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mad who gets lost in the Labyrinth of Life

최성철展 / CHOISUNGCHUL / 崔星喆 / sculpture   2013_1025 ▶ 2013_1103 / 월요일 휴관

최성철_Neo Nomard - Can't find the way_자동차, 깡통, 옷보따리_설치_2013

초대일시 / 2013_1025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의정부 예술의전당 UIJEONGBU ARTS CENTER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2동 323번지 Tel. +82.31.828.5826 www.uac.or.kr

삶의 미로에서 실종된 노매드 A Nomad who gets lost in the labyrinth of lifeOgni pittore dipinge sè!(모든 화가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그린다!) 이 명언은 15세기 말엽 토스카나 지역에서 떠돌던 속담에서 비롯되었고, 근대 미술의 핵심적인 명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에 자신의 얼굴을 투영했던 것도 미켈란젤로가 「모세」를 위해 자신을 모델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이 명언이 공리적인 진리에 근접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예술이 예술가라는 개인(individuum)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므로 또한 예술작품이란 것이 예술가 개인의 산고의 고통에 비유할 만한 창작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 명언은 만고의 가치를 얻는다. 작가 최성철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자신을 위한 작업을 조언해 줄 때도 이 명언을 딛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다는 말은 약간만 전용하면 자신의 예술에 진실한 애정을 갖추라는 말이며, 나아가 남과 구별되는 독창적 영역을 구축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에 있어 개인주의는 작품의 DNA와 같은 것이다. 사회화되고 보편화된 일상 속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자율성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매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지금까지 최성철의 작품은 명도 높은 색과 단순한 형상이 조합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의 독특한 조각 스타일로 규정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작품에서 색은 증발하였고, 단순한 조각적 형상은 약간은 복잡한 설치의 양상으로 변했다. 변화의 차이는 급격하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작가 자신을 반추하거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다만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 관점을 이동했을 뿐이다. 여기서 그 관점의 이동이 어떤 의미론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어떤 개념들로 구성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최성철_Monophobia - Neoanthropinae is not ready for the solitud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네온_122×97cm_2013
최성철_Monophobia - Neoanthropinae brain cognizes the happiness and socialty for itself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네온_122×97cm_2013

I. 고독한 삶에 대하여. ●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듯이 삶 또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견디어 내는 힘을 가리켜 그리스의 현인들은 에로스(eros)라고 하였다. 예술가를 지탱하는 힘도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삶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의식이며 동력이다. 그러나 간혹 에로스는 그의 형제인 히프노스(hypnos, 잠)와 타나토스(tanatos, 죽음)의 농간 속에서 삶을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속에서 운명의 역학이 생겨난다고 옛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르네상스에 이르자 이 역학 속에서 멜랑콜리가 생겨난다. 인간의 4대 정서 중에 하나로 꼽히는 이것은 예술가의 전유물이 되었다. (타고난) 예술가는 이 정서로 삶을 살아간다. 혹 그가 창작을 하던 그냥 일상에 묻히던 이 감성상태는 꾸준하다. 그래서 예술가는 영원한 트릭스터이자 방랑하는 노매드다. ● 이 감성으로 예술가는 삶을 바라보고 수용하며,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창작을 위한 자극제이자, 창작행위에 힘을 보태는 비타민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반면에 멜랑콜리는 윤리적 의무로서의 긍정적 태도에 반대한다. 멜랑콜리의 눈은 세상이 비틀어져 보인다. 작은 것이 크게 보이고 큰 것은 하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예술가는 디스코텍의 소음 속에서도 외롭거나 무인도에서도 즐거울 수 있다. 그런 감성은 사회나 관습이 규정하고 제공하는 감성 매뉴얼에 대항한다.

최성철_a pot where mother's sigh is buried_스테인리스 스틸에 채색_26×23×23cm_2013
최성철_paranoiac era of Neoanthropinae_스테인리스 스틸에 채색_145×145cm_2013

II. 예술가의 삶은 미로 속에서 길을 헤매는 것이다. ● 전시될 작품 중에서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세 개의 비디오 설치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들이 복수로 구성되어 전시된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들도 쌍을 이루어 전시되는 것이 있다. 두 개 혹은 복수는 곧 작품 외적인 의미체계를 발생시킨다. 그 의미는 모순적(ambivalent)이거나 이원론(dualistic)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 두 가치들 사이에서 인생은 매 기로에서 판단을 하게 되며, 이러한 판단의 집적이 삶의 미로를 이룬다. 그러므로 삶과 그 총체적인 조합인 사회는 온통 미로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삶의 노매드이고, 또한 그 미로 속에 길을 잃은 자다. 길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일까? 특히 각성의 상태가 아닌 일상의 피로 속에서 방황은 어떤 정서를 구성하게 되는가? 작가는 세 편의 비디오 클립으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 간단해 보이는 싱글채널의 화면은 「출구 없는 서울외곽순환도로」, 「내릴 곳이 자꾸 잊혀져간다」 그리고 「도요새의 긴 한 숨소리는 홍콩의 무덥고 습한 날씨에 묻히고 말았다」를 보여준다. 제목은 곧 영상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알레고리나 암시가 아닌 직설적인 내레이션으로서 제목을 붙였다는 뜻이며, 관객은 이 제목에 가장 상응하는 영상을 관람하게 된다. 외적 설명이 필요치 않은 상태로 이 화면들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 설정된 미로 속으로 끊임없이 몰입하는 자아 혹은 타자를 보여준다. 결국 여러 의미들은 또 다시 의미의 감옥 속에 감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 두 개의 쌍을 이루는 「Monophobia」 연작은 위의 영상설치와 같은 전시 방식을 취한다. 물론 이 작품들은 네온이 첨가된 설치조각이다. 제목은 '고독공포증'으로 해석되는 정신병리학적 용어이며, 언어적 인상도 매우 차갑게 다가온다. 바탕에는 무작위적인 백색 칠이 남아 희미하게나마 작가의 행위를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작품은 차가운 네온이 안겨주는 고독감으로 포장된다. 작가는 이 연작을 두고 현대인의 사회성과 행복에 대하여 비꼰다. 아니 고독할 줄 모르는 (혹은 그것을 견딜 수도 없는) 정신 상태를 자문해 본다. 다른 한 쌍은 하얀 화분과 봉분으로 이루어진 작은 오브제이다. 한 화분에는 홍콩의 도심에서 죽어버린 도요새를 묻었고, 다른 화분에는 어머니의 한숨을 묻었다. 그러나 그렇게 화분은 그 죽음을 거름으로 다시 무언가를 피워내려는 의지를 살짝 보여준다. 여기에 설명된 작품들은 다분히 종교적인 아우라를 품고 있으며, 작품의 구성이나 전시 형식도 제의적인 모습이다.

최성철_It's the scarriest animal on earth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 거울_120×80cm_2013
최성철_Neo Nomad - forgottening gateways to get off_단채널 영상_ product by samsung ct-061s 1996_모니터 사이즈 13cm_2013

III.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말하다.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입니다」라는 표제가 붙은 작품은 자칫 관객을 우롱하는 상황을 자아낼 수도 있겠지만, 매우 자성적인 작가의 태도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작품의 프레임 속 중앙에 아주 작게 그리고 그렇게 맑지 않게 투영되는 거울의 이미지는 개별적인 관객을 대할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작품이겠지만, 그 의미도 그때마다 다르게 조율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작가는 이렇게 '자아'를 여러 맥락에서 반추하는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필자의 창작론에 있어 핵심은 예술가가 자신을 표현하는가에 있으며, 그것도 어떻게 변별력을 얻어가는 가에 있다. 이것이 곧 독창성이고 창의력이다. 비평이나 이론은 이 독창성을 의미보다는 형식에서 찾는다. 그 법칙을 따라서 말하자면 최성철 작가에게 독창성을 부여할 만한 근거는 희박해진다. 하지만 그의 독창성은 외적인 표출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켰던 동기를 찾으려고 했던 노력이나 그 자신을 다른 차원의 수사학적 구조에서 '말'하려고 취한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에두르지 않으며, 동시에 심각하다. ● 「Neo-Nomad-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전시의 메인이자 에필로그같이 느껴진다. 바닥에 넓게 깔린 빈 깡통들과 그 깡통들 사이에 발이 묶인 하얀 색 자동차 그리고 차 지붕 위에 실린 보따리들이 전시 전체의 의미를 갈무리하고 있다. 노매드가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길을 가야할 의지와 길을 잃어버린 현실이 봉착하면서 파생되는 비장한 감정이 우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가 그간 색을 사용하기 위해 열었던 수많은 페인트 깡통은 자신의 창작활동을 상징하는 매개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깡통 속 페인트 안료가 첨단의 과학과 지식이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 깡통들은 현대사회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동차는 노매드의 상징이며, 그 위에 실린 보따리 또한 노매드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노매드는 그 차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발이 묶인 자동차는 외롭다. ● 이 전시는 작가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현장이 될 것 같다. 물론 여러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전시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작가의 모놀로그는 어쩌면 무언가 보여주려는 전시의 기본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그에게 한번쯤은 철저히 이기적이 되어보라고 권했다. ■ 김정락

Vol.20131025d | 최성철展 / CHOISUNGCHUL / 崔星喆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