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의 해석

구본창展 / KOOBOHNCHANG / 具本昌 / photography   2013_0927 ▶ 2013_1026 / 일요일 휴관

구본창_In The Beginning 02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바느질_135×95cm_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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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 홈페이지_www.bckoo.com

초대일시 / 2013_092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0)53.426.5615 www.bundoart.com

쉽게 생각하자. 사진을 찍는 행위는 다른 대부분의 장르도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예술이 아니었다. 사진이 가진 예술의 잠재력을 발견한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예술로 발전시켰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진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선구자들이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시대가 중요했다. 그 작가들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사진은 예술로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혹은 진영 사이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해 왔다. 그 큰 흐름 속에서, 나는 많은 이들이 경외감이 가지는 사진의 대가들보다 단지 사진 찍기, 또는 카메라라는 물건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이 더 흥미롭다. 애당초 현대 예술의 선언적 가치들을 공유하는 예술 공동체와 거리가 먼 대중들을 보자.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취미로 찍는 사진이 곧 예술 작품에 손색없다고 스스로 평가하며 예술가적 자의식을 세운 집단들도 흔하다.

구본창_In the Beginning 6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바느질_135×95cm_1994

물론 이와 같은 딜레탕트의 득세는 사진이 가지는 기술 결정적이고 우연적인 특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들 개인을 비난하거나 얕볼 수만은 없다. 예술사회학의 통계 조사에 따르면, 사진 예술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취미에서 진정한 작가로 양성된 사례 빈도수가 높은 분야이기도 하다. 테크놀로지는 무차별적으로 시대를 관통한다. 사진의 테크놀로지는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을 구분해서 특별히 한쪽에 더 큰 혜택을 주거나 소외시키는 일 따위에는 무심하다. 이제 고성능 디지털 기기의 등장 앞에서, 사진예술은 과연 사진을 예술적으로 찍고 감상한다는 게 무슨 의미냐는 질문지를 스스로 뽑아 들었다.

구본창_In The Beginning 10-3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바느질_174×490cm_1995~6

작가 구본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진은 그 물음에 대한 예술 진영의 응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술사진에 닥친 위기를 드러낸 징후다. 놀랍게도 그가 이 전시에서 선보인 능숙한 시선과 손놀림은 이러한 물음이나 위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하나의 주제로서 "표면의 해석"은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제목이기도 하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카메라에 찍힌 피사체를 보는 것이지, 인화된 사진이라는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구본창은 우리로 하여금 사진 속 내용을 주목하기보다, 카메라로 찍은 상이 평면에 맺힌 현상 자체를 해석하라고 권한다.

구본창_Untitiled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바느질_134×104cm_1999

이유는 간단하다. 사진 촬영과 감상을 하는 층이 늘어나면서 사진 예술은 일반인들과 자기 집단을 차별하기 위하여 사진 해석의 담론을 끝없이 정교하게, 그리고 고급스럽게 다듬어왔다. 여기에는 예컨대 인문학적 지식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진을 해석한다는 것이 곧 철학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예술의 해석에서 미학이 능사가 아니며, 일상의 지식체계에서 철학이 공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다. 사진 작품을 그 내용만 파고 들어가는 대신, 표면의 물질적 특성도 따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새로운 앎이 시작된다. 사진 속에 화학이 있고, 공예가 있고, 회화가 있다.

구본창_Portraits of Time 0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00cm_1998

추측컨대, 구본창은 사진이 궁극의 예술이 되길 원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결코 형이상학적 가치에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사진 속에 현현한 이미지의 순수성이 해석의 과잉으로 좀 더 돋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대상을 구성하는 형태와 빛과 각도를 결코 넘어서지는 못한다. 여기서 그는 물질로서의 사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련의 도발적인 시도를 반복한다. 인화지를 바늘과 실로 꿰맨다거나 열로 훼손시키는 것이 혁신의 전부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진의 직설적인 기술-카메라를 다루고 현상하는- 이외에 개입하는 복잡한 사상이나 해석에 대한 타당한 저항이 그의 작업에 나타난다.

구본창_White 0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34.5×43cm_1999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가들의 태도 가운데, 자신이 한 가지 대상을 소재로 삼으면서 스스로를 포장하여 자리매김하는 일이 있다. 따라서 무엇 하나를 작품으로 다루는 것이 본인 존재가 될 뿐이다. 어떤 소재를 찍는지에 따라서 그 사진작가는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되거나 현실참여 작가가 된다. 자신의 빈약한 예술을 격상시키기 위해 승강기처럼 쉽게 쓰는 소재 선택의 전략 대신, 구본창은 길게 굽은 계단을 한 칸씩 내딛었다. 그 계단 하나하나는 모두 예술적 실험의 실마리들이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그러한 자신의 고민이 가장 짙게 드리운 기념비적인 흔적이다.

구본창_Storises in Ashes 05_혼합재료_134.5×94cm_1995

그가 찍은 사진은 화면 속에 뚜렷한 소재들을 등장시킨다. 여기에는 규칙적인 형태가 포함된다. 이 사진들은 또한 대비되는 구분이나 상징을 드러내려는 욕구 또는 수집에 대한 욕구가 제시되는 까닭에 재미있다. 이것은 회화의 정물과는 다르다. 예컨대 우리가 한 사람의 벌거벗은 몸에 관심을 둘 수는 있지만, 이 누드의 자세는 매우 상투적으로 설정되었다. 비누들, 항아리들, 풀과 나비들, 어떤 사람에게는 흥미를 끌지 못할 법한 것들에게 시선을 붙들어 매려는 그의 태도는 매우 뒤쳐진 예술관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술의 중심에서 뜨거운 조명을 받아 온 이 작가의 사진 앞에서, "이것은 비누, 저것은 시계. 음, 다음 것을 보여 다오."식으로 사진 속 대상들을 판별하는 것에 만족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이 사진들은 동식물 도감이 아니고, 상품 카탈로그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입지를 거꾸로 이용하여 다른 담론을 제거한 순수한 예술 그 자체를 넌지시 드러낸다. ● 이 방법이 오로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대가의 특권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망막과 뇌리 속에 스쳐간 이미지를 물질화하고 남들에게 이해시키는 단계에서 사진은 세계에 던져진 또 하나의 현상이자 존재지만 그 자체가 진짜일리는 없다. 현실 속 사진을 찍는 방법에서 있는 그대로를 찍느냐, 아니면 인위적 설정을 찍느냐 하는 리얼리즘의 구분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의 사진은 (물리적으로) 현실적인 반영이다. ■ 윤규홍

Vol.20130927f | 구본창展 / KOOBOHNCHANG / 具本昌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