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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02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10:30am~08:00pm / 금~일요일_10:30am~08:30pm / 백화점 휴점일 휴관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SHINSEGAE GALLERY CENTUMCITY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495번지 신세계 센텀시티 6층 Tel. +82.51.745.1508 shinsegae.com
리처드 월하임(Richard Wollheim)이 처음 '미니멀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1965년을 기준으로) 지난 50년 동안 작품들이 예술적 내용을 최소화 해오고 있다는 일종의 역사적 기술이었다. 그것이 하나의 명백한 신조와 강령을 포함하는 이즘(ism)으로 된 것은 그 이후였다. 그리고 그 형식적 특성은 "조형언어의 절제, 비관계적 구성, 새롭고 산업적으로 가공된 재료, 공업적인 제작과정" 등으로 정리되었다.
미니멀의 이러한 비관계성, 구성과 기술의 거부, 비주관적으로 비인격적인 대형화와 산업적 속성은 구대륙의 전통적인 예술 주권에 대한 반정립과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바로 이 점에서 새로운 전후 세계질서에 부합하는 '미국적' 조형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같은 비평가가 곧바로 이 대형화된 밋밋함과 자의적 건조함에 대한 이론화 작업에 착수했다. 외부와의 관계가 일체 단절된 '형식적 엄격함'을 추구한다는 게 그 이론의 요체였다. 하지만 '본질적 특성'을 건져낸다는 명목 하에 '장르의 근본적인 조건'이 작품의 최우선하는 강령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플라톤주의의 개조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물질이 끼어드는 것에 대한 강박적 스트레스인데, 일테면 회화는 2차원성을 궁극의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하고, 조각은 3차원 공간이나 구조, 물성을 숭배해야 할 유일한 신성(神性)으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소량의 환영(幻影)이나 구성, 재현, 상징조차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씨앗으로 분류된다. 그것들이 희노애락의 심리적 감흥, 불완전한 자연이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통로가 되는 건 결코 두고 보아선 안 될 참사(慘事)로 정의된다. 그린버그적 인식의 전망 안에서 모든 것은 – 심지어 영혼조차 – 이 사뭇 공허하고 혹독한 강령에 굴복해야만 한다. 조각은 이 미학적 강령을 실행하는 도구적 기제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담론의 수신기로서의 조각을 거부해선 안 된다.
엄태정이 부쩍 자주 거론하는 '순수한 조각적 사유'는 그런 신조나 강령의 수신기로서의 조각, 플라톤주의의 어정쩡한 운반체로서의 조형에 대한 반추(反芻)와 성찰의 출처가 되는 사유다. 그린버그적 이론의 탑재물인 미국적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작가의 세계를 조망하는 데 있어, 타당한 접근을 그르치는 방해물이 되기 십상이다. 적어도 형식적 측면에서 그의 세계는 부분적으로 역사적 미니멀리즘과 유사해 보인다. 표현 대신 표현의 절제나 배제를 선호하고, 일상이나 기억 같은 주관의 영역과 거리를 유지하고, 서사나 장식 대신 물성(物性)에 천착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 그럼에도 엄태정이 말하는 '순수한 조각'의 담론은 형식보다는 사유와 조형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유의 차원에서 그것은 '사물에 대한 모든 지적 호기심'을 들어내는 것이고, 조형의 차원에서는 조각에 잔존하는 '허구성을 드러내는 일'을 의미한다. 지식 호기심, 이성적인 접근, 실증적, 과학적 판단 등을 통해 부단히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들, 비대해진 사물의 의미, 실존의 피상적인 맥락들, 일상의 번잡(煩雜)스러움으로부터 부단히 자유로워질 때에만 '진정한 조각언어'의 착상이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자유로운 예술적 진실은 허구적인 구조적 일이 조각에서 사라지고 떠날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엄태정) 하지만, 자유로운 조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조각을 떠나는 조각일 것이다. 조각을 등지는 것에 의해 새롭게 태동하는 조각, 구조나 물성이 더 이상 정신을 가두는 강령의 감옥일 수도, 시적 감성을 옭죄는 선동일 수도 없는 조각 말이다. 이 자유로운 조각에서 구조는 단지 구조일 뿐이고, 물성은 단지 물성으로만 머무른다. 구조가 신조가 되고, 물성을 강령으로 삼는 조각, 즉 조각을 넘어서는 조각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오히려 제 자리로 돌아오는 조각, 버림으로써 회복되는 조각, 그것이 '이성의 허구에 의한 조각'을 넘어 자유로운 조각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많은 시간을 회화와 드로잉에 할애해 온 것도 '허구스러운 조각적 이성'을 덜어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회화와 드로잉이 지닌 물성(物性)의 상대적 부재가 '시(詩)'로서의 조각을 더 용이하게 허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회화가 '아름다운 조각의 소리'에 집중하고,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와 조우하는 우회로를 허용할 것이다.
엄태정에게 장르적 사유란 이성의 공허한 집행이 낳은 부산물에 가까운 것이다. 회화는 펼쳐진 조각이고, 조각은 회화의 물리적 축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조각의 마티에르는 장르적 갈등 없이 회화의 피부로 호환된다. 조각의 물성은 회화적 구성으로 연장된다. 물성과 평면성, 오브제와 관념, 조각과 회화의 경계는 더 이상 자신들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 엄태정의 조각은 절제와 함축의 언어를 기반 삼아 왔다. 하지만 그 절제와 함축은 서구미술사의 역사적 미니멀리즘과 동일하게 범주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린버그식의 형식주의가 이 세계의 주석으로 차용되는 것도 부당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태정은 더 명확한 방식으로 시(詩)와 자유를 추방한 조형주의를 거부한다. 비록, 언어는 절제와 함축의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그 안에서 운동하는 것은 근원, 강령, 선언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유와 시적 개방이다. ■ 심상용
Vol.20131025h | 엄태정展 / UMTAIJUNG / 嚴泰丁 / sculpture.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