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1109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예송미술관 서울 송파구 백제고분로 242(삼전동 62-2번지) 송파구민회관 1층 Tel. +82.2.2147.2800 culture.songpa.go.kr
달콤하고도 삭막한 도시 ● 탁 트인 도회 풍경에 형형색색의 롤리 스틱 사탕이나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있는 Tiffany Lee(이승연)의 그림들은 동화 책 속에나 있는 예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도시는 회색이나 검은색 실루엣일 뿐이고 인적은 없으며, 그것이 세워진 대지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이다. 유토피아의 외양을 띈 이 디스토피아는『그나마 유토피아』라는 유예된 전시부제를 가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이 많지만, 그래도 그나마 인류가 선택한 최선의 체제라는 판단이 반영된 제목일까? 지구상에 순수한 사회주의 국가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 아니 근현대사를 통해 그 이상주의는 결코 완전한 의미로 실현된 적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전 지구를 점령하다시피한 우세종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논리를 적용시켜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 자본주의는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저항을 낳고 있지만, 보편의 지위를 차지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Tiffany Lee의 작품들은 이 보편적 현실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지만, 어떤 정치적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그림들은 유토피아로도 디스토피아로도 읽을 수 있는 양가성--하기야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돈의 유무에 따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갈리는 지극히 단순한 현실에 기반한다--을 가진다. 예술의 역할이 원래 그러하듯, 작가는 당연해 보이는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서, 또는 현실에 잠재된 균열을 확대함으로서 절대적 진리처럼 군림하는 현실을 상대화한다. 대도시의 광고탑처럼 서있는 막대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은 그러한 소격의 장치이다. 물신적 생기로 반짝거리며 서 있는 그것들은 물질적 욕망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도시풍경과 결합된 이 거대한 것들은 음식물이지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며, 그 끝없는 달콤함이 추동하는 충족이란 모르는 욕망의 체제를 대변한다. ● 둥글게 말려들어간 거대한 사탕은 마치 지구의 영원한 에너지원인 태양, 또는 풍차나 발전소처럼 도시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듯이 보인다. 둥근 형태는 그것이 바퀴처럼 끝없이 돌아갈 것을 예시한다. 생산과 소비를 멈추지 않고 가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본주의적 현실에는 뭔가 묵시록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일상에서 그리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끊이지 않는 재앙들에서 확인된다. 전시는「롤리 팝」시리즈,「소프트 아이스크림」시리즈,「그나마 유토피아」시리즈로 나뉘며, 현대도시의 우울과 고독을 비판적으로 다룬 이전 작품「고독」시리즈 (2009-2011년)도 포함된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그나마 유토피아 4」는 사막 지역에 공장을 보여주는데,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왔던 생산의 논리를 대변하는 공장은 온 주변을 사막화한다.
작품「롤리 팝 프로젝트 5」에서는 사막 저 멀리에 도시 실루엣이 있고 그 사이들로 막대사탕들이 꽂혀있다. 야자수처럼 꽂혀있는 막대사탕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유토피아의 기호일까? 감미로운 노을을 배경으로 풀 한 포기 없는 대지 위에 짐승 해골이 사탕을 물고 있는 작품「롤리 팝 프로젝트 3」는 전멸 이후까지 따라붙는 그 줄기찬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다. 풍경과 결합된 거대한 아이스크림 역시 막대사탕과 비슷한 기호이지만, 더 빨리 닳아 없어질 것이다. 핑크 빛 바탕 위에 그려진「소프트 아이스크림 프로젝트 3」처럼, 과자 용기에 담겨진 부드러운 질료는 막대 사탕에 비해 여성적이다. 물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면 흥행을 보장할 수 없는 상업의 구조상, 아이스크림과 막대사탕에서 여성과 남성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거대한 심장에 꽂힌 막대사탕을 표현한 그림이나 입체 작품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도상들은 모든 것을 '열정에서 이해관계로 변형시킨 자본주의'(앨버트 허쉬먼)를 상징하는 듯하다. ● 물신이 그러하듯, 이 먹을거리 또한 자연스럽지 않으며 중독성을 가진다. 작가에게 아이스크림과 사탕은 부모에게 용돈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샀던 상품이다. 소비는 이전과는 다른 생활 스타일을 낳으며 이는 평생 지속된다. 작품「소프트 아이스크림 프로젝트 4」는 도시 실루엣이 이루는 지평선 위에 아이스크림이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그것은 작품「롤리 팝 프로젝트 4」에서 검은 실루엣으로만 표현된 도시 옆의 거대한 사탕과 같은 맥락이다. 사탕이 곁들였든 아이스크림이 곁들였든, 도시 풍경의 배경에 멋진 관광지나 휴양지의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은 공통된다. 때로 지면은 흐르는 물로 처리되어 있어, 도시는 물과 하늘이라는 무한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이다. 작품「소프트아이스크림 프로젝트 1」에서는 푸른 강과 노을 진 하늘 사이에 야경이 있고 그 뒤로 아이스크림이 하늘을 향하는데, 그것은 마치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삼나무 같이 휘돌면서 지상적인 한계를 극복하려는 듯 나선형으로 상승중이다. ● 한계를 모르는 성장의 이미지와 한입에 녹아 없어질 일시성이 역설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Tiffany Lee의 작품에 나타나는 국적 불명의 이국적 이미지는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고, 외국에서 태어난 작가의 이력, 그리고 호수 위에 떠 있는 마술의 섬과 초고층 아파트 숲—공사가 끊이지 않는 재개발 국가의 집단적 이상향이기도 한—으로 이루어진 송파구의 동네 풍경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곳들은 작가에게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 속 도시처럼 희미한 그림자 같은 환영적 속성이 강하다. 그러한 도시의 멋진 하늘 배경 역시 거리를 둠으로서만 가능한 시야이다. 그것은 심미적이자 정치적인 거리감이다. 결정적으로 거기에는 사람들이 없다. 자연과 도시는 거대한 구조로 나타나고, 인간은 이 구조의 산물이므로 그려 넣어봤자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코드화, 매뉴얼화 함으로서 도구적 수단에 더욱 쉽게 다가가게 하지만, 목적 달성은 더욱 힘들어진 사회이다.
생산/소비 시스템에 조응하는 도구적 이성만이 현실이자 논리이자 합리가 된다. 목적이 무엇이든,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구조는 잘 돌아갈 수 있다. 이러한 동질적 구조를 내면화한 현대인은 해바라기처럼 어떤 중심을 계속 응시하고 갈구하지만 닿을 듯 말 듯 한 그것들은 보이는 것만큼 쉽게 가질 수 없다. 반쯤은 구조에 저당 잡힌 인간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속에서, 이런저런 소비생활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대리 충족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거대한 좀비 시스템을 완성해 나간다. 진정 살아있는 것은 이질적인 것이고 대안적이기도 하지만, 동질적인 죽음의 행렬은 예외를 두려하지 않는다. Tiffany Lee의 달콤하면서도 삭막한 풍경들은 도시가 자아내는 우울과 고독에 지친 불안한 영혼이 표현된 이전 작품에 비해 더 냉소적이다. 지상과 천상을 잇는 수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신 하는 것은 사탕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상품이다. 박스처럼 서 있는 도시 역시 마찬가지 상품이다. ● 이 모두 복제라는 방식으로 대량생산되는 것들이며, 지상 유일의 직립 동물인 인간을 대신한다. 더 나아가 화려한 일러스트적인 색감과 형태로 채워진 그림자체가 잘 포장된 허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적 방식을 따른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욕망은 허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림이라는 환영 역시 이 흐름에 가세할 수 있는 것이다. Tiffany Lee의 그림에서 거대한 사탕과 아이스크림으로 물상화(reification)되는 달콤한 것들은 사막 같은 우주를 지탱하고 가동하는 원동력이다. 제의와 축제가 살아있었던 전통사회의 상징적 교환과 달리, 현대사회에서의 소비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다. 개인들의 소외가 보상적이고 과시적인 소비를 낳곤 한다. 자유란 소비의 자유로 왜곡되며, 이 왜곡된 욕망의 충족을 위해 지루하고도 가혹한 노동이 감내된다. 돈 슬레이터는「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자유와 욕망은 전통적으로 대립된 개념들이었지만, 소비자는 자유라는 개념과 욕망의 개념을 결합한다고 지적한다. ● 생산과 소비의 단위는 개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의 개인주의가 '나는 생산한다...'를 거쳐서, '나는 소비한다...'로 변모되는 것에는 많은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자유를 추구하는 이성적인 개인이라는 근대적 이상은 그것이 출발한 종교적 초월성 보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에 따르게 되었지만, 시장만큼 불안정한 것도 없다는 점에서, 자율적 개인이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이상이자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개인'이라는 것은 '근대적 지배의 전략'(미셀 푸코)일 수 있다. 다니엘 벨은『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문화란 '개인의 완성을 달성하는 일' (매슈 아놀드)이라고 인용하면서, 현대성의 기본적인 가정은 개인이야말로 사회의 단위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16세기 이후의 서양문명에서 일관된 것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서양의 이상상은 자기를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서 자유를 달성하는 자치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고 가능한 최상의 자기를 만들어나간다. 자유방임주의가 자유분방한 개인주의와 같아진다. 시장이 그를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Tiffany Lee의 작품에서 그 자유로운 개인은 무척이나 우울하고 고독한 존재로 나타나며, 급기야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근대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사고는 낭만주의로 대변되는 예술가적 자아도 낳았지만, 부르주아적 세계관, 즉 '합리주의, 현실주의, 실용주의'(다니엘 벨)에서 전형적이다. 자연이고 전통이고 생산력을 위해서 모든 것을 깔아뭉개고 진보해왔던 생산지상주의에서 공통적 존재는 사라져 간다. 있는 것은 자기뿐이다. 현대 사회는 원자화 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쟁과 갈등의 장이 되었다. 사회를 파괴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인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절대성은 자기를 무한히 확대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상과는 달리, 오늘날 대중 개인주의가 알려주는 것은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독자적 성격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 이러한 소외의 결정적 원인은 '생산수단과의 유리'(마르크스)이다. 현대인은 소비자로서만 규정될 뿐이다. 예술 역시 소비 가능한 형태로 진화할 것을 요구받는다. 소비 가능한 예술 형태는 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마저도 오락으로 전락해간다. '그나마 유토피아'라는 자조적인 전시부제는 자본주의에서 달성되었던 생산력의 혁명과 자율적 기능을 유지했던 시장에 근거한다. 새로움이나 다양성이란 가치는 시장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번성하기 마련이다. 잘 발달한 시장은 문화의 다양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은「상업문화 예찬」에서, 자본주의는 개인이 예술 활동을 통해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부를 키워냈다고 지적한다. 예술가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고 경제 성장과 함께 성행한 직업이다. 그에 의하면 가장 은둔적인 예술가들조차 은밀하게는 자본주의의 부에 의존한다.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는 보헤미안, 아방가르드, 니힐리즘은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훌륭하다'고 대놓고 말하기 힘든 예술가나 지식인들에게, 타일러 코웬이 지적한 점은 자본주의 사회를 '그나마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일 듯싶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표피적으로 비난하기 전에, 왜 그 체제가 역사적 필연성을 획득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화폐화 된 부, 즉 자본은 실로 많은 것들을 무너뜨려왔다는 점에서 혁신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사상가들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다. 가령 마르크스는「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더 많은 대규모의 생산력을 만들어냈다...이 많은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품 안에 잠겨 있었으리라고는 이전의 어느 세기도 예감하지 못하였으리라...부르주아 계급은 생산용구를, 따라서 생산관계를, 따라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임없이 혁신해나가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그리고 그것들이 새로이 형성되어도 그것들은 모두 굳어지기 전에 낡아빠진 것이 되는 것이다...신성한 것은 모두 더럽혀진다...'라고 적고 있다.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적 삶을 경멸하곤 하지만, 그들만큼이나 부르주아 역시 기존 사회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은 과거에 소수만이 누리던 사치를 대중에게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멈추지 말아야할 생산의 바퀴는 늘 상 필요를 넘어선 소비를 향한다. Tiffany Lee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 과자는 그 상징이 될 만하다. 더 이상 자연과 척박하게 대치할 필요가 없는 인류에게 단 것은 이제 영양학상 과잉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잉 소비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진보를 이루어 왔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사치와 자본주의」에서, 검약이 아니라 사치가 자본주의를 추동해왔음을 주장하면서, 그 단적인 예로 단것의 소비를 든다. 좀바르트는 설탕과 그것으로 가능해진 코코아, 커피, 차 등의 자극적 기호품들이 유럽에서 신속하게 널리 애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대규모 식민 농장의 경영을 비롯한 세계화된 무역을 통해 가능했음을 상세히 밝힌 바 있다. Tiffany Lee의 작품에서 이러한 단맛은 감미로운 빛깔로 찬란한 하늘까지 확장된다. 다채로움과 달콤함을 반향 하는 우주는 별천지로서의 도시를 나타낸다. 작가는 이 오묘한 하늘빛을 미국의 도시에서 발견했다. ● 공해를 뿜어내는 지저분한 공장들은 3세계에 전가시킨 채, 소비와 사치가 집중된 1세계의 도시들은 그야말로 쾌락주의의 무대로 다가왔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미국의 쾌락주의를 질타하는 다니엘 벨은 '캘리포니아, 흥분의 세계'라는「타임」(1969년)지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 도시에서 쾌락과 놀이가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를 본다. 자본주의가 다양한 정치경제 체계 중에서 유래 없는 성공을 이룬 원인은, 그것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잘 부응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초기 자본주의에는 억제와 금욕이 요구되기도 하였지만, 물질주의는 모든 금기들을 풀어나갔다. 다니엘 벨은 '이전에는 금지된 충동을 만족시키는 일이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일이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면서, 현대사회는 낮에는 성실(straight)해야 하고 밤에는 즐기는 사람(swinger)이 되어야 함을 한탄한다. 나뉠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은 실은 분열된 개인인 것이다. Tiffany Lee의 작품에서 삭막한 사막 도시위에 꽂혀있는 달디 단 것들은 현대가 직면한 모순적 현실을 기념비적으로 예시한다. ■ 이선영
Vol.20131108c | 티파니 리展 / Tiffany Lee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