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든 흔적

박영경展 / PARKYOUNGKYOUNG / 朴嶸耿 / painting   2013_1121 ▶ 2013_1211 / 월요일 휴관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08×285cm_2013

초대일시 / 2013_1127_수요일_12:00pm

겸재정선 내일의 작가상 2012 수상자展

주최 / 서울강서문화원 후원 / 서울특별시 강서구_강서구의회

관람료 / 성인(19~64세) 1,000원 / 학생(7~18세) 및 군경 500원 6세이하 64세이상_국가유공자 및 독립유공자 장애인 및 보호자 1인_다둥이 행복카드 소지자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겸재정선기념관 서울 강서구 양천로 47길 36(가양1동 243-1번지) Tel. +82.2.2659.2206~7 gjjs.or.kr

결, 비어있음의 흔적 ●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변한다. 그 변화에는 결의 쌓임도 포함된다. 소나무와 바위에도, 돌담에도, 그릇에도, 인간의 손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이 세계에도 결이 쌓인다. 결은 시간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하나의 흔적이자 만물이 서로에게 선사하는 흔적이다. 모든 존재는 지나간 후 흔적을 남긴다. 인간이 걸어가면 발자국이 남고 수레가 지나가면 바퀴 자국이 남는다. 우리의 삶 역시 흔적의 쌓임이다. 흔적은 존재했음의 표시이지만 그 흔적의 주인공이 현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 한 순간 지나간 것은 사실이고 흔적이라는 증거가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현전(現前)도 부재(不在)도 아닌 상태가 바로 흔적이다. 우리의 지나간 삶이 사라지지 않듯이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흔적들의 퇴적으로 흐릿해질 뿐이다. ●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흔적을 쌓아가는 행위, 그것이 박영경의 작업이다. 없으나 없지 않고 드러나 있으나 감추어져 있는 흔적을 표현하기 위해 박영경은 자신의 손길을 이용한다. 유성 크레용으로 형상을 그리고 문지르는 행위와 세필(細筆)을 이용한 수묵화(水墨畫)는 작가의 주된 표현 방법이다. 손길이 스친다는 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관계가 맺어짐을 의미한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손길이 많이 갈수록 자신의 흔적이 쌓이고 결이 살아난다고 믿는다. 먹을 사용할 경우, 작가는 먹물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먹물을 그릇에 담아 오랜 시간 놓아둔 후 그 침전물을 사용하는데 이 역시 먹의 흔적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작가는 결코 한 번에 형태를 그리거나 발묵(潑墨)하는 법이 없으며 가는 붓으로 점을 찍고 얇은 선을 그으며 결을 쌓아올린다. 먹은 화면 위에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자신을 잊은 채 결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형상이 드러난다. 그 형상은 작가의 시간, 기억, 손길이 존재했음을, 그리고 작가가 세상과 대면했음을 증명한다.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06×178cm_2013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84.8×137.8cm_2013

박영경의 흔적이 재현하는 형상은 비어있다. 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도자기의 형상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다. 작가는 그토록 오랜 시간 하나의 작업에 매달리면서도 명확한 형태를 보여주거나 대상을 닮게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는 순간의 경험, 즉 시간과 손길과 시선, 이 세 항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은 마치 작은 흔적만으로 완결된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카니자의 삼각형(Kanizsa Triangle)과 같다. ● 박영경이 도자기-막사발, 그릇, 달 항아리, 매병(梅甁)-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작가는 대학 시절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의 곳곳을 여행했다. 여행하는 동안 작가의 기억에 남은 단 하나는 흙과 손길과 시간이 결합된 도자기였다. 그 후 도자기는 모든 존재에 쌓이는 흔적과 결의 상징으로서 선택되었다. 박영경이 도자기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도자기의 비어있음 때문이다. 비움은 도자기-그릇-의 존재 가치이다. 도자기는 텅 빈 채로 모든 것을 품는다. 그것은 비어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소유한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그려내는 그릇의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이다.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30×168cm_2013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22×169.5cm_2013

『도덕경 道德經』(기원전 4-3세기 경)의 내용처럼 비어있음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바퀴 구멍의 비어있음에 수레의 쓰임이 있고, 그릇의 비어있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으며 방의 비어있음에 방의 쓰임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공간은 시작과 끝도 없고 그 깊이와 넓이 또한 알 수 없지만 어느 누구도 우주가 비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어있음은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잠재력을 갖는다. 비어있음에는 나눔도 없고 경계도 없어 초월적인 충만함이 가득하다. 더 나아가 비어있음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만남을 위한 공간과 여지를 남겨두는 창조의 도모(圖謀)이다. ● 박영경은 현실적으로 없음에서 있음을 찾고 비어있음을 통해 차 있음을 깨닫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고백한다. 깨달음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비어있음 만큼의 깨달음만을 얻을 수 있기에 끊임없이 비워내야 한다.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113×106cm_2013
박영경_흔적의 숨결_화선지에 수묵_28.5×38cm×2_2013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 또한 하나의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명확하게 현전하는 것이 아니며 한 번에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새로운 방식으로 그의 작품을 체험해야 한다. 또한 작업 과정이 긴 시간을 머금었듯이 감상의 과정도 시간을 머금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관람객들이 오랜 시간 머물며 스며들길 바란다. 이런 이유에서 작가는 언제나 도자기를 단독으로 그린다. 그것은 마치 전통 초상화와도 같은 형식이다. 관객은 일상의 삶에서 망각하고 있던 비어있음과 독대(獨對)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작가의 흔적 위에 우리의 흔적도 남게 된다. 또 하나의 결이 쌓이는 순간이다. ■ 이문정

Vol.20131121b | 박영경展 / PARKYOUNGKYOUNG / 朴嶸耿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