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코드_空

Asia Code_ZERO展   2013_1011 ▶ 2013_1222 / 월요일 휴관

권부문_On the Clouds (Seoul-Paris)_영상, 사진 19개, LED 모니터_00:03:15_2002

초대일시 / 2013_1010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권부문_김태호_노상균_육근병_홍승희(한국) 야나기 유키노리_미야지마 타츠오_와타나베 고(일본) 팡 리쥔_가오 레이(중국)_수보드 굽타(인도) 준 응우옌-하츠시바(베트남)_수잔 빅터(싱가포르)

작가와의 대화 / 2013_1010_목요일_03:00pm_세미나실

주최,주관 / 국민체육진흥공단_소마미술관

관람료 성인, 대학생_3,000원(단체 1,500원) 청소년(13-18세)_2,000원(단체 1,000원) 어린이(12세 이하)_1,000원(단체 500원) * 단체 : 20인 이상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소마미술관 SEOUL OLYMPIC MUSEUM OF ART 서울 송파구 방이동 88-2번지 제1~4전시실 Tel. +82.2.425.1077 www.somamuseum.org

왜 아시아인가? 이 전시의 의의는 특정 지역의 지리학적 이슈에 따른 정체성의 문제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정신성과 그 시각적 힘이 집적되어 있을 때 왜 아시아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에 있다. 즉, '아시아'라는 카테고리는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화를 얘기하기 위한 화두이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서구의 도큐멘테이션式 포스트 모더니즘과 달리 동양적 사고와 철학은 혼란 상태를 관통하는 느긋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3년 전 기획되었다가 이번에 전시하게 되면서 애초 계획보다 작가 수가 늘어나 작품이 다양해졌고,「아시아 코드」를 대주제로 하여 소주제를 고민한 결과, 초대 작가들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사상의 뿌리를 공(空)으로 압축하였다. ● 왜 공(空)인가? 空이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마음으로 보여지는 어떤 것이다. 空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인 '수냐(sunya)'로, 비어 있음(void or emptiness)을 뜻하며 일체의 더러움과 그릇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空은 인도 수학의 0(零)을 의미하는 기초가 되기도 했지만, 아시아에서 空의 관념은 특히 유럽사상에서 말하는 무(無), 허무(虛無), 비존재(非存在)를 가리키는 존재론적 공허 또는 공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객체,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 의식과 대상간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경험적인 사물이나 사건이 공허하여 덧없음을 의미하나, 존재하지 않음이 '空'인 동시에 그 '空'에서 궁극적인 실재가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 허무보다 적극적 존재방식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없기 때문에 채울 수 있고 차 있기 때문에 비워낼 수 있는 앰비밸런스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본 전시에 출품한 13명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아시아 코드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로서의 카르텔이나 서구에 의해 강요된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집단화가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내재된 진정성이라는 잣대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전시는 출품 작가들의 작품 특성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는데, '시간-응시', '공간-空.間.', '파동-역사'가 그것이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만해(萬海)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정한 비움 안에 묘함이 있다", 이른 바 텅 빈 충만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 없는 무형물로 인해 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대체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본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또한 그 물음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은 현상계에서 작동하는 나(不空)와 절대계의 나(空), 그 사이에 진정한 예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 감정, 오감(五感)이 작동하는 현상계의 아바타가 우주의 신(神)과 맞닿아 있는 영역이자 '참나'를 만날 수 있는 절대계를 향하는 그 지점에 진정한 아시아 미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 박윤정

시간 - 응시 - 권부문 ● "사진가는 이미지 노동자이다. 나에게 온 이미지는 나를 빌려 오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권부문은 철저히 자신을 배제하고 자연에 의해 놓여진 그대로의 대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작품 안에는 어떠한 연출도 없으며, 단지 그가 발견하고 가져다 놓은 사각형 프레임 속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우주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작가와 함께 프레임 밖에 서 있다. 그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 그에 대한 경외심과 나에 대한 측은지심은 작품을 통해 흔치 않게 경험하는 것이다. 출품작은「On the Clouds」시리즈를 각각 20여점씩 압축한 세 가지 버전의 영상작품인데, 이 시리즈는 1985년 장거리 첫 비행 때의 '인간도 새도 아닌 경이로운 시점의 경험'이 동기가 되었다. 영상 속 하늘과 구름의 접점에서 일렁이는 대기의 흐름과 빛의 변화는 작가가 중시하는 '사진적 호흡'의 마디마디를 연결한 것과 같다. 작가가 포착한 '순간'은 그의 마음이 전하는 파장을 담고 있으며 그를 보아 내고 견뎌 내는 것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그로부터 파생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과 공간의 레이어는 곧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진폭이 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감(sympathy)'이라 할 것이다.

김태호_Land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흑경

김태호 ● '아무 일 없음이 내가 할 일.' 김태호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불경의 글귀를 종종 떠올린다. 산사에 앉았어도 분주함이 있고 저잣거리에 섰어도 고요함이 있다는 말이 상기된다. 캔버스에서 이미지를 지워내듯 겹겹이 쌓아올린 물감의 레이어는 지나간 시간 속 수 만 가지 상념들을 표현한 듯 수 만개의 색을 담고 있다. 한 가지 색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색의 조합, 그 모호함으로 사색의 여지를 건네는 그의 작업은 일견 상당히 추상적이다.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시간이지만 기억의 집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그의 화면은 있음과 없음 사이의 절묘함을 담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른바 '구체추상'(2012년 학고재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 타이틀)이라 명명될 만하다. 빛의 점멸 사이, 낮과 밤의 갈림이 시작되는 어스름한 잉크 빛 공기가 작가의 감정 기저에 늘 머물러 있다. 그의 작업을 대할 때 종종 느끼게 되는 늦은 오후의 파스텔톤 빛과 뺨을 스치는 대기의 살랑거림은 늘 조용한 움직임으로 소소한 깨달음을 주는 그의 작가적 개성과 닿아 있다. 파도 한 자락 없이 매끈한 흑경의 바다와 그 위로 부유하는 모호한 빛의 캔버스들이 만들어내는 나른한 아름다움은 마치 미니멀한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탄생된 17세기 프랑스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미야지마 타츠오_Changing Landscape / Changing Museum (idea sketch)_미러시트_2013

미야지마 타츠오 ● 미야지마 타츠오는 LED를 이용한 설치작품으로 유명하다. 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했으나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은 영원하다'는 그의 세 가지 작업 컨셉을 확고히 하면서 LED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87년 처음으로 LED 작품을 선보였고 1988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하여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21세기 최고의 일본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 늘 등장하는 1부터 9까지의 숫자들은 시간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특정한 기호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음미하며, 미래를 얘기하는 관계항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근간에는 불교적 철학이 깔려있다. 끊임없는 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의 숫자에는 0이 없다. 無에서 시작하여 다시 無로 돌아가는 인간 존재의 본성, 그 운명이 작가의 숫자에 배어있다. 비어 있음은 곧 채워짐과 상통한다고 볼 때 0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 미야지마는 미술관 건축 환경을 이용하여 숫자를 통해 외부 풍경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관객은 30여 미터 길이의 회랑을 따라 걸으면서 숫자 너머의 풍경과 미러 시트를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전처럼 관객이 움직이는 숫자를 일방적으로 보고 있는 구조가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풍경이 움직이는, 나의 시선과 움직임이 나의 경험을 지배하는 또 다른 방식의 인터렉티브 작업이다. 나의 존재는 시간의 변이 속에 있고, 변화와 영속 사이에 그의 작품이 있다.

육근병_NOTHING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3

육근병 ● 육근병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작가로서의 명성과 입지를 쌓아온 작가이다. 199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봉분 위 모니터를 통해 껌벅이는 커다란 눈으로 각인된 그의 초기 작업으로부터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언젠가부터 작가는 카메라를 메고 양평 작업실 주변 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작업실 벽에는 익숙한 그의 드로잉 작업들 옆으로 대형 사진작업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사진작업과 그 영상을 선보인 것은 지난 해 표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을 통해서였다. 작가가 역사적 다큐멘터리 영상과 눈의 깜박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맞물림을 비장한 심장의 울림과 함께 보여주었던 것에서 좀 더 주변의 그러나 더 광활한 자연으로 시야를 확장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마치 자궁 속 아기에게 들리는 듯 한 심장의 울림이 세상에 대한(against) 두려움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towards) 기대감으로 들리게 된 것 또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본 전시에 출품된 영상들은 모두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서 얻어낸 것들이다. 바람, 비, 새소리가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사각의 화이트 큐브는 한적한 숲 속 산장이 된다. 작가가 비워내고 쌓아오던 방대한 양의 시간과 개념들이 그 질량과 무게를 훌훌 떨치고 정제된 듯, 나와 자연만이 오롯이 교류하는 와유(臥遊)의 현장이다.

와타나베 고_Face, Portrait_디지털 프린트, 반투명 필름, 라이트 박스_135×123×20cm

와타나베 고 ● 와타나베는「Face-Portrait」시리즈를 통해 '인물도 아니요 사물도 아닌' 어떤 것을 만들고자 했다. 영혼과 개성을 가진 인격체를 '인물'이라 한다면 외양은 '사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한 사람의 피부 사진을 이용하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텍스쳐를 만들고 반투명 디지털 프린트 위에 전사시켜 라이트 박스 스크린에 밀착시킨다. 'face(面)'로 이루어진 'face(얼굴)', 그야말로 표면만 거두어 낸 얇디얇은 마스크처럼 보인다. 초상(portrait)이란 한 개인의 고유 특성을 담은 것인데, 한 사람의 피부만을 사용함으로서 최소한 초상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 이 얼굴에서 단 하나의 여지는 피부이다. 실제 사람의 피부를 접사시킨 얼굴, '육'(肉)을 통한 소통의 논리는 몸과 정신의 합일이라는 오랜 동양적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출품작「One Landscape_A Journey」역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쌓여 있는 식기들의 풍경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고 아주 조금씩 금이 가더니 마치 얇은 필름 막이 시간차를 두고 건조되었다가 떨어지듯 분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21분에 걸쳐서 블랙과 화이트로 이분된 배경과 그릇 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180도를 회전하면서 재복구되는 무중력 상태의 고요한 우주쇼가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암흑으로 돌아간다. 무(無)에서 생겨나고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우주 순환의 진리가 생명유지의 상징적 도구인 그릇들을 통해 지극히 은유적인 움직임으로 보여 진다. 온통 블랙으로 채워진 전시 공간 안에는 결국 화면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그것을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 뿐이다.

노상균_Constellation 8_Taurus_캔버스에 스팽글_218×218cm_2010
노상균_What Are You Looking For?_마네킹에 스팽글_52×162×58cm_2007

공간 - 空.間. - 노상균 ● 노상균 작가의 시퀸 작업은 90년대 초부터 물고기를 모티프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유학 후 귀국한 1994년부터 본격적인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평면성을 극복한 감각적 구성을 통해 키치적 재료인 시퀸을 세련된 하이 아트(High Art)로 턴-오버시켜온 작가의 여정은, 삶과 죽음의 기표로 시작된 물고기가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 빗대어 소외된 인간상으로 구체화되는 필연적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 속에서 동심원의 꼭지점은 마치 호흡하듯 오목과 볼록을 반복하며 안으로 혹은 밖으로의 연결을 시도한다. 캔버스 위에 하나의 끝과 또 다른 끝을 공존시키며 시퀸이 만들어내는 층위는 색다른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급기야는 이 세상에서 나의 손끝과 시퀸만 보였을 지난한 노동의 시간이 작가에게 수많은 사유의 혜택을 주었을 것이고 그 대상이 '감성적이며 철학적인 공간'인 우주로 확장되어 갔을 것이다. 별자리가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한다면 작가가 키운 운명의 파이(π)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 다양한 변주로 이어진다. 이렇듯, 그의 시퀸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의 일루전은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혹은 깨달아지는 나의 모습, 별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운명의 실체를 은유하고 있다. 무대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빤짝이'가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워준 원효의 일화를 뜬금없이 떠올리게 한다면, 이 또한 작가가 쌓아온 내공의 결과일 것이다.

수보드 굽타_Untitled_황동 그릇, 안료_지름 61cm×68, 가변크기_2010

수보드 굽타 ● 수보드 굽타의 설치작업은 레디 메이드 계열 오브제의 집적, 분산, 배열로 대표된다. 그의 오브제들은 대개 인도에서 흔히 사용하는 식기와 그릇류이다. 그는 스스로를 우상 도둑이라 칭하며 '힌두교도의 삶과 그들의 부엌은 기도실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다. 무심히 지나칠 법한 그릇들에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발견해내고 새로운 맥락에서 감상하도록 만드는 굽타의 작업은 일상 속 현학적 미감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부엌이라는 공간과 음식 문화는 물질성과 정신적인 것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는 소박한 일상과 성스러움의 공존을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라 했다. 본 전시의 출품작은 황동 단지 68개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세신을 위한 도구, 물을 길어 하루의 시작을 함께하는 일상의 오브제를 세심하고 계획적으로 배치함으로서 소마미술관 공간을 새롭게 각색해냈다. 같은 도구의 반복은 일상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집적과 간격을 통해 스케일을 확장시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 결과, 그 미니멀한 기하적 문양이 빚어내는 의외성은 경건함마저 주고 있다. 자신이 사는 문화와 전통은 삶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작품에서도 은연중에 베어나게 마련이나, 작품 혹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역성에 국한시켜 그 진정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니 굽타는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 있어서 성공한 셈이다.

홍승희_Der Zwang zur Tiefe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8

홍승희 ● 홍승희는 2007년부터「깊이에의 강요(Der Zwang zur Tiefe)」를 타이틀로 일관된 작업을 해왔다.「깊이에의 강요」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ung)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그림에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논평에 상처를 받아 좌절을 거듭한 끝에 결국 자살하게 되는 한 젊은 여류화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쥐스킨트의 소설에서 외연에 대한 편집적 집착을 이겨낼 힘을 기대하며 강요했던 심리적 '깊이'를 작가는 사물의 물리적 형태 일부에 주름을 만들어 중력과 시간을 해체시킴으로서 물질화시키고 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능성에 능동적인 융통성을 부여한 듯 보이나 벽 속에, 바닥에 침잠된 오브제들은 작가의 고뇌를 담아 인격화되어 있다. 일상적으로 기대되는 사물의 모습에 비현실적이며 작위적인 깊이를 부여한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정신적 깊이라는 것이 도대체 실체가 있는 것인지, 그들의 잣대에 의해 마음대로 판단되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갑갑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여기서 "깊이"란 결국 사물, 사건, 공간에 대한 응시와 자기 성찰을 통한 자생력에서 나오는 진정성이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선택된 오브제들에 감정과 기억을 투사하여 연출 되어진 어떤 공간"이 봇물 같은 수혜보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적심을 통해 어느 순간 혜안을 갖게 될 작가로서의 성장 터가 되기를 기대한다.

야나기 유키노리_Article 9_네온, 플라스틱 상자, 투명 시트에 프린트, 아크릴 액자 등_가변크기_1994

파동 - 역사 - 야나기 유키노리 ● 야나기 유키노리는 현대 일본 문화의 정치, 경제, 사회적 시스템에 반기를 든 첫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 일장기와 같이 일본을 표상하는 기호나 상징을 통해 꾸준히 '국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군국주의의 폐쇄성과 전후 일본의 역사성 결여에 대해 비판해왔다. 야나기는 섬을 예술촌으로 변모시킨 '이누지마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를 통한 전복을 주장했던 미시마 유키오를 재조명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제작된 이번 출품작은 근래에 특히나 이슈가 되고 있는「헌법 제9조」(Article 9)이다. 흔히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일본 헌법 제9조는 1947년에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골자는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헌법 제9조」작품에서 법조항 일부를 네온으로 만들고 계속해서 깜빡이게 함으로써 '있음'과 '없음'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게 만들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애초에 미국에 의해 영어로 작성되었던 법조항이 일본어로, 다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모호한 문구로 남게 되었음을 은유하고자 했다. 반공을 외친다고 극우주의자가 아니며 그 이면의 논리와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한 야나기의 비판의식은 순화된 언어표현에 의해 애초의 의도가 희석되는 현상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가치에 대한 모호함을 오역하여 '건강한 일본'이라는 캐치 프레이즈 아래 과거 군국주의 망령을 부활시키려는 현재 정권의 시도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일본정부가 전쟁을 아시아의 구원으로 미화시키기 의해 교과서에 실은 일본설화「우라시마 타로」(Urashima Taro)에 대해 야나기는 작품「금기된 상자」(1995)를 통해, 금기를 깸으로서 신성을 잃어버린 제국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한 바 있다.

팡 리쥔_2005.6.4_캔버스에 유채_129×90cm_2005

팡 리쥔 ● 붉은 얼굴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팡 리쥔은 중국현대미술을 이끄는 소위 4대 천황(팡 리쥔, 장 샤오강, 위에 민준, 왕 광이)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국현대미술은 개혁과 개방으로 인한 자본주의 물결과 여전히 억압적인 사회주의 정치 사이에서 형성되어, 그 모순을 감내하면서 생겨난 무력감으로 냉소, 허무, 풍자가 가득한 유니크한 분위기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문화혁명과 천안문광장사태를 거치면서 중국 사회는 상실감에 빠졌고 이는 곧 물질만능주의와 향락적인 대중문화로 급속하게 채워졌다. 유년기에는 문화혁명을, 청년기에는 천안문 사태를 겪었던 작가들이 중국 현대미술의 주역이 되었고, 팡 리쥔은 그 선봉에 있는 작가로, 민머리, 무표정, 하품, 비웃음 등을 담은 인물 표현을 통해 "냉소적 반항아"라 불리기도 한다. 대지주 집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격변기에 감내해야 했던 수모는 팡 리쥔에게 인생의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막막한 상황에 대한 자조적 인간형들을 짙푸른 하늘 아래 혹은 일렁이는 바다 위에 등장시켜 모순과 허무를 드러냈다. 그는 초창기의 냉소와 허무주의적 세계로부터 점차 다시 한 번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긴다. "내가 얻은 기쁨과 상처는 모두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작가는 이제 생명의 윤회, 이상향으로의 회귀를 화면에 담고 있다. 세상에 나온 첫 모습의 아기는 새로운 시작의 표상이며, 구름을 뚫고 만천하에 신세계의 탄생을 고하는 붉은 손은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의지이자 절대계로 향하는 내면의 움직임이다.

가오 레이_A102_Ed. 1/3_ 형광 라이트박스 디스플레이 케이스에 시바크롬 트랜스페어런시_30×45×30cm_2009

가오 레이 ● 중국의 주목받는 신예작가 가오 레이는 삶과 죽음, 윤회 등을 주제로 하여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회화, 설치,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한다. 그는 80년대 이후 중국의 정책에 의해 외동이로 태어난 바링허우(80后) 세대에 속한다. 바링허우 세대는 소황제, 소공주 대접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성장하여 정치적, 사상적 중압갑 대신 개인주의적, 소비지향적, 개방적, 합리적 개성이 강한 세대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 이전의 중국현대미술은 거대한 스케일, 과감한 색과 형태, 정치적인 모티브를 통한 냉소적 사실주의와 정치적 팝 경향이 대세였는데, 바링허우 세대의 예술은 보다 확장된 재료들을 사용해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로운 작업을 구사하며, 추상적이거나 몽환적인, 혹은 개인적인 사유에 의한 작업들을 서구적 영향을 결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가오 레이의 박스 작품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에 눈을 대면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벽에 난 쪽창으로 목을 빼고 있는 기린의 다리에 사각형 철창이 묶여 있고 그 안에 표범이 들어 앉아 있는가 하면, 공사 중인 방 안 수도꼭지에 꼽힌 호스가 현무암 같은 덩어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다. 이종이식이라기도 동종이식이라기도 모호한 이 상황,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어리석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삶과 죽음이 한순간 바뀔 수 있는 긴박한 상황 연출에 능한 작가의 선택은 팽팽한 긴장감을 통한 적극적 의지개입 유발이다. 작가는 권력 체계가 혹은 식민 의식이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편집하고 규정짓고 있는지, 이렇듯 은밀한 시각적 시스템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준 응우옌-하츠시바_Happy New Year : Memorial Project Vietnam II_Ed. 6/6_ 단채널 영상, 사운드, 컬러, 4:3 NTSC format, DVD, Mini DV 마스터 테이프_ 00:15:00, 가변설치_2003

준 응우옌-하츠시바 ● 준 응우옌-하츠시바는 일본 동경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베트남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매릴랜드 미술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베트남 호치민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그는 주로 베트남 난민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지속적 고민을 작품 속에 담는데, 15분짜리 영상「Happy New Year: Memorial Project Vietnam II」에서 작가는 베트남의 국가적 또는 역사적 정체성 문제를 수중 퍼포먼스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 테트 대공세(Tet Offensive, Tet는 베트남어로 음력 설날을 의미)는 설날 전후의 암묵적 휴전을 역으로 이용하여 북베트남군이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 남베트남 침공한 사건이다. 1975년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베트남 전쟁으로 나라를 등졌던 사람들이 다시 귀환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 작가는 이러한 역이민 현상을 작품의 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메콩강과 역사를 함께하는 베트남 민속과 신화는 물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7명의 다이버들이 물 속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물 위에 자신의 운명을 띄운 '보트 피플'의 위험한 여정과 그들 앞에 놓인 예측 불가능한 시간들을 은유하고 있다. 중력을 거스르는 물속에서의 힘겨운 움직임, 날숨으로 뱉어지는 구슬같이 영롱한 기포, 물결 따라 드라마틱하게 퍼지는 물감 등, 서정적이며 우아하고 매혹적인 영상 속에는 비극의 역사를 축제로 인내하는 일반인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수잔 빅터_Dusted by Rich Manoeuvre_ 수제작 투명 아크릴 샹들리에, 조각난 크리스탈 그릇, 화병, 유리잔, 붉은 색 골동 샹들리에, 전구, 펜듈럼 드라이버, 제어장치, 스테인리스 스틸 튜브, 깨진 유리_475×600×600cm_2012

수잔 빅터 ● 수잔 빅터의 출품작은 샹들리에 시리즈 중 하나로 기계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키네틱 설치작품이다. 4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였던 이 시리즈 작품은 산 마르코 광장 옆에 위치한 400년 된 성당 안에 설치되어 고풍스러운 성당의 위엄과 반짝이는 빛의 반사가 어우러져 기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함으로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한 자의 샹들리에를 표현하기 위해, 조각난 크리스탈 그릇, 화병, 유리잔 등을 수제작한 아크릴 구조물에 매달아 샹들리에 펜던트를 만들었다. 고정된 중앙 샹들리에와 리드미컬 하게 움직이는 4개의 붉은 색 골동 샹들리에로 구성된 이 작품은, 마치 부딪힐 것 같은 혼란스러움을 일으키며 보는 이를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욕망과 잠재적 폭력의 신경질적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식민정치 이후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는 '타인과 함께 하는 혹은 타인 안의 타인'(Others with/in the Others)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오고 있다. 서구에서는 부와 힘의 상징이었던 샹들리에가 아시아에서는 식민의 잔재로 남아 있다. 폐기물에서 재활용된 가난한 자의 샹들리에는 서구적 기표에 대한 현대적 반응이며 식민의 잔재에서 위태롭게 재건된 아시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장소특정적 키네틱 설치작업은 미술관 뿐 아니라 버려진 무기 공장이나 발전소에도 전시된 바 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8미터에 이르는 1층 로비 천정에 설치됨으로써 관객들이 2층에서 내려다 볼 수도 있고 1층에서 올려다 볼 수도 있어서 상당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 소마미술관

문화 이벤트 안내 무료관람의 날     Autumn in SOMA 오픈일(10월 12일), 문화의 날(10월 19일), Soma 가는 날(10월 26일) Autumn in SOMA :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1. Cinema        일시 : 10월 12일(토) / 10월 26일(토)        장소 : 소마미술관 출구 조각공원        상영영화 : 10월 12일_뉴욕의 가을 / 10월 26일_시월애     2. Concert        일시 : 10월 18일(금) / 10월 19일(토) 16:00~17:00        장소 : 소마미술관 출구 조각공원        출연진 : 10월 18일_빅터뷰 / 10월 19일_바드 백남준 야외레이저작품 "올림픽레이저워터스크린 2001"     일시 : 해당기간 매주 금, 토요일              10월(18:30~) / 11월(18:00~ ) / 일몰 시각에 따라 시작시간 조정 가능     장소 : 올림픽공원 내 몽촌해자

관람문의 : 02.425.1077 소마미술관 홈페이지 : www.somamuseum.org 블 로 그 : blog.naver.com/somamuseum 페이스북 : www.facebook.com/artshelterSOMA 트 위 터 : @somamuseum

Vol.20131011b | 아시아 코드_空 Asia Code_ZERO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