접 연출한 1929년 작업「The Skeleton Dance」또한 한국 관객에게 최초로 선보인다. ● 또한 『애니미즘』展은 순회전이지만 한국 전시에 맞추어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와 김현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이 협업와 연구를 통해 한국 작가들의 작업과 한국의 자료 아카이브를 추가하여 선보인다. 근대화 이후 토착 무속 신앙의 급격한 성쇠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박찬경의 사진작업을 비롯, 시각예술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인 임흥순의「비념」(2012), 미디어시티서울2012에 소개되었던 구동희의 영상작업「Under the vein」(2012), 한국적 풍경의 배면에 내재한 원초적인 야성과 토착성을 보여주는 김상돈의「Mirror」(2009), 그리고 무당의 숨을 불어넣은 유리병 작업을 통해 예술과 주술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하는 길초실의「Breath Taking」(2012), 일민 시각문화총서『격물치지』에 소개된 바 있는 박호상의 사진작업, 일민 시각문화총서『See, Show and the Windows』에 소개되었던 이동엽의 사진작업 등, 한국작가들의 작업이 소개될 예정이며, 인문학박물관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시작자료 아카이브에서 수집한 다양한 시각자료 또한 전시될 예정이다. ● 이 전시는 단순히 애니미즘에 대한 백과사전식 수집전시가 아닌, 애니미즘을 둘러싼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담론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임흥순의「비념」이나, 안젤라 멜리토풀로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Life of Particles」의 경우, 각각 제주도와 오키나와라는 섬을 배경으로 한 영상작업으로, 토착문화가 강력한 지역에서의 애니미즘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저항성을 보여주는 정치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박찬경의「산신」은 급속한 근대화와 더불어 일어났던 우리나라 토속 문화의 쇠락을 고발하고, 문화연구자 김수기는 우리나라 근대 시각문화에서 엿볼 수 있는 애니미즘의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 일민미술관

Disney_Silly Symphonies, The Skeleton Dance_1929 copyright Disney Enterprises, Inc.

애니미즘: 전시와 그 개념들 ANIMISM: THE EXHIBITION AND ITS CONCEPTS ● 『애니미즘』 전시는 예술이나 만화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애니메이션animation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술에서 애니메이션은 특히 멈춰있는 어떤 것에 움직임을 가해서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로 흔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조각이나 특정 회화와 같은 미술 작품들이 관객의 시선을 되살아나게 하는 효과 또한 존재한다. ● 그러나 미술의 여러 기법 중 하나로 인식되는 애니메이션은 기법에만 국한되지 않는 역사적 논쟁의 주제이다. 살아 있다고 인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술이라는 범위 밖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질문 자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더 나아간 구별짓기를 요구하는 또 다른 질문들을 예외 없이 불러일으킬 것이다. 단지 움직임을 가하는 것은 개별적인 생명과 동등한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이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어디 있는가? 영혼이나 생명, 움직이는 힘을 가진 것은 무엇인가? 생물인 것과 생물이 아닌 것 사이의, 혹은 순수한 주체와 단순한 객체 사이의 경계는 결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는 각기 다른 문화에서 이 경계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인식되고 상상된다는 단순한 사실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구분이라는 것에 대한 궁극적으로 "객관적인" 규정이란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경계선은 "순전하게" 주관적인 문제도 아니다. 결국, 이 경계선이 자연과 인간의 물질적 관계에 중요한 만큼, 특정 사회에 있는 유생물들의 사회정치적 상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경계선 자체를 조직적인 지식 시스템 및 실천들과 더불어 검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애니미즘』 기획은 가상의 구분이 증후적으로 문화를 반영한다는 전제, 그리고 재현, 미학적 과정, 미디어 이미지는 이러한 경계선을 구축하고, 반영하고 가로지른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 전시는 어떻게 이러한 경계가 미학적 주관화와 객관화 과정에 반영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며, 이러한 미학적 과정들을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견고한 사회정치적 맥락에 놓고자 한다. ● 근대 서구적 관점(이 관점의 이원론적 개념은 주체와 객체라는 범주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반(反)원형antitype이 애니미즘에서 발견된다. 애니미즘은 자연과 문화의 구분이 거의 없는 사고방식, 그리고 물체, 자연, 또는 전 우주가 살아 있고 유사 주체화된 것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에 해당된다. 근대적 세계관은 19세기 말, 식민주의와 과학의 발전이라는 믿음의 정점에서 전근대적인 타자의 이미지로부터 자기 확신을 찾고자 했다. 애니미즘은 타자라는 개념의 현현(顯現)이 되었다. 애니미즘은 "탈신비화되고disenchanted" 객관화, 구체화된 근대성의 세계에 대한 반(反)원형이다. 근대적 관점에서 애니미즘은 앞에서 언급한 경계들이 잘못 이해되거나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그 경계를 탈피한 마술적 변형의 세계를 대표한다. 애니미즘의 문화가 상당히 실제적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세계 인구의 40% 정도가 소위 "애니미즘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를 서구 근대성의 역사에서 설명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근대 지식과 그 과학적인 원칙들을 담보하고 있는 "자연"과 "문화", "주체"와 "객체"의 구성이라는 기본적인 가정에서 시작한다면, 애니미즘을 "신념"이나 "순수한 믿음"으로 규정하는 것 이상의 선택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된다면 사물들의 객관적인 현실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종국엔 "심리적인 메커니즘"으로 설명해버리게 된다. 근대적 지식으로 봤을 때 애니미스트는 "객관적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로서 내적 심리적 현실과 외부 세계의 사실을 "잘못" 혼동한 이들이다. 그리고 애니미스트 문화가 기술을 수단 삼아 환경을 정복하는 것을 등한시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근대의 발언들 덕에 이러한 시각이 더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애니미즘을 바라보는 근대적 시각은 철저히 투사에 불과하다. 애니미스트가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현실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 기반을 둔 의심할 여지없는 가정 -예를 들어 "바깥의" 세상은 오로지 물질적 법칙을 따르는 중립적이고 무생물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 렌즈를 통해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 애니미즘을 전시의 주제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 개념이 서구 근대성이라는 개념의 실제적인 제약이 되는 동시에, 근대 지성계의 과학 원리 분야에서 지식의 인식과 질서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근대적 현실 원칙에 대한 도발이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의 관습들은 기껏해야 "문화"라는 범주 아래에서 인식되었고, 그것도 우주와 세계의 실제적인 특질에 발언하고자 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결론적으로 『애니미즘』은 애니미즘에 대한 문화 인류적인 유물들을 진열장에 담아 전시하면서 타 문화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류의 전시가 아니다. 애니미즘을 전근대적인 타자로 보고 단순히 생명이 없는 물체에 영혼을 부여하는 의미로 잘못 믿고 있는 서구적/근대적 사고는 사실 그 자체로 이 근대성의 근본적인 가정들을 증후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반해 이 전시의 의도는 서구 근대성의 뿌리에 자리 잡은 근본적인 가정들을 비출 수 있는 거울로서 애니미즘 내의 용어와 개념을 살펴보고, 이것이 경계, 그리고 경계를 만들어내는 방식, 기술, 신화들의 산물임을 인식하고자 한다. 『애니미즘』 기획은 애니미즘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와 그 표현에 대한 근대적 상상들을 반성하고, 또 그에 대한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Marcel Broodthaers_Caricatures-Grandville_슬라이드 프로젝션, 슬라이드 80개_1968

배경 BACKGROUND ● "애니미즘"이란 말은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B. 타일러Edward B. Tylor (1832-1917)가 처음 소개했는데, 그는 이 용어를 17세기 베를린의 중요한 과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최초의 생기론(生氣論)자인 게오르크 슈탈Georg Ernst Stahl의 글에서 인용했다. 타일러에게 애니미즘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종교적 정의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의 시초가 무생물적인 존재에 생명, 영혼, 정신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 타일러의 이론에 따르면 문명은 애니미즘에서 시작해 다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그리고 과학이라는 가장 높은 단계로 발전했으며, 이로서 자연의 단계에서 현대적 기술 문명 단계로 올라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폴리네시아 등의 원주민들은 이러한 진화적 과정에서 도태되어 "자연의 수준"에서 "원시적인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일러의 애니미즘 개념에는 여러 전사(前史)들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애니미즘 개념은 자연과 영혼의 형성을 두고 세기에 걸친 이론적 논쟁을 낳았다. 기독교의 확장이라는 배경 하에, 그리고 1492년 이후 유럽의 식민지배 확장 이래 타일러의 애니미즘 개념은 "조각상 숭배"나 "우상 숭배", 흑마술에 대한 기독교적인 거부로 계승되었다. ● 또 다른 선례는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분리, 몸과 마음의 우선과 차선을 논한 데카르트나 계몽주의, 과학적 실증주의 철학자들과 같은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의 사상에서, 그리고 "탈신비화한 세상"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에서도 발견된다. 20세기 동안 테일러의 애니미즘은 지나치게 진화론적인 관점 탓에 오래 동안 문화기술 관련 학계에서 배척되었고 최근에 들어서야 이 개념의 근본적 중요성이 다시금 제기되었다. ●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이 개념 –특히 타일러적인 개념에 직접적으로 기대는- 이 "투사" 이론의 맥락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일러에게 애니미즘이라는 용어가 물질(사물들, 물건들, 자연)과 사람(영혼, 주체, 개인들) 사이의, 그리고 근대적인 현재와 고대의 과거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확립하는 수단이었다면, 프로이트에게는 내적 자기와 외적 세계 사이의 "적절한" 경계를 결정하는 수단이었다. ● 프로이트는 애니미즘을 "주체가 자신의 정신적 과정에 가지는 자기애적 과대평가", 즉 "사고의 전능성omnipotence of thought", 또는 현실의 "냉혹한 법칙inexorable laws"을 견뎌내고자 하는 "제한 받지 않는 나르시시즘unrestricted narcissism"에 대한 믿음이라고 표명했다.

Jimmie Durham_The Dangers of Petrification_ 돌, 칼 2개, 세라믹 접시 5개, 나무도마 3개, 손으로 쓴 종이_100×200×75cm_1998~2007

대상화 OBJECTIFICATION ●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나비는 영혼과 변형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비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분류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핀에 고정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애니미즘을 전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엄정한 의미에선 불가능하다. "객체"가 특정한 운용 방식 내의 원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순간, 특정한 형태의 살아움직임animation을 잃고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데, 이는 우선은 대상화와 보존, 따라서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는de-animated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객체는 운용 방식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는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서도 떨어져 나오고 결과적으로 모든 형식의 변화로부터 배제된다. 그러므로 전시라는 매체는 그 자체가 근대성에서 초래된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제도적 기제의 일부인 셈이다.『애니미즘』기획은 전시라는 매체가 애니미즘에 갖고 있는 역설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전시한다. 이 관계는 꽤 역설적인데 특히 박물관의 전시물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animistic 사실 때문이다. 이것들은 특정한 역사기록학historiography이나, 지식 체계, 또는 미라와 공같은 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두려운 상상을 하는 관람객의 환상을 소생animate시킨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하게 물화된 세계를 바라보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근대성 MODERNITY ● 근대성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과학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의 범주적 분리를 언급한다.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16세기 이후의 근대화를 가리켜 이 두 범주의 점진적인 "정제 공정purification process"이라 묘사했다. 과학적 대상화는 오로지 인간에 의한 "투사projections"의 공장에서 사물들을 다시 보는 능력과, 그와 상응하여 주체를 자연과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상호의존으로부터 떼어내는 능력을 과시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이 "자연적 단계"와 결별하여 인본주의적 "자율적 주체"가 되고 사회적 계약을 가지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해진다. 라투르는 또한 근대성이 비-근대 사회들과 단절하는 "대분수령Great Divide"으로 이해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데카르트적인 범주 구분을 서술한다. ● 비근대적 사회들은 근대성이 완전히 단절한, 그리고 여전히 "근대적"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를 통해 단절하고 있는 낡고 전통주의적인 과거의 편에 서 있다. 근대성은 기호나 상징화, 혹은 여기에 투영된 의미로 사물을 분리하는데 반해 전근대 시기는(애니미즘의 시기) 여지없이 이 둘을 섞어 버린다. 이러한 혼합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통합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서구 예술사에서 예술을 원시주의적Primitivism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의 기원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성 분석에 있어서 라투르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범주적 구분이 –기술의 형식에서- 이전에는 상상 못할 수준으로 자연과 문화의 혼합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모든 실천praxis은 이러한 개념적인 구분을 반박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생산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겪는 환경적 위기와 같은 전지구적 수준의 문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충돌마저도 결국 한계를 맞았다. 이 전시에서 애니미즘적 상상력animated imagination이 언제나 어떤 경계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과 자료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애니메이션animation, 즉 멈춰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사건은 지식과 대상화의 견고한 질서가 느슨해지고 경계를 넘나드는 곳에서 시작된다. 동시에 경계의 다른 쪽에서는 놀라운 변이, 괴물 같은 것들, 공포가 시작된다. 이러한 작품들의 살아움직임animation은 지도가 그러하듯 "대분수령"의 상상적 요소들을 징후 적으로 보여주고, 조사하고, 그 경계들을 넘나들 것이다. 증후들과 미디어 SYMTOMS & MEDIA ● 애니미즘은, 근대성이 범주적으로 배제하고 삭제하려 했지만 지속적인 징후의 형태로, 또한 현대 사회의 핵심에서 재-등장한다. 점진적인 "정제purification"와 대상화 과정을 거부하는 모든 것은 징후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고, 이런 징후들은 이상하리만치 광적인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징후들은 대개 원시적인 격세유전atavism처럼 인간 정신 내에서 고대적인 과거의 지속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영매술과 같은 역사적 현상이나 19세기 후반 유럽의 "히스테리"와 같은 각 시대의 전형적인 정신병리학적인 증후는 확실히 대상화에 대한, 그리고 "개인적 정신individual psyche"이라는 우상화된 저장소에 담긴 -늘 매개적이고, 늘 관계적인- 정신의 물신화와 폐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psychological" 반항의 표명 아닐까? 그리고 이 물신화가 실패한 곳에서, 예를 들어 생리적인 법칙에 객관적으로 의지하는 경우처럼, "보편적인 애니미즘"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맞춰 개개인으로 활동하는animated 한 우리는 어느 정도 살아-움직이는animated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늘 존재하는- 과 같은 것을 "단순한" 허구의 왕국으로 추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종종 "홀린haunted" 것으로 묘사되던, 프랑켄슈타인, 좀비 등의 무대인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의 극장"으로 시작한 초기 근대의 기술 "미디어"는 또 어떤가? 이는 모든 추방된 것들 -후에 월트 디즈니 풍의 대중문화에 의해 보완된 방식으로 유행하는- 이 귀환하는 장이 아닌가? 그리고 회복된 공동체나 자연으로의 회귀는 그러한 징후의 낭만주의적인, 그리고 원시주의적인 환상이 아닐까? ● 그런데 여기서 정확히 근대성이 배제하고 억누른 것은 무엇인가? 독일 철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에게 그것은 "모방 행위mimetic behavior"였다. 이는 "미디어"로 둘러싸인 장소 혹은 범위와 매우 근접한데, 이 안에서 우리는 만들어지는 대로 생산하고 행동하며 동일성과 차이, 유사성과 상이성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아도르노에게 미메시스mimesis는 그림이나 모방적인 모사 또는 다소 현실적인 모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좀 더 극적으로 일어나는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형태적인 교환transformational exchange을 의미한다. 이 첫 단계는 언어의 교환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서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의 매개로 작용한다. 부르조아 휴머니즘을 지닌 이성적인 백인 남성 주체는 소위 전근대적인 의식으로 예시되는 모든 미메시스적인 행위나 관계성(근본적으로 정서적인 것the affected을 포용하는)의 형태들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억압함으로써 규정된다. 근대성에 있어서 미메시스적 행위는 원시인들, 여자, 아이, 광인의 특징이 되었다. 근대성이 미메시스적 충동에 특정한 기호 아래서 적법한 "지속"을 유지할 수 있는 특정한 상황을 허용한 것은 오직 예술과 미학의 영역뿐이었다. 특히 미메시스적인 것의 억압이 관계성relationality과 기존의 대화적-상호적dialogical-reciprocal 관계들에 대한 가부장제적인 배제와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집단성의 발화임을 보여준 것은 바로 모더니티의 이중성과 근본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 작업들이었다. 이 집단성이라는 차원은 "집단정신collective spirit"이 국가 정체성이라는 환각적인 차원으로 투사되는 징후적이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판타스마고리아 CAPITALISM AND PHANTASMAGORIA ● 근대성은 자본주의, 즉 돈과 욕망에 거스르지 않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데, 자본주의는 "애니미즘의 배제"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본주의는 육체와 그 욕망을 이용하고 움직이게 하는 데 있어서 지치지 않는 자원으로서 "생명", "활기", "정신"의 활용에 훨씬 관심이 있었다. 생명의 에너지를 조절하고 배출구를 찾아주는 것은 전제 조건이었다. 생리학자 에티엔-쥘 마레Etienne-Jules Marey가 기호적 방식을 사용하여 움직임을 기록하고 기재했던 것이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 개발로 이어진 것이나, 테일러주의Taylorist 노동 효율 연구의 모델로 사용되고 나아가 근대 공장 체제로 이어진 것처럼 말이다. 20세기 초기의 유럽 문화인류학자에게 뭔가 미심쩍지만 모든 것을 통과하고, 살아 움직이고, "원시 문화"의 "마나Mana"를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 맑스주의자 게오르그 루카치George Lukács가 그의 유명한 "물화reification" 비판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허상적 객관성phantom objectivity"이라고 불렀던 것은 자본주의 세계가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조직적으로 본질적인 현실, 사회적 제 관계, 계층, 상품의 관계를 감추는 방식을 의미한다. 루카스의 분석은 칼 맑스의 유명한 "상품의 페티쉬적 특성 분석"을 모티프로 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이 대상이 되고 대상이 상품으로서 새로운 종류의 생기animation를 획득하는 전도된 세계를 드러낸다. 공장 노동의 소외와 물화 비판, 그리고 상품으로 가득 찬 판타스마고리아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조건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소비 사회의 순응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에 있어서 반복되는 주제였다. 기계적인 합리주의와 억압적 제도들 내에서 주체의 대상화를 거부하는 투쟁은 1960년대 반(反)문화에서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그 이후 자본주의 또한 변화한다. 과거에는 해방 투쟁이 본질적으로 특정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가진 어떤 주체가 온전히 인식되기를 요구하거나 혹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특성individuality을 얻는 데 있었다면, 오늘날은 규제가 없는 자본주의 네트워크 속에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내다 팔아야 할 자본으로 간주해야만 하며, 유명한 심리학의 고전에 따른다면, 결국 애니미스트가 되어야 한다.

Daria Martin_Soft Materials_영상, 16mm 필름_00:10:30_2004

영혼 설계 SOUL DESIGN ● 최근 인류학계에는 애니미즘 개념을 재설정하기 위한 연구가 있어 왔는데, 특히 "개인person", "의인화", "자아selfhood"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이 연구는 두드러진다. 인류학은 사회적 구조들, 지식 체계, 사회의 물질적 실천은 불가분의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수많은 영화들, 특히 재난영화들은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물질적 기반의 상대적인 안정성에 기대어 있는지를, 또 이 안정성이 더 이상 보장되지 못할 때 어떻게 그 이음매가 뜯어져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것에서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가 아닌 "상태stabile"에서 "사건event"으로 변하는 연속체와 더불어 사회, 주체성, 객체가 대칭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규정하는 연속체를 말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보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따라서 "살아있지 않은inanimate"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돌멩이가 다른 시간 차원에서는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모든 "객체"의 개념과 조건은 "주체"의 특정 형태에 조응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모든 유기체는 특정 환경이나 자기장의 발화와 유사한 무엇이라고 상정할 수 없을까? 그런데 이는 "영혼soul"에 대한 질문이 다르게 제기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 지난 2천여 년이 넘는 과정에서 영혼이 내부적으로 자리를 옮긴 선험적인 실체가 되어, 영혼을"소유"하거나 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는 사실을 추적해 보면 서구 근대성이 "영혼과 가지는 갈등"을 알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유지하는 한 영혼을 부여하기ensoulment라는 문제는 언제나 사물에 ("야만인", "동물" 등) 영혼을 거부하는 데 정당화의 틀을 제공하는 특정 신학적 논쟁의 궤도 내에 머물게 된다. 이 전시는 분리선과 경계들에 집중하고 있고, 이러한 분리와 경계선들을, 달리 말하면 영혼의 영역을 조사하고 생산하고 관리하곤 했던 절차를 분명히 밝히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영혼에 대한 개념을 한정하지 않는 발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을 "사건event"으로, 소유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중간적 영역에만 존재하는 무엇으로 상상한다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애니미즘이라는 문제를 달리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애니미즘을 무엇이 영혼을 소유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음being animated과 살아-움직이게-하기animation의 다양한 형태라는 문제로, 소통이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영혼"이 그러한 사건들의 매개라면? 결국 우리 개개인은 살아 있는 대화와 살아 있지 않은 대화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를 발화하거나 그것을 객관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차이를 "전시하는 것"은 농담이나 캐리커쳐의 형태에서나 가능하다. 자연/정치 NATURE/POLITICS ● 애니미즘의 정치적인 측면들은 이미 논의되었던 물화와 소외에 대한 맑시즘 비판을 넘어서 주로 정신 병리학, 식민주의 비판, 환경 정치,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원주민 정치 운동의 맥락 내에서 우선적으로 발견된다.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애니미즘의 정치적 수평선horizon은 사회적 경계의 탈자연화와 정치화에 있다. 정당한 "주체"의 상태를 실제로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주체의 법적인 위치와 행위의 범위에 즉각적인 결론을 가진 정치적인 문제 (굉장히 뛰어난 정치적 문제 제기는 아닐지라도) 이기 때문이다. ● 정신의학 기관과 그런 기관이 순응에 대한 요구에 따라 행하는 규범적인 병리화pathologization에 대한 비판에서, 애니미즘은 "사회적 경계들의 소멸"이라는 패러다임으로서 정치적 시각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애니미즘은 처음으로 차이를 시각화할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애니미즘은 설사 대개 내재적인 차원이긴 해도, 반정신의학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인 목표는 관계적이고 불완전한 주체성들을 발화하는 새로운 수단을 확립하기 위해 "주체성"이라는 서구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 하지만 당초에 애니미즘적이라고 묘사된 문화에서는,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묘사되는 문화에서 애니미즘은 늘 외부에서 부여된 묘사거나, 비(非)근대적 타자로서 그들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서구에서 사용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묘사된 사회들 대부분은 식민주의적 의미 부여인 그 용어를 거부한다. 그러나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토착민의 정치 운동 내에서 이 용어가 자기표현self-description으로 차용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인간 주체"에 제한되지 않는 "사회적"인 주체 개념을 빌어 자연 자체에 대한 권리들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제는 토지에 대한 권리 투쟁이나 자연 자원을 보호하는 싸움에서 이 단어가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근대적 가상의 탈-식민화 DE-COLONIZING THE MODERN IMAGINARY ● 지금껏 그래왔듯이 "애니미즘"을 어떤 이들(대개는 토착민)이 자연과 그들 각각의 공동체와 사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animate 영혼이나 정신에 대해 가지는 믿음으로 보는 대신, 이 기획은 다른 무엇보다도 유럽식 경계 생성 도구와 담론으로 애니미즘을 논하고자 한다. 제국의 중심에서 진정한 종속은 상상적 전용이나 경제 개발 시스템으로부터의 정치적 배제와 불가분이며, 이성을 가진 근대 주체의 형성은 "전근대"의 대상화, 노예화와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리고 "전근대" 이미지의 핵심에 애니미스트가 있으며, 이들은 누구보다 원시적이었으며, 유럽식 문명화가, 다시 말해 유럽 제국에서 쓰여진 역사의 진화적 서사가 발전해 나온 인류의 "최초original" 상태를 표상했다. ● 애니미즘은 유럽식 근대성과 식민지의 타자들을 가르는 명확한 경계를 확립했던 담론이었다. 근대성에서 최대한 멀리 갔을 때 있는 것이 애니미즘, 소위 "자연 속의 사람들people of nature"이었다. 동양의 위대한 문명들은 근대화 직전의 발전 단계에 어느 정도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애니미즘과 근대성 사이에서 유럽인들은 "대분수령great divide"을 이루는 차이를 인지했고, 이 분수령의 양 측면은 인간성의 전체 스펙트럼이었다. 이 분수령의 한 쪽에서는 인간은 자연 그 자체, 혹은 자연의 일부에 가까웠으며 정신적, 문화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그들의 삶에는 미신이나 불합리가 자리 잡았다. 반면, 분수령의 근대적인 측면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문화를 개발했으며 이는 문자 문화,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국가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이라는 합리성으로 지지되었다. ● 하지만 19세기 후반 제국의 중심부에서 발달한 유럽식 애니미즘 담론은 구체제의 과격화를 드러냈다. 당시 제국들은 농업을 통한 정착과 도시의 권력 집중화를 통해 발달했는데, 애니미즘은 제국들이 도시나 제국 경계 밖에서 온 이들, 즉 제국의 질서 밖에 있으며 통치가 닿지 않아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곳에서 온 이들에 대해 가지는 흔한 상상이었다. 중국 왕조와 같이 이미 오래된 문화에서조차 제국 외부의 대다수 사람들을 야만인이나 원시인, "폭력적인 자연"이나 동물성animality에 더 가까워서 자신들의 고귀하고 복합적인 문화를 무시하는 이들로 취급했고, 겉으로 보기에 글쓰기 문화나 집중화된 권력 없는 부족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라는 단서가 달린 것은 이야기가 늘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부족 공동체들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국주의적인" 태도로 보이고 취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정확한"가 혹은 "객관적"인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이런 정확성은 항상 누가 비교 우위를 가지느냐의 문제였고, "야만"이 재현되는 방식이 역사상 정확성의 문제였던 적은 결코 없었으며 오히려 권력의 문제거나 무질서를 상상의 야만적인 외부에 투사하는 문제였다. 즉, 부정적인 것(무질서)이라는 관념을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긍정적인 것(질서)이 적법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바로 여기서 "재현"이라는 사안이 궁극적으로 권력의 도구가 된 다. 제국을 건설하는 것은 늘 사회 질서와 문화역사적 내러티브를 권력에 복종하도록 결합하여 세계의 재현에 독재를 구축하는 것과 관련 있었다. ● 본 전시가 애니미즘을 다시 찾은 이유는 애니미즘이 제국주의적 질서를 문제시할 수 있는 좋은 위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국주의적 질서는 광의의 개념이다. 물론 이는 매우 모더니즘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권력의 적법성을, 모든 형태의 권력을 문제시한다는 발상은 꼭 모든 종류의 권력을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고 권력을 무효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가능성을 기반으로 자유가 싹틀 수 있다. 애니미즘 프로젝트는 이런 의미에서 실로 모더니즘 프로젝트이다. 모더니티가 권력의 "신성하거나" "자연적인" 타당성을 급진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걸 의미하는 한, 그리고 해방과 계몽의 프로젝트에 묶여 있지 않는 한, 애니미즘프로젝트는 "모더니티에 반하지against modernity" 않는다. 물론 이러한 개념들이 너무 많아서 그 순수함을 잃긴 했지만 "애니미즘"에 관한 지금의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형태의 예속이 아닌 계몽에 대한 대안, 근대화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애니미즘으로의 "회귀" 또한 없을 것이다. 낭만적이거나 정신적으로 보수적인 사고방식들이 좋아하는 식이나, 사물들이 "자연 법칙"이나 우주적 조화 속에서 존재하던 과거나 "구(舊)" 질서, 또는 "황금시대golden age"에 대한 환상을 꿈꾸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노골적으로 여전히 제국적 권력을 옹호하는 이들을 위해 애니미즘의 야만성으로 "후퇴"하지도 않을 것이며, 질서-없는-자연nature-without-order이라는 야만, "야만인savage"의 야만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야만이라는 것은 늘 신화였으며 투사였기 때문이다. 무지의 야만, 권력의 야만만 있을 뿐이며 어떠한 사회도 이 야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근대 제국 권력은 야만을 키워왔으며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야만의 희생물이 된 걸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근대성이 가지는 특정한 야만의 형태나, 구조적으로 내재한 "밑면underside"이 있다. 근대성이 가지는 가공할 공포, 이성적인 질서 내에서 촉발되는 폭력의 불합리가 그것이다. 여전히 근대성과 계몽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그리고 최소한 우리가 복종과 노예화에 반대하는 사유하는 존재인 한, 우리의 임무는 어떻게 그리고 왜 근대성이라는 프로젝트가 스스로와 그 자신의 신화나 자기이미지에 그리고 그것이 촉발하는 권력에 희생양이 되는지를,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근대성이 야만성이 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만성, 즉 계몽으로서의 근대성의 실패의 기준점은 식민주의이다. 광의로서 식민주의는 내부와 외부의 권력의 국경이며, 권력과 복종의 형태로서의 식민주의는 근대의 시작부터 해방으로서의 근대의 변증법적인 운명의 상대였던 것이다. 근대성을 탈식민화하기 위해선 이 경계로, 근대적 권력이 해방을 좌절시킨 방식으로, 근대적 권력이 분리를 통해서 "근대적인 것"과 그 "외부"에 극단적인 분리선을 만들고 외부를 전용하고 이용하기 위해 스스로 힘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분할하고 분리하는 가상의 선은 가로지르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한 쪽으로의 가로지름만이 있을 뿐이다. 근대성의 탈식민화를 위해서는 오늘날 근대성의 경계라는 가상을, 근대성의 "발달advancement" 영역을, 오늘날 "그림자 전쟁shadow wars"의 경우에서처럼 "법"이 무법을 통해서 확립되는 무법의 영역을 탈식민화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러한 가상의 경계들을 탈식민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승리는 아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잘못된 의식과 신화를 기반으로 한 합의의 정당성을 문제삼고, 어떤 종류의 권력 실행을 덜 쉽게 만드는 다른 합의를 만들어 내는 시도 정도일 것이다. ■ 안젤름 프랑케

기획자_안젤름 프랑케 Anselm Franke 브뤼셀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는 베를린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큐레이터, 벨기에 안트베르펜 Extra City Kunsthal의 디렉터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베를린 세계문화의집 시각예술분과의 수석큐레이터와 베를린 국제 다큐멘터리 포럼의 공동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런던 골드스미스컬리지, 칼스루헤 울름조형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주요 기획 전시로는 마니페스타7(2008), 브뤼셀 비엔날레(2008-2009) 타이페이 비엔날레(2012) 등이 있다.『애니미즘 Animism』은 프랑케가 2010년 벨기에 앤트워프 엑스트라 시티Extra City 디렉터로 재직하던 당시 처음 시작한 전시로, 지금까지 베른, 비엔나, 베를린, 뉴욕, 중국 선전에서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전시와 컨퍼런스, 도서 출간 등으로 확장되어 온『애니미즘 Animism』은 이번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내용과 관점을 더하며, 2014년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동시대 예술 센터인 아쉬칼알완Ashkal Alwan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Vol.20131206b | 애니미즘 Animism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