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1117_일요일_03: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제주 제주시 거로남6길 13 Tel. +82.64.755.2018 culturespaceyang.com
사물로서의 공예, 사물로서의 미술품, 그 틈새에 자리해 오늘의 예술의 의미를 되짚게 하는 작가 김신령, 그녀의 상상의 세계가 의미하는 것들 ● 공예품이 공예품으로 이름하며 자리할 수 있는 것은 공예품이 사물로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을 보고 있자면, 공예품이 사물인가 미술품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다시 말해, 미니멀리즘 계통의 자그마한 회화작품 혹은 조각품을 연상하게 만드는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를 보고 있자면, 이러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장신구들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정육면체들로 채워져 장신구, 금속공예품의 겉면을 빛내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조형적 요소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가상의 세계, 환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회화적이고 조각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데 기인한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은 회화적 공예라 이름하겠으며, 어느 면에서는 공예적 회화라 이름할 수 있겠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공예적 조각이라 부를 수 있고 조각적 공예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을 마주할 때 그녀의 작품을 공예품이라 불러야 할지 미술품으로 이해해야 할지, 늘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라 하겠다. 또한 이 사실은 작가 김신령의 작품 말고도 동시대의 미술품, 작품들을 대면하게 될 때 늘 보는 이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을 보고 사람들은 미술품 또는 미술이라 이름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품들은 미술품이라 이름하기엔 너무나도 작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술품과 사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로 가장 먼저 '크기'를 따지고 드는데, 손에 들고 다니기에 적합하고 손에 잡고 다닐 수 있기에 알맞은 '크기'의 물건들을 사람들은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곧바로 '사물'로 바라보기 마련이고, 너나 할 것 없이 그냥들 받아들이고 만다. 이런 연유로 인해 대부분의 공예품들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물로 간주되고 규정된다고 하워드 리사티는 『공예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회화, 조각, 사진, 판화 등과 같은 작품들도 모두 손으로 집어들 수 있고 잡을 수 있으며 심지어 들고 이리저리로 옮겨 다닐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 할 뿐이지, 바로 이런 점에서 회화, 조각, 사진, 판화 등의 작품들도 분명 사물이고 우리 곁에 사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장신구, 아니 사물로서 존재하는 작가 김신령의 작품들을 보고 사람들은 미술품일까 공예품일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 필요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그냥 사물 그 자체로 여기고 바라보면 그만인 게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로 존재하는 공예품을 제작하는 작가 김신령의 작품들을 남다르게 봐야 하는 점은 시각적 착시가 불러일으키는 재미, 곧 사물로서의 물적인 속성과 더불어 조형적 요소로서의 시각적 착시를 잠시나마 즐길 수 있는 '시간의 여유', 아니 '낭비의 시간'을 그녀의 사물들, 아니 작품들이 늘 제공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바타이유의 '낭비의 예술론'과 호이징가의 '놀이하는 인간'을 이러쿵저러쿵 하고 구차하게 늘어놓지 않고서도,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이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적으로 보이고 평면 위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공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브로치들, 입체가 평면이 되기도 하고 평면이 입체가 되기도 하면서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환영의 공간이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반지들, 그리고 서로 엇비슷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각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브로치들. 이처럼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은 비록 작은 크기의 사물들이긴 하지만, 이것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넌지시 들여다보면, 잠시나마 유희적 재미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서 작가 김신령의 장신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지각과 사유의 시간을 요청하며,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가 제작한 사물들은 분명 미술품이라 하겠다. ● 이처럼 그녀의 장신구들은 집어 들어 몸에 착용하고 부착하고 손가락에 꽂아보며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각적 착시의 재미와 상상의 시간에 빠져들게 한다. 작은 장신구 속에 촘촘히 각인된 2.5차원의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강렬하게 내뿜는 시각적 환영의 세계, 바로 여기에 작가 김신령의 분신이라 할 장신구들의 매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의 '유희적 성격', 바로 이 점이 그녀의 장신구들을 단순한 사물이기에 앞서 특별한 사물 혹은 의미 있는 사물, 더 나아가서는 재미있는 '작품'으로 이름하고 자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신구가 아니라 내가 보고 즐기는 장신구를 만든다는 작가 김신령. 그리고 아무 것도 지시하고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그녀의 장신구들. 하지만 그녀의 작품, 아니 사물들을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열심히 손을 놀려가며, 눈을 놀려가며 작가가 만들어놓은 공간 속에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상상의 세계, 상상의 이야기를 말없이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사물 위에 혹은 사물 속에 작가가 은닉하고 숨겨놓은 작가의 말-세계를 발견해 그녀와 함께 '유희의 시간'을 즐기고자 한다. 작가 김신령이 만들어 놓은 혼자만의 세계에 개입하고 빠져들어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사유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는지? 아니 사람들은 알고 있는지? 자신의 작품이 공예품으로 불러지건 미술품으로 불러지건, 상관없다고 말하는 작가 김신령. 그녀의 장신구들 속에 촘촘히 각인된 환영의 세계,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녀와 숨바꼭질 놀이를 즐기며 그들만의 공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예품은 당연히 미술품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공예품은 공예품다울 때 비로소 공예품이라 불러질 수 있다며 공예품이 영원히 공예품으로 존재하고 자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미술이 개별 장르의 순수성을 고집하며 미술로 존재하기를 종언하고, 또 미술이 고전적인 장르 개념과 틀을 명확하게 규정하던 근대적 사유방식에서 벗어나 미술의 히어라키를 해체하며 각기 다른 장르의 속성과 영역을 서로 받아들이고 넘나들며 탈미술화, 탈장르화를 지향하고 모색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공예품이 공예품으로 이름하고 공예품이 미술품으로 자리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작가 김신령은 장신구를 매개로 미술과 공예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둘 사이의 틈새를 헤집으며 미술과 공예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분쇄시키려 하는 듯한 작업들을 시도하며, 우리에게 공예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런 점에서 분명 작가 김신령은 동시대 작가/아티스트라 이름 하겠다. 이런 작업들을 전개하고 있는 작가 김신령이 이번 전시에서는 '나전'이라는 또 다른 재료로 제작한 사물,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다. 나전들로 제작된 사물들, 아니 금속공예품들이 제공하는 시각적 착시와 가상의 공간 속에서 즐기는 동시대 미술/예술의 재미는 어떤 것일지? 무척 기대가 된다. ■ 엄광현
Vol.20131117k | 김신령展 / KIMSHINLYOUNG / 金信姈 / cr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