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이일 컬렉션

The Private Collection of Lee Yil展   2013_1004 ▶ 2013_1031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3_1004_금요일_05:00pm

심포지엄 『비평가, 이일 컬렉션』 2013_1007_월요일_05:30pm

참여작가 김강용_김창열_김홍주_박길웅_박서보 서승원_윤형근_이중섭_정상화_주태석 최명영_하인두_하종현_홍성도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_동덕정보통신(주) 기획 / 정연심_이유진_김정은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최정아 갤러리 CHOIJUNGAH GALLERY 서울 마포구 상수동 72-1번지 홍익대학교 홍문관 로비 Tel. +82.2.540.5584 www.jagallery.co.kr

『이일 앤솔로지』 : 자료화의 의미 ● I. 오늘날 우리 미술계는 항상 비평의 부재, 비평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양적, 질적 발전은 미술비평의 힘 있는 역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자본주의 물결이후, 미술은 시장에 의해 주도적으로 움직이면서 미술계에서는 비평의 힘보다는 시장의 평가, 경매에 출품된 작품들이 팔림으로써, 컬렉터들에게 인정받는 기회를 질적인 평가로 생각하는 젊은 미술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10년 후 그들은 미술시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일부 미술가들은 미술시장이 주도하는 경매에서는 판매가 된다하더라도 미술비평의 부재로 그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있다. 갤러리들은 미술가들이 비평가들에게 비평적인 피드백을 듣도록 해야 하며, 비평가들도 미술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비평적인 담론을 제안함으로써, 생산적인 관계성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일 앤솔로지』 발간은 오늘날의 미술현장에 편재해있는 비평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즉, 동·서양에서 이미 진행되어온 자료화에 대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전후 한국현대미술에서도 이러한 아카이빙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미술비평의 힘은 이일, 이경성, 이구열, 오광수 등 제 1세대 비평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비평가 중 한 사람인 이일(李逸, 1932-1997)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우리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비평가이다. 그는 한국의 현대미술 형성기에 서구의 미술론을 도입하여 우리 미술의 국제화에 기여했고, 이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 미학에 대한 고찰과 해석을 시도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자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비평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그의 비평 화두인 '환원과 확산'을 비롯해 주요 비평 개념인 '범자연주의'는 한국 현대미술 비평 담론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특히, 이일은 현대미술의 특징을 '환원과 확산'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며, 1969년 작가들과 이론가들로 구성된 AG의 창립 멤버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근 40년 동안 동시대의 다양한 미술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시대에 대한 통찰력과 예민한 분석력이 담긴 치열한 글쓰기로 전후 한국미술의 궤적을 그려내었다. 비평가 이전에 본래 시인으로 등단한 독특한 이력 때문에, 그는 절제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비평문을 쓴다는 호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타계한지 16년이 흐른 지금, 비평가 이일을 기억하는 젊은 작가들이나 비평가들, 미술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그가 출판하였던 글들도 절판된 상태이다. 한국현대미술 비평에 대한 그의 업적과 학계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술 자료 면에서 이일이 저술했던 막대한 양의 글들이 모두 수합되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제 1세대 미술 비평가들의 저작(원전)을 체계적으로 자료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비평가 이일의 앤솔로지 전집을 발간한다. 비평가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이일의 삶은 한국현대비평사의 일부가 되었고, 그러한 작업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볼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평이 동시대 현장과 함께 호흡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미술사의 일부로 평가받고 또 비평가들이 일차적으로 기록하고 관찰한 텍스트들은 '일차 자료 및 원전(primary/original sources)'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 연구는 리서치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미술 비평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방법론이 전개되길 바란다. ● II. 지금까지 이일의 비평 세계에 대한 연구는 그의 비평 개념을 중심으로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김복영은 1985년 출간한 저서 『현대미술연구』에서, 유재길은 1992년에 쓴 논문 「한국 모더니즘 미술 비평고 - 이일의 환원과 확산론을 중심으로」에서, 오광수는 1995년에 쓴 글 「70년대 한국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에서, 서성록은 1999년 논문 「한국적 자연관으로 읽어낸 모노크롬」에서 이일의 비평 세계를 분석했다. 2005년에는 채미애가 석사 논문으로 「이일 미술비평론에 있어서 환원과 확산 개념」을 발표했고, 이후 2006년 정무정의 「환원과 확산의 미학 - 이일의 미술비평」, 2007년 서성록의 「이일 선생의 전위예술론」, 2007년 서영희의 「이일 선생의 서양미술사론: 1966년~1972년 기간의 추상화론을 중심으로」, 2007년 이구열의 「미술의 무대는 파리에서 뉴욕으로?: 1964년도 베니스 비엔날레 주변에서: 이일 선생님 미발표 원고」, 2008년 박남희의 「이일 미술비평의 방법론적 언어론: 환원과 확산의 비평적 지형」등의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화 작업에서 번역서들은 제외되었다. 이일이 번역한 저서로는 『추상예술의 모험』 (미셸 라공 저, 문화교육출판사, 1964), 『새로운 예술의 탄생』 (미셸 라공 저, 정음사, 1974), 『세계 회화의 역사』 (루이 우르티크 저, 삼성문화재단 출판부, 1974), 『서양미술사』 (H.W. 잰슨 저, 미진사, 1985)가 있다. 초창기 비평가들이나 연구자들이 번역서를 통해 서구의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주요 개념들을 제시한 점은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일차적으로 이일이 남긴 한국현대미술 화단과의 관계성에 역점을 두어, 번역이 아닌 그가 쓴 글들을 일차적인 자료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본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인 『이일 앤솔로지』에는 번역서를 제외한 이일의 모든 글을 포함하였다. 시인으로 등단하였기 때문에, 비평계에 알려지지 않은 시를 발굴하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이를 성취하지 못했다. 앤솔로지는 총 5개의 장으로 나누어 연대 별로 수록하였으며, 가능한 한 그가 썼던 표현을 그대로 두었으나 외래어 표기는 현재의 표기법에 많게 약간 수정하였고, 저자가 정확한 저술 시기를 밝히지 않은 글들은 각 장의 맨 뒤에 수록하였다. 책의 말미에는 이일의 개인적 성향과 가족애 등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을 수록하였다. 저자가 비평서 등을 출판했을 시기에 한국의 미술계는 미술가들의 이미지 저작권, 소유권에 대한 법적인 쟁점이 미약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자료들을 재출판할 경우, 각 미술가들로부터 이미지 사용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하고, 디지털 이미지를 다시 받아내어야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러한 과정들을 자료화 작업과 함께하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앞으로 이 책을 바탕으로 자료화 작업이 다시 이뤄진다면 이미지도 함께 다뤄지길 바라며 이 과제는 차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대신, 일부 미술가들의 도움으로 이미지를 재수록 하였다. ● III. '이일 리서치'라고 부를 수 있는 2013년 '이일 프로젝트'는 크게 두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평론 출판 지원금을 일부 받아서 비평가 이일이 썼던 모든 저술들은 총정리하고 이를 '앤솔로지'로 묶어내는 작업을 작년 10월부터 홍대 미술비평/미술이론 박사 수료생인 김정은과 함께 진행해왔다. 앤솔로지는 이일이 썼던 국내외 미술동향에 대한 자료 및 작가론, 신문에 기고한 에세이 (번역서 제외) 등을 종합적으로 묶어내는 작업이었다. 이 앤솔로지는 올 10월 초, 이일의 비평서를 다수 출판했던 미진사를 통해 상·하 두 권으로 출간된다. 둘째, 앤솔로지 출판과 함께 비평가 이일이 소장했던 (작은 규모이지만) 친밀한 애정이 담긴 개인 컬렉션이 2013년 10월 4일부터 31일까지 최정아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어찌 보면, 비평가가 애정을 가지고 썼던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컬렉션이자, 비평가 개인의 기록물, 도서관, 아카이브이다. 이 전시는 이일 선생님의 따님인 이유진 선배와 김정은의 기획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전시 지원금을 받아 진행되었으며, 동덕정보통신(주)은 출판과 전시 지원금을 후원하였다. 이 전시는 이일 컬렉션에 포함된 김강용, 김창열, 박길웅,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 하인두, 정상화, 최명영의 작품을 비롯해, 『이일 미술비평일지』에 등장하는 김홍주, 주태석, 홍성도, 하종현의 작품도 전시된다.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이일이 아꼈던 이중섭(전칭)의 은지화도 전시에 포함된다. 그동안 컬렉터들이나 미술가들에 초점을 둔 전시는 많았지만, 비평가 개인이 '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술 작품에 대한 전시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전시는 저자의 비평세계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도큐먼트이다. ■ 정연심_김정은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책 표지_ⓒ 이노을

아버지를 그리며 ● 아버지를 생각하면, 서재에서 원고지를 앞에 두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글을 쓰다가 잠시 멈추고는 술 한 잔, 그리고 담배 한 모금을 천천히 빨아들이고 내뿜는다. 텁텁한 뿌연 연기 속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 그 옆얼굴의 실루엣과 마르고 기다란 손가락에 걸쳐있는 담배 한 개피….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담배 피우는 모습이 우리 아버지보다 더 근사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 되돌아 보건대 아버지가 가졌던 가장 훌륭하고 귀한 자산은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 집은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끊이질 않았다. 차만 마시고 가는 손님이 있는가하면, 초저녁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시작된 토론이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손님까지 다양하였는데 대개 작가와 비평가로서, 또는 비평가와 비평가로서 스승과 제자를 떠나 격의 없는 대화와 토론으로 이어지는 그런 것이었다. ● 아버지가 일찍이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사실로 볼 때, 나는 술을 벗 삼아 시를 지었다던 두보가 떠오르곤 하는데, 이성과 감성, 현실과 몽상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하며 써내려간 아버지의 글은 함축적인 시성을 담은 유려한 문체로 때로는 통렬하게 한국화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작가에 대한 작품에 대해서는 그 본질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끄집어내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 본다. ● 창조란 인내해야하는 괴롭고 혹독한 경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통찰력이란 지식만으로 얻어지지 않는 내공과 직관의 산물이라면, 아버지는 당신 핏속에 흐르는 디오니소스적인 충만함으로 이 모든 것을 녹여내는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영혼의 자유로움과 구속 없는 삶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때로는 힘겨운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기제가 됐으리라. ● 나는 종종 공부하다 말고 심심할 때면 옆방에 있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오래되어 바래진 프랑스 시집이나 소설책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명화를 모아놓은 커다란 전집을 뒤적거리곤 했는데, 세계의 미술관을 순간이동하며 순례하는 듯 내게는 그야말로 눈호사를 하는 시간들이었다. 아버지 같은 분을 아버지로 가진 나만의 특권이었다. 아버지와 파리의 세느강을 다시 한 번 거닐고 싶다…. ■ 이유진

정상화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6×75cm_1984

정상화 (1932~ ) ● 정상화는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출생했으며, 1956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67년부터 68년까지 프랑스, 69년부터 76년까지 일본, 77년부터 92년까지 다시 프랑스에서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62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58~66), 『파리 비엔날레』(1965), 『상파울로 비엔날레』(1973), 『한국 추상회화의 정신』(호암미술관, 1996),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국립현대미술관, 2000)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정상화의 회화는 자칫 표정 없는 밋밋한 그림으로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시간과 음미를 일단 거치고 나면 눈요기의 시각적 효과를 겨냥한 그림보다 비길 수 없이 깊은 숨결을 내뿜고 있는 것이 또한 그의 그림이다. 그의 회화는 네모꼴들이 빡빡하게 쌓여지고 서로 인접하면서도 그 전체가 한데 어울려 무한히 확산해 가는 은밀한 숨결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일, 「은밀한 숨결의 공간」(1980) 중에서)

서승원_동시성_캔버스에 유채_1979

서승원 (1941~ ) ● 서승원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홍익대학교 회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70년대 오리진 그룹과 AG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홍익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서울, 도쿄, LA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파리 비엔날레』(1969), 『상파울로 비엔날레』(1971),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1975, 일본 도쿄화랑), 『아시아 현대미술전』(1980, 후쿠오카 미술관), 『현대미술 초대전』(1983-1992, 국립현대미술관)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한국 현대작가전 수석상, 현대판화 그랑프리전 대상, 제1회 청년미술가상, 제5회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스스로를 개방하고 여백의 공간과 상호침투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네모꼴의 면과 바탕을 동질적인 평면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그의 회화는 보다 자유롭고 확산적인 공간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산적인 공간이 여태까지의 서승원의 작품에 지녀 왔던 모더니즘적인 '탈회화脫繪畫'의 규정적 규칙성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된 회화적 감성이 은은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일, 「기하학주의에서 확산적 공간에로」(1990) 중에서)

박서보_묘법_캔버스에 연필, 유채_37×45cm_1970년대
박서보_묘법 No.920307_한지에 혼합재료_60.7×50cm_1992

박서보 (1931~ ) ● 박서보는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했으며, 195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56년 『4인전』을 개최하면서 '반(反) 국전 선언'을 공표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에 참여하면서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으며, 1970년대부터 「묘법」 연작을 전개하여 단색화 경향을 이끌었다.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을 개최했고, 『파리비엔날레』(1963)와 『칸 국제회화전』(1969), 『베니스 비엔날레』(1988) 등 각종 국제전에 출품했다. 1962년부터 9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통령 표창, 중앙문화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국민훈장 석류장, 서울특별시문화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 '그려진 것'과 바탕 사이에 밀착된 변주, 극히 미묘한 변주가 화면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폭은 연필이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화가의 손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캔버스가 서로 화답하는 일종의 '잠재적 생성'의 마당으로 변모한다. 거기에는 기댈 것도 없고 디딤돌도 없다. […] 그것은 어떤 우주적 리듬, 자연의 어떤 근원적 흐름의 실현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이 흰 바탕의 유혹이다." (이일, 「'묘법'의 회화적 세계」(1976) 중에서)

윤형근_무제_캔버스에 유채_45×53cm_1990년대
윤형근_무제_캔버스에 유채_24×34cm_1990년대

윤형근 (1928~2007) ● 윤형근은 1928년 충청북도 미원에서 출생했고 2007년 서울에서 작고했다. 1947년부터 49년까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고 1957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에 『앙가주망』, 『한국현대작가초대전』 등에 출품했으며, 1969년도와 75년도에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1970년대에는 『앙데팡당』, 『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에 출품했으며, 1992년 영국 테이트 갤러리에서 개최된 『자연과 함께』전과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다. "윤형근의 회화 세계가 영원한 생성의 그것이라면, 그의 회화는 또한 영원한 '미완未完'의 세계요, 무한에로 열려진 채 스스로의 생성을 더불어 사는 세계이다. […] 윤형근은 그의 회화와 더불어 그것을 몸소 살며 그것을 영원의 한 순간 속에 정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를 두고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범자연주의pan-naturalism' 예술가라 할 것이다." (이일, 「윤형근론」(1990) 중에서)

김창열_무제_신문지에 혼합재료_59×40cm_1981
김창열_회귀_캔버스에 유채_73×60cm_1994

김창열 (1929~ ) ●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출생했으며, 1948년부터 5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66년부터 68년까지 뉴욕의 아트스투던츠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69년부터 프랑스에서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초창기에는 앵포르멜 경향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73년 파리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물방울 작품을 처음 선보인 이후 40여 년간 물방울 그림을 제작했다. 『파리 비엔날레』(1961), 『상파울로 비엔날레』(1965), 『살롱 드 메』(1972~76) 등 다수의 기획전과 국제전에 출품했다. "사실은 '이것은 물방울이 아니다'라는 것이 옳은 이야기인 것이다. […] 김창열의 회화에는 한정된 공간이 없다. 있는 것은 일종의 '무無=공간空間'이다. 그리고 그 위에 인광憐光을 발하며 또는 인광의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물방울 같은 이들 투명한 무기물이 정착하는 순간, 이들 물체는 그 충만된 실재감과 함께 '무=공간' 그 자체를 변질시키고 놀라우리만큼 신선한 시각 체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일, 「이것은 '물방울'이 아니다」(1983) 중에서)

하종현_접합(Conjunction) 04-72_캔버스에 유채_2004

하종현 (1935~ ) ● 하종현은 193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여 1959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 초반 앵포르멜 경향의 회화 작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AG 그룹의 협회장으로 활동하며 실험적인 오브제 작업을 했다. 1974년부터 대표작인 「접합」 연작을 시작했으며 이 「접합」 연작은 현재에까지 이어져 진행되고 있다. 한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파리 비엔날레』(1965), 『상파울루 비엔날레』(1967), 『카뉴 국제회화제』(1974), 『베니스 비엔날레』(1993) 등 다수의 국제전에 출품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하종현의 회화는 이를테면 회화와 비회화가 서로 인접하고 있는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 양자의 한계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오히려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 그것은 물질과 감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의 현시顯示이기 때문이다." (이일, 「'비非회화적' 회화에 대하여」(1984) 중에서)

하인두_캔버스에 유채

하인두 (1930~1989) ● 하인두는 1930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출생하여 1989년 작고했다.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청년 작가들의 전향적 단체였던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 활동으로 한국 추상 회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60년대 중반 기하하적 골격의 색면 추상 작업으로 이행하였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유동적인 파상선과 확산적인 기호 형상으로 불교 사상의 심의화를 한층 선명히 한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1978년부터 89년까지 한성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출품했다. "그러나 형! 형의 곧곧한 외길의 삶, 예술에 쏟은 그 순박한 열정은 우리 모두, 형의 동료나 후진들 모두의 가슴 속에 하나의 귀감으로서 두고두고 살아남을 것이오. 길지도 않은 반평생을 두고 형이 일구어 놓은 구도적求道的인 예술의 씨앗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오. 또 그러기에 못내 아쉽기만 한 형과의 작별인 것 같구려. 인두 형! 부디 안녕히 가시오." (이일, 「가신 벗에게」(1989) 중에서)

김강용_현실+장_캔버스에 혼합재료_1981

김강용 (1950~ ) ● 김강용은 195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여 1978년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1981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벽돌을 소재로 「현실+장」 연작과 「현실+상」 연작을 통해 극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작품을 제작해 왔다. 1978년 창립된 사실과 현실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1979년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했다.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사실과 현실』(1978~82), 『앙데팡당』(1978~82), 『에꼴 드 서울』(1981), 『현·상』(1986, 89), 『한국현대미술-형상』(1994) 등 다수의 기획전에 출품했다. "…이미지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제 사물의 반영이자 동시에 어떤 주어진 특정 공간 속에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실'과 그 '상'의 만남의 방식에 따라 회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의 역사를 지녀 왔으며, 김강용의 회화는 그 '현실'과 '상'에 다 같이 동등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일종의 '오브제 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색적인 회화세계를 가꾸어온 것이다." (이일, 「김강용의 '현실+상'에 대하여」(1988) 중에서)

박길웅_원초공간_캔버스에 유채_1977

박길웅 (1941~1977) ● 박길웅은 1941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하여 1977년 작고했다. 1963년 23세의 나이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서라벌 예대에 입학했다가 홍익대학교로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1969년 제18회 국전에서 전통적 정신세계와 조형문양에 대한 예술 감각을 표현한 작품 「흔적 白 F-75」로 비구상 부문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아트스투던츠리그에서 수학했다. 1977년 제11회 개인전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이 끝없는 반복과 그 미완성의 끝, 그리고 그 위에 박힌 어쩌면 상처의 문장紋章과도 같은 얼룩진 흔적들, 그 띠 하나하나가 말하자면 영원을 갈구하다 다 이루지 못한 한 예술가가 화폭에다 세운 스스로의 비석이 아니었는가. […] 그의 절필은 실상 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원초공간」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신의 비문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일, 「숙명의 「낮과 밤」을 살다」(1985) 중에서)

이중섭_아이들_은지화(전칭)_연대불명

이중섭 (1916~1956) ●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했다. 학창시절 미국 유학파 화가인 미술교사 임용련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제국미술학교와 분카가쿠엔 미술과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1945년 한국에서 결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을 전전하며 피난 생활을 하던 중 1952년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다.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필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소」, 「부부」, 「아이들」 연작 등의 한국미술의 대표작을 제작했으며 1956년 간장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타계했다.

최명영_무제_캔버스에 유채_33×24cm_1969

최명영 (1941~ ) ● 최명영은 1941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196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1974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대표작인 「평면조건」 연작은 회화가 구체적인 형태에 얽매이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수직·수평의 선과 면을 최소 단위로 하여 검은 바탕 위에 흰색 붓질을 중첩시켜 나가면서 평면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최명영은 1978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오리진 회화 협회 전』, 『파리 비엔날레』(1967),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한국 현대 드로잉』(1981, 뉴욕 부르클린 미술관), 『한국미술 100년』(2006) 등 다수의 기획전과 국제전에 출품했다. "그가 무지無地의 캔버스를 균등한 지인으로 뒤덮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캔버스라는 쉬포르의 물질적 현존성顯存性을 그 행위를 통해 '그것이 아닌' 상태로 치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의 검증에서 치환으로 옮겨가며 다시 그 치환은 세계의 잠재적 현존성으로 환원되어 가는 것이다." (이일, 「환원적 치환의 세계」(1976) 중에서)

Vol.20131019g | 비평가, 이일 컬렉션The Private Collection of Lee Yil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