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명숙展 / KUKMYUNGSUK / ??? / painting   2013_0925 ▶ 2013_1001

국명숙_Meditation-Reminiscence of Tahiti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62.2cm_2013

초대일시 / 2013_092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선화랑 · 선 아트센터 SUN GALLERY · SUN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1,2층 Tel. +82.2.734.0458, 5839 www.sungallery.co.kr

심상의 바다를 항해하는 오디세우스 ● 장자는 천도편(天道篇)에서 "여천화자위지천락(與天和者謂之天樂)"이라 했다. 즉 "자연과 조화되는 것을 하늘의 즐거움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미학적으로 반추하자면, 자신의 작품이 자연(혹은 내면)을 이상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보람이요, 보는 이에게는 행복감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표현의 대상과 동기를 바깥 세계로부터 자아의 내면으로까지 두루 확산시킨 것이야말로 현대미술의 전향적 성취들 중의 하나이다. 굳이 무의식의 범주까지 비약하지 않더라도, 의식 혹은 내면의 경험들이나 감정, 상상, 영감, 사유, 이상, 욕망 등의 것들은 모두에게 중요한 세계이자 가치이다. 내면의 세계는 무한한 가치의 바다이자, 창조적 유희의 심연이다. 그것은 간과하거나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리얼한 실재(實在)의 세계이기에 허황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님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터이다. ● 내면, 특히 심상을 표현하는 것은 화가 국명숙에게도 주요 관심사이다. 그의 화면은 전형적인 추상양식이면서도 작가만의 유니크한 동기와 방법들로 충만해 있다. 비정형(Informel) 추상에서 볼 수 있는 실존적 지표(index)로서의 텍스츄어들, 그리고 서법추상이나 색면추상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인 제스츄어와 색조의 다채로운 표정들이 혼재해 있다. 다만 그의 화면에서는 무언가 손에 잡히고 중력도 있으며, 실재의 흔적(지표) 같은 것을 가지는 듯한 대상성과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그것은 작가가 '추상을 위한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세계의 표현 자체를 더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느 재현적 구상처럼 가시적 대상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재현적 요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장이 나부끼는 듯한 비정형의 구성들이 활달하고도 변화무쌍하게, 그리고 율동적으로 명멸하는 화면 속에 드문드문 재현적인 요소들이 부유하고 있는 것은 추상 개념에 앞선 표현의 차원에서 설정해둔 중요한 장치인 것이다.

국명숙_Meditat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45.5cm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화면이 몇 가지 요소들의 조합에 의한 브리콜라즈(Bricolage), 즉 절충적 양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근래 융합이나 연동은 시대적 양식으로까지 기술되고 있는 상황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추상이면서도 구상이라는' 긍정판단보다는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니라는' 부정판단에 더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화면은 '추상이면서도 추상이 아닌' 논리적 배중률(排中律)을 띠고 있다. 어느 쪽이든 많은 요소들이 화면에 포진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온전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왜곡과 은닉 및 소격(疏隔)을 통해 요소들 간의 관계성이나 필연성, 그리고 유기적 위계 등에 의문을 던지는 어법이 부상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판에 박힌 구상과 추상이라는 구획들을 동시에 벗어나기 위해 '디아그람'(diagramme) 즉 '돌발흔적'이라는 특유의 이미지 왜곡을 구사한 바 있다. 국명숙 작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그 초극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전개중이다. 그리기와 지우기(혹은 닦아내기), 붙이기(혹은 떼기), 번지기 등의 다양한 방법과 제스츄어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요컨대 작가의 화면에서 그 어떤 요소들도 인과관계라는 사슬로 묶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해체적 서술의 문맥들이 결국 작가의 심상을 표현하거나 지시하는 것으로 용인해도 좋을까.

국명숙_Meditation-Reminiscence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2013

작가의 화면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 내면에 대한 성찰 혹은 그것에 대한 풍경화이다. 현실을 인도하는 이성과 의지 아래서는 삶 자체가 코스모스, 즉 필연적 인과관계에 기반한 질서 정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독교 세계관과 작품세계가 양립해야 하는 작가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제 화면에서 보듯이 가지런한 것이란 쉽지 않다. 작가가 전해주는 내면의 풍경은 파격과 불규칙, 즉흥성과 우연 등의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고요하고 투명한 비취빛 산호초 바다를 연상케 하는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이미지가 보이는가 하면, 먹구름을 동반한 폭풍우 같은 것이 엄습해 오고 있다. 또한 감미롭고도 순조로운 순풍 속에 행복한 항해를 하는가 하면 난파선처럼 귀항하는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이라 말하면 지나칠지 모르지만 적어도 코스모스 상태는 아니다.

국명숙_Meditation-Illusion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97cm_2013

하지만 바로 이러한 혼돈적 풍경이야말로 우리 내면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자 고백임이 분명하다. 작가는 바로 이것이 내면의 리얼리티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는 삶을 영위하는 만큼의 잡다한 정보들이 쌓이기도 하고 각축하기도 한다. 더러는 잠자고 있던 기억이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솟아나기도 한다. 바깥 세계의 천태만상이 그대로 복제되어 우리 내면은 언제나 북적대는 저잣거리와도 같은 환영들이 꼬리를 물고 출몰하는 곳이다. 물론 작가는 의식의 심연에까지 내려가는 밧줄을 애당초 마련하지 않은 상태이다. 어디까지나 의식이 개입하고 의식이 조회 가능한 범주만을 답사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더 깊이 내려가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 즉 판도라의 금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아름다움 혹은 선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야만적 욕망의 덩어리, 아니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마그마가 그 실체 아니던가.

국명숙_Meditation-Reminiscence of Tahiti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5×112.1cm_2013

아무튼 이러한 반전의 컨텍스트 속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긍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의식 너머로 월경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한 파편화된 혼돈의 파노라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색조로 채색하고 있다. 물론 화면상의 파편화라는 것도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의해 기억의 끈이나 인과성의 사슬이 느슨해져, 시공을 부유하는 결과의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폭풍우에 찢겨 돛이 너덜거려도 그것은 별자리처럼 화면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저마다 자기의 궤도를 지키는 천체와도 같은 조화적인 구성의 견고함이 읽혀진다. 또한 별이 저마다의 아름다운 빛을 내듯 파편들이 조화로운 혼인색을 띠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국명숙_Meditation-Reminiscence of Tahiti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5×112.1cm_2013

작가의 그림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에너지 넘치는 화면 구성과 변화무쌍한 필치에는 오디세우스의 파란만장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트로이로부터 이타카 귀향을 위한 항해 중에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사연들은 우리의 인생 여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배의 키를 잡은 오디세우스가 고도의 절제와 의지로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달한 것처럼, 작가도 조율의 묘를 통해 복잡다단한 요소들의 다양한 소리들을 조율하여 하나의 곡으로 완성해내는 것이다.

국명숙_Meditation-Sonata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90.9cm_2009

작가는 섬세한 감각으로 변주를 시도하여 뉘앙스가 풍부한 시리즈를 방대하게 도출해내고 있다. 섬세한 감각과 분명한 방법적 천착이 전제될 때 가능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이제 방대한 연작의 요소적 변주를 일단락 짓고, 보다 구조적인 전향을 앞두고 있다. 특히 오랫동안 축적해 온 기법이나 노하우들을 보다 신축적으로 연동시키는 문제를 작가는 오랫동안 구상해 왔음을 피력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호수처럼 포진된 청색조의 거대한 비정형의 면 하나만 하더라도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한 요소라는 데 누구나 공감한다. 특히 번짐과 유동의 흔적을 보여주는 은유성이 풍부한 이 요소를 보다 다른 컨텍스트로 해방시켰을 때, 그것이 가지는 임팩트가 어떠하겠는가. 신비로 가득한 별천지가 열리고, 영감에 찬 서광의 빗줄기들로 압도되는 화면들을 연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말이다. ■ 이재언

Vol.20130928d | 국명숙展 / KUKMYUNGSUK / ???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