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위창 오세창_간송 전형필_소전 손재형_창랑 장택상_토선 함석태 등 근현대의 고미술 컬렉터를 중심으로 한 소장품
관람료 / 성인_2,000원 / 청소년_1,000원 / 초등학생이하 무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은 관람 종료 30분까지 / 월요일 휴관
성북구립미술관 SEONGBUK MUSEUM OF ART 서울 성북구 성북로 134(성북동 246번지) Tel. +82.2.6925.5011 sma.sbculture.or.kr
한국 근대의 미술품 수장가 ● Ⅰ. 우리나라 근대의 미술시장 고미술품이라는 단어와 함께 요즘도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인 '골동(骨董)'은 "오래되어 드물고 귀한 각종 기물(器物: 古器)이나 서화 등의 고미술품"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고동(古董)이라 불렸으며, 요즘에는 서화가 고동․골동 안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고동서화 또는 서화골동이라 하여 서화와 고동․골동은 나뉘어 사용되었다. 대체로 완상의 대상으로서 평가되던 고동서화는 근대에 들어서 골동이라는 단어로 불리게 됨과 함께 '상품'으로서의 질적 전환을 맞게 된다.(이 글에서는 고미술품과 골동이라는 단어를 문맥에 따라 함께 사용하였다.) ● 우리나라에 있어서 고분 부장품 등의 골동을 매매하는 행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파악해도 무방할 듯싶다. 도굴 등을 통한 골동품 매매는 이르면 1870년대부터로 보기도 하지만 본격화된 시기는 대체로 청일전쟁(1894-95) 이후 일본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부터로 생각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19세기 후반부터 도굴․밀거래 등 음성적인 상거래를 통한 초보적 의미에서의 골동상이 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시기를 도굴품을 중심으로 한 고미술품 거래의 초보적 의미에서의 시작기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 19세기 후반을 고미술품 거래의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시작기라고 한다면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시작기는 1900년대 이후이며, 1900년대 이후의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거래와 유통은 대략 10년 단위의 주기로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① 골동거래의 시작기(1900-10) ② 고려청자광(高麗靑磁狂)시대(1910-20) ③ 대난굴(大亂掘)시대(1920-30) ④ 골동거래 호황기(1930-40) ● 이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고려청자를 염두에 둔 일본인들이 개성을 중심으로 도굴을 시작하다가 점차 관심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도굴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인 1904-05년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고분 도굴이 극심하였다. 특히 1906년 3월 초대 통감(統監)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청자 수집에 진력하여 막대한 양의 고려청자를 수집하였다. 1910년대 들어 일제의 도굴은 개성지역을 벗어나 경북 선산(善山) 등 낙동강 유역까지 범위를 넓혔다. 특히 1911-12년(혹은 13년)은 고려자기 수집열이 최고조로 올라 당시 도굴․매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인 이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등박문에 의해 시작된 고려청자에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른바 '고려청자광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대략 이 시기 이후 도자기의 도굴․밀거래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에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이던 도굴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대난굴시대'의 시작이다.
'골동품거래 호황기'인 1930-40년대의 시기는 '만주 특수'와 '황금광시대'로 요약되는 투기의 시대였다. 1930년 1월부터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면서 총독부가 추진한 산금정책(産金政策)에 따라 한반도에 금광개발 열기가 불어 닥쳤고 금값이 폭등했으며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1930년대 중반에 본격적인 만주 특수가 일어나 주식이 최고의 호황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식민지 민중들의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일부 자본가들은 호황의 극을 달렸다. 이와 같은 사회상 속에서 골동수집 열기는 고조되었고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만들어진 서울 남촌(南村)의 미술품 경매회사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는 활성화 되었다.
일제시기 미술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골동상과 경매 시장을 중심으로 한 고미술품 거래가 미술시장을 압도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체 유통 구조를 주도한 것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는 점차 조선인의 수가 증가하여 고객층이 일본인과 조선인의 이중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작가들의 작품 유통 경로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작가와 고객을 연결하는 전문 화상(畵商)도 존재하지 않았고 화랑도 발달하지 않았다. 일제시기 미술시장의 특징은 골동상과 경매회를 중심으로 휘호회, 전람회, 개인전 등의 전람회가 화랑의 판매 기능을 겸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Ⅱ. 일제시기의 미술품 시장과 수장가 ● 일제시기의 미술품 시장 골동거래의 시작인 1900-10년대에는 고려청자의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고려청자를 마음대로 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청자의 가격이 올라가게 된 것은 이왕직(李王職)․총독부가 박물관을 세우기 위하여 고미술품을 다량으로 매입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로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에의 열광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된 도굴의 결과물인 막대한 도굴품은 대개 일본인들이 수장하였다. ● 일제시기의 고미술시장은 서울․평양․대구의 3곳이 꼽힌다. 백제․고구려․가야 및 신라의 옛 본거지인 이 세 도시는 일본인 유력자 등, 수집가들이 많이 살고 거래도 활발해 전국 고미술품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일본인 수장가로는 총독부 고관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미야자와 토센(宮澤陶川), 야마구치 세이(山口精) 등과 은행가 또는 사업가인 미야케 쵸사쿠(三宅長策), 모리 고이치(森悟一), 이토 마키오(伊東槇雄), 모리 케이스케(森啓助), 지방의 수장가로는 평양의 시바타 레이(柴田鈴), 나카무라 신자부로(中村眞三郞), 원산의 미요시(三由), 아카마(赤間), 대구의 오구라 타케노스케(小倉武之助), 이치다(市田) 등이 알려져 있다. ● 백자 수집가로 유명한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는 그의 저서 『도자여적(陶瓷餘滴)』(중앙일보사, 1974)에서 1930년대 후반 서울에 12개의 골동상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는데 아마도 안목있는 수장가의 입장에서 출입할 만한 상점을 거명한 듯하다. 아래 앞쪽에 열거한 골동상은 박병래가 언급한 12개의 상점으로 대개 본정(本町: 충무로)과 명치정(明治町: 명동) 등 남촌에 분포해 있고 뒤쪽은 박병래가 언급하지 않은 골동상이다. 1930년대 서울의 인구는 40만 남짓했고, 1935년에도 4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1930-40년대 당시 서울에서 거의 매월 교환회 및 경매회가 열렸고 30여개가 넘는 골동상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면, 당시의 골동 열기는 대단히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창상회(東昌商會: 소공동), 배성관상점(裵聖寬商店: 남대문), 문명상회(文明商會: 李禧燮, 무교동), 김수명 상점(金壽命, 정확한 이름은 미상, 명동), 우고당(友古堂, 具本雄, 소공동), 천지상회(天池商會: 天池茂太郞, 명동), 동고당(東古堂: 鈴木, 명동), 요시다(吉田: 명동), 구로다(黑田: 회현동), 마에다(前田: 충무로), 고천당(古泉堂: 富田, 충무로), 계룡산(鷄龍山: 池內, 을지로) ● 동방당(東方堂: 藤本, 남대문), 취고당(聚古堂: 佐佐木兆治, 누상동), 온고당(溫古堂: 新保喜三), 대판옥(大阪屋: 內藤次郞, 충무로), 구하당(九霞堂: 市田), 한호당(韓好堂: 矢野), 의신호(義信號: 張宇慶, 관훈동), 한남서림(翰南書林: 白斗鏞, 李淳璜, 관훈동), 문광서림(文光書林: 洪淳敏, 인사동), 새무엘 리(李)상점(三又商社: 본명 李用淳, 태평로), 조선미술관(吳鳳彬, 당주동), 고명당(高明堂: 高正植, 태평로), 김영규상점(金永奎, 新聞路), 서명호(徐明鎬)․서창호(徐昌鎬)상점(신문로), 광동서림(廣東書林: 金永完, 낙원동), 고옥당(古屋堂: 韓昇洙, 송현동) 등
일제시기의 한국인 수장가 ● 일제시기 당시의 한국인 수장가는 전형필(全鎣弼) 등 몇몇 수장가를 제외하면 일본인들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경제력 차이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일본인들은 주로 골동상을 통해 물건을 사들였지만 조선인들은 거간(居間)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였고 일본인들에게서 '수적(水滴)패'라는 비칭(卑稱)을 듣곤 했다. 주로 연적․필통 등 값나가지 않는 골동만 모으는 변변치 못한 고객이라는 의미이다. 일제시기의 주요 한국인 고미술품 수장가는 아래와 같다.
귀족·정치가: 민규식(閔奎植), 민영찬(閔泳瓚), 이용문(李容汶), 장택상(張澤相) / 문인․학자: 임상종(林尙鐘), 이태준(李泰俊), 김양선(金良善), 유자후(柳子厚), 이인영(李仁榮) / 미술가: 오세창(吳世昌), 김용진(金容鎭), 김찬영(金讚永), 오봉빈(吳鳳彬, 畵商), 이병직(李秉直), 이한복(李漢福), 손재형(孫在馨) / 의사: 함석태(咸錫泰), 박창훈(朴昌薰), 박병래(朴秉來) / 기업가: 박영철(朴榮喆), 최창학(崔昌學), 김성수(金性洙), 한상억(韓相億), 전형필(全鎣弼) / 지방: 함흥 김명학(金明學), 황해도 이계천(李繼天), 군산 전충식(全忠植), 진주 박재표(朴在杓) ● 일제시기에 조선미술관(朝鮮美術館)을 경영한 화상이자 미술기획자인 오봉빈은 수장가 박창훈이 1940년 4월에 소장품을 매각하자 이를 아쉬워하는 글에서 당시 손꼽을 수 있는 한국인 수장가로 "오세창․전형필․박영철․김찬영․박창훈"을 들었다. 1940년 5월에 조선미술관 '개관 십주년 기념 십대가산수풍경화전'을 열며 조선미술관과 연고관계가 있는 수장가들의 서화를 참고품전람회에서 전시하였는데, 이때 출품한 수장가들은 "전형필․장택상․김덕영(金悳永: 김찬영의 개명 후 이름)․함석태․한상억․이병직∙손재형․김명학․박상건(朴商健)․오봉빈"이었다. 이밖에 일제말기 서화 3대 수장가로 "전형필․임상종․손재형"을 꼽고 4대 수장가로는 유복렬(劉復烈)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주요 수장가들의 약력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오세창(1864-1953): 본관은 해주. 서울 중부 출생. 호는 위창(葦滄).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의 아들. 언론인, 천도교인, 독립운동가, 민족지사, 서화가, 감식가, 미술이론가, 전각가. 서화 등 예술 분야에서 민족사회의 구심점이자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 함석태(1889-?): 평안북도 영변 출신. 호는 토선(土禪). 치과의사.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서울 삼각정 1번지에 한성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4년 일제의 소개령에 의해 고미술품을 추려 고향으로 피신하였다가 광복 이후 월남하려 하였지만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찬영(1893-?); 평양 출신. 호는 유방(維邦). 화가. 일본 명치대 법과를 중퇴하고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김관호(金觀鎬)와 함께 평양에 미술단체 겸 연구소 삭성회(朔聖會)를 개설하고 활동하였다. 서화협회 회원으로 잡지에 문예물과 평론을 기고했다. ● 오봉빈(1893-?): 본관은 해주. 평안북도 영변 출생. 호는 우경(友鏡). 우리나라 최초의 전시기획자로 화랑(畵廊)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보성학교 졸업. 중국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와 항일운동을 하였고 3.1 만세운동 직후 체포되어 징역 6년, 집행유예 6년을 선고받음. 출옥 후 일본 동양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오세창의 권유로 서울에 조선미술관을 개원, 운영하였다. ● 장택상(1893-1969): 본관은 인동. 경상북도 칠곡 출생. 호는 창랑(滄浪). 정치가.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중퇴. 8·15광복 이후 수도경찰청장·제l관구 경찰청장에 역임. 정부수립 이후 초대 외무부장관, 유엔총회 한국대표, 민의원,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였다.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 이병직(1896-1973): 강원도 홍천 출신. 호는 송은(松隱). 서화가. 구한말 내관(內官) 출신으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서화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였고, 국전의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난과 죽을 잘 그렸고 연고가 있는 효촌초등학교, 양주중학교를 위해 거액을 희사하였다. ● 이한복(1897-1940):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무호(無號). 서화가. 어려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에게 전통화법을 배운 뒤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서화협회(書畫協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였다. 서울의 휘문·보성·진명 등 여러 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역임하였고, 고서화의 감식안목이 높았다. ● 박창훈(1897-1951): 호는 청원(靑園). 출신지는 서울로 추정. 외과의사.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경도제국대학에 유학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근무하였고 한성의사회 회장이 되었다. 방대한 수장품을 1940년과 1941년의 경매회를 통하여 모두 처분하였다. ● 박병래(1903-1974): 충남 논산 출생. 호는 수정(水晶). 내과의사. 선조 때부터 카톨릭을 신봉하여 청교도적 삶을 살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성모병원 초대 원장, 대한결핵협회장·대한내과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훈장 동백장(1964)∙국민훈장 모란장(1974) 수여. 평생 모은 도자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 손재형(1903-1981): 본관은 밀양. 전라남도 진도 출생. 호는 소전(素荃). 서예가. 양정고등보통학교, 외국어학원 졸업.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였고 광복 이후 서단의 원로로 서예발전에 힘썼다. 예술원 부회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모란장을 받았다. ● 전형필(1906-1962): 본관은 정선. 서울 종로구 출생. 호 간송(澗松). 문화재 수집가. 휘문고,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1938년 보화각(葆華閣: 현 간송미술관) 건립. 보성중고등학교 운영. 전 재산을 기울여 일본에 유출되지 않도록 노력을 경주하였다. 문화포장(1962), 문화훈장 국민장(1964)이 추서되었다.
Ⅲ. 넓혀지는 지평선: 수장가 연구의 전망 ● 우리나라 근대의 미술시장과 수장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은 10여년에 불과하고 연구자와 결과물의 수효 역시 많지 않기 때문에 연구의 폭과 깊이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각 수장가 들의 수장품의 전모는 물론 대략적인 연보 등도 충분히 조사되지 않은 것이 연구부진의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수장가들이 어떠한 분야에 얽매이기 보다는 좋은 물건을 보면 수장하려는 속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 번째로는 우리나라 근대 수장가들의 윤곽이 형성되는 시기인 1920-30년대, 특히 1930년대야 말로 고미술품 거래가 활성화된 시기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일본인 수장가는 물론 우리나라 근대의 수장가 역시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오던 여러 종류의 고미술품을 가리지 않고 다량으로 수집하였기 때문이다. ● 필자는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품의 처리 방식에 따라 ① 전형필과 같이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 ② 장택상⋅손재형과 같이 수장하였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조금씩 유출되다가 결국 모두 흩어진 유형, ③ 박창훈과 같이 다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하여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유형, ④ 함석태와 같이 소중히 수집한 고미술품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량 몰수 또는 강탈당한 경우로 구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이들의 미술품 처리 방식을 알 수 있게 해주지만 이들의 수집방향과 취향 등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미술사적 접근은 물론 사회사·심리학 등의 관점을 통한 연구가 시도될 필요가 있으며 연구 방식에 따라 이 방면 이해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미술품 수장가 연구는 해당 시대의 감식안과 미감의 수준, 미술작품 선호도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수장가들의 수집방향과 취향은 미술품의 가격은 물론 시장의 수요와 미감의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의 수집 방향과 취향 등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면 한국미술사는 물론 문화사․사회사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김상엽
Vol.20131003k | 위대한 유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