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101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05:00pm~08:00pm
예술공간 플라즈마 ARTSPACE PLASMA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26번지
빛과 그림자의 즐거운 유희 ● 인생이 무겁다 한다. 인생의 그림자는 삶을 더욱 버겁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유쾌한 놀이, 예술이다. 삼청동 플라즈마 공간에서 펼쳐진 작가 장은의의 설치작품들은 묵직하지만 버겁지 않고, 가볍지만 부드럽다. 그의 작품들은 어두움 또한 밝음 만큼 인생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속삭인다. 이번 전시는 해가 진 후에만 관람이 가능하다. 영상작업인 '드로우 어 새도우/ 드로우 어 브로큰에그/ 드로우 어 레인보우'에서 작가는 그림자와 깨진 달걀, 무지개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빛과 그림자 유희는 얇은 스크린 위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어둠이 내린 오후, 한 작가의 창조의 순간과 그 과정을 따라, 1층부터 3층까지 천천히 올라가보라.
비추고 드리우고 그리기 ● 화살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는 빛에 의한 지표로서, 빛이 대상을 비춤으로써 생기는 존재이다. 강렬한 조명이 비추는 대상은 바로 견고한 시멘트 벽면을 뚫고 들어간 화살. 그런데 생각보다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이다. 점멸하는 조명은 화살보다 벽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를 주목하게 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상은 그림자인 셈이다. 작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대상, 화살로 인한 그림자를 그를 바라보는 사랑의 주체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빛과 사랑에 의한 지표는 희생과 추억으로 버무려진 흔적이다. 벽면에 드리워진 증후는 강렬한 빛으로 다시금 덧입혀진다. 당당한 태양신 아폴론의 사냥용 화살보다 장난스런 에로스의 화살이 더 큰 이야기와 감흥을 만들 듯, 점멸하는 조명은 작은 화살에서도 강렬한 음영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깃들인 나의 모습, 사랑을 통해 두터워진 내 인생의 음영이 된다.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이 결국 사랑의 대상보다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조명이 꺼져도 여전히 늘어진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빛과 상관없이 드리워진 그림자이자 드로잉이었다. 실재하는 비실재적 그림자는 재현의 문제를 건드린다. 또 다른 빛과 그림자의 놀이인 영화는 얇은 스크린 위에서 실재와 비실재를 혼동시키며 사라지지만, 그의 또다른 환영은 암전의 상황에서도'다시 현전'하게 되었다. 대상을 드러내는 빛이 실상은 대상을 삼켜버리고 대상으로 빚어진 비실재적 지표를 강조하고, 비실재가 실재를 잠식하는 이러한 상황.'빛을 가려'대상을 마음대로 아로새긴 주체의 눈먼 사랑이다. 작가는 그것이 사랑의 진면목이라 말한다. 그 속에서 그림에 대한 작가의 열정을 가늠해본다. 작업에 대한 작가의 열망은 사랑에 눈이 먼, 그래서 사랑의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보다는 사랑하는 자신의 상황을 사랑해버리는 첫사랑, 그것일지 모른다고. 힘들어도 괴로워도, 어둡고 슬퍼도, 드리워져 고통스러워도 또 사랑하고 또 그리게 되는 작가의 작업에 대한 열망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지우고 비추기 ● 거친 콘크리트 벽면 위에 분필로 부서지기 쉬운 달걀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는 마그리트의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처럼 버겁거나 엉뚱하지 않다. 달걀의 너그러운 형상은 거대한 에베레스트를 품고, 산세는 달걀의 넉넉한 원형 구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을 받들고 있는 연약한 달걀은, 그마저도 깨진 달걀의 모습을 닮은 산세를 따라 작가에 의해 지워졌다. 인생의 역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듯, 그 연약한 껍질마저도 스스로 부숴버린 것이다. 웅장한 에베레스트는 이러한 지워짐을 통해 빚어진 형상이다. 달걀의 부화, 그 깨어짐을 통한 생명의 탄생, 고난을 겪은 후에만 가능한 새로운 시작. 연약한 껍질을 깨고 나온 신비한 생명력을 머금은 에베레스트 산은 애잔하면서도 견고한 모습이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웅장함에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운틴에그」다. 그렇게 브로큰에그는 마운틴에그가 되었다. 지워진 형상이 빛의 잔상이 되면서, 물질성을 버린 그의 지표들에는 다양한 시간의 층이 충돌한다. 드로잉과 비춤,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의 축이 교차하는 형상에 영원함에 대한 그의 열망이 그 무게를 더한다. 그러나 그는 그 무게에 결코 짓눌리지 말라 말한다. 밀란 쿤데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것은 빛과 그림자 유희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웅렬한 도상은 기껏 전시기간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일회적 이미지이고 감상자들의 손자국에 의해 쉽게 지워질 끄적거림이다. 거대한 것과 연약한 것의 조합. 그 불편한 무게는 충만함으로 다가온다. 모순적인 것들이 조합된, 그 애잔한 덩치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의 작품의 진수이다.
비추고 드리우고 기다리기 ● 3층 중앙에 작은 프리즘이 돌아가고 있다. 3개의 조명을 받으며 연출되는 빛의 움직임은 점차 무지개가 된다. 빛이 모아졌다가 헤어지고 다시금 만나는데, 그 빛은 벽면에 그려진 무지개 위로 드리울 때 가장 강렬하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실재와 허상의 만남. 그 짧은 조우는 금세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간다. 다시금 차가운 빛. 언제 그렇게 아름다운 무지개 빛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차가운 빛이 퍼져서 모습을 감춘다. 신화 속에서 종종 다리로 등장하는 무지개는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이나 존재를 연결해주는 통로였다. 작가에게 무지개는 무엇일까. 진정한 사랑 후에 얻게 되는 보상 혹은 이제는 행복해져도 된다는 위로인가. 그 무지개는 지금 작가와 관람자 사이의 다리가 되어, 빛으로 내려온다. 관람자들 손 위로 얹어진 무지개 빛. 설레며 기다리게 되는 그 짧은 순간은 사라짐의 아쉬움으로 더 즐겁고, 허망함으로 더 아름답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자, 먼지, 바람을 그토록 '끌어당겨'미술사에 큰 울림을 남긴 뒤샹의 앵프라민스처럼, 「For Joy」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가 만들어내는 얇은 이미지들의 층위를 통해 우리의 감상과, 우리의 삶을 증폭시킨다. 장은의는 기억과 재현을 그려내어 우리의 감응을 끌어내고 있다. 무지개는 그 통로가 되었다. 관람자는 그 만남의 순간을 기다린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찰나의 순간을 위해 또 기다려야 하지만, 비물질화되어 떠도는 그녀의 빛의 유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즐겁기 때문에. ● 전시장을 내려오면서, 일층 입구에서 돌아가고 있던 앙증맞은 선풍기가 생각났다. 그 선풍기는 못의 그림자를 머금은 얇고 작은 따블로를 건드리고, 사랑에 대한 작가의 잔상인,'진정한 사랑을 해본 덕에 병신되었다'라는 글귀를 바람의 형상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오마주에 가까운 그 묵직한 영화 대사는 노란 스마일 선풍기로 인해 가벼워졌다. 이제 작가에게 작업은 비타민과 같은 「맛있는 그림」이 되었다. 작가는 함께 그렇게 즐기자 한다. 관람자는 작가의 주문대로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행복하게 경험할 일이다. ■ 박윤조
Vol.20131010k | 장은의展 / JANGUNUI / 張銀義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