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927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청아아트센터 CHUNG-A ART CENTER 서울 송파구 방이동 89-22번지 보성 100주년 기념관 Tel. +82.2.406.2524 www.gallerychunga.com
1. 나와 김홍배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미술반 활동을 '함께' 했으며 미술대학 회화과를 '함께' 다니고 혜화동화실 동인을 '함께' 한, 그야말로 내 젊은 시절을 '함께' 한 내 친구다. 홍배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 사람이고 일명 '종로신사'다. 나 또한 그렇게 기억하듯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홍배를 '완벽'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배려심 많고 책임감 강하며 리더십을 갖춘 내 친구 김홍배의 생전 사진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홍배가 사진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래 사진은 그가 타계하기 4년 전 6월에 중국 위구르성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것이다. ● 후배이자 보성고 동료교사였던 최병민과 둘이서 갔던 이 여행에서 그는 주황색의 토시 같은 자루로 발끝에서 무릎 아래까지를 감싼 채 모래언덕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꼭 이제 막 우리와 헤어져 저 세상 먼 길을 홀로 외로이 가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배경이 사막이라 그런지 우주적 풍경처럼 광대하고 압도적이다. 마치 생전에 그가 그렸던 그림 속 한 풍경에 막 당도해서 우리를 바라보며 "나 잘 도착했어"라고 인사하는 것 같다. ● 또 한 장의 사진은 그가 2010년 혈액암 발병 발견 후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겨울 병후가 일시적 소강상태에 들어섰을 때 가족과 함께 갔던 태백산 여행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 속 그는 투명하고 맑은 눈경치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미 사진 속에서 우리들에게 "잘 있어"라는 인사를 하고서 먼 길을 가볍게 떠날 준비를 마친 사람 같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몸이 막 공중으로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의 모습 같다. ● 이 전시는 김홍배가 세상의 친구들에게 남긴 선물이다. 선물은 기쁘다. 선물은 받는 사람도 행복하고 주는 사람도 그러하다. 내가 그와 젊은 시절을 '함께'한 인연으로 이 '선물전'을 준비하는 과정도 기쁘고 행복했듯이, 저 세상의 그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내가 아는 내 친구 홍배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2. 김홍배는 작년 9월 27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전시는 김홍배의 1주기를 맞아 여는 그의 유작전이다. 김홍배는 1964학번 서울대 미대 회화과 출신이고 1971년 1999년까지 보성고등학교에 재직했다. 학교 선생하면서 작품 발표를 계속해왔지만 개인전을 연 적은 없다. 생전의 그의 작품 발표는 혜화동화실전과 화동화우회전 출품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혜화동화실전에는 1983년(7회전)부터 1995년(19회전)까지 해를 거르지 않고 출품을 했다(혜화동화실전은 1989년 공동화실이 없어진 후에는 혜화동인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열렸다). 19회전 이후 15년만에 열린 기념전 성격의 20회전(2010)에도 출품을 했다. 총 14회 출품한 셈이다. 매년 2점-3점 정도의 작품을 걸었다. 또 한 가지 그가 정기적으로 참여했던 전시는 출신학교인 경기고등학교 동문들의 동호인 미술전 화동화우회전이다. 화동은 경기고가 현재의 삼성동 쪽으로 이사하기 전 이 학교가 있던 동네의 이름이다. 현재는 시립 정독도서관이 그 자리에 있다. 그가 화동화우회전에 출품한 것은 3회전(1998)부터 13회전(2009)까지 총 열 한 차례다. 2003년은 전시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참여한 것이다. 혜화동인전이 연례전으로 열린 마지막이 1995년 19회전이었으니까 그걸 감안하면 혜화동인전 이후 그의 정기적 작품 발표는 1998년부터는 화동화우회전으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 혜화동화실은 1976년 8월 혜화동로타리 근처에 문을 열었던 공동 작업장의 이름이자 매년 전시를 함께 했던 전시동인의 이름이다. 처음에 7명으로 시작하여 한 명, 두 명 더 늘어 5회전 이후로는 평균 12명 안팎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대부분은 몇몇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성우 선생의 서울대 교수 재직 시 제자들과 그 선후배들이었고 특히 고적답사나 섬 여행 등을 같이하는 등 친목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김홍배는 전성우선생의 대학제자이자(김홍배가 대학 4학년 때 전성우교수가 서울미대에 처음 부임해왔다) 그리고 1971년부터는 전성우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보성고교에 부임했기 때문에 그 인연이 매우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혜화동인전의 출품자들이었다. ● 2010년 5월 오랜만에 열린 제20회 혜화동인전은 이 동인들의 마지막 전시일 뿐만 아니라 김홍배에게도 생애 마지막 전시였다. 그 해 봄 김홍배는 이 동인전 출품과 화동화우회전 출품작을 위하여 도봉구 수유동의 그가 40년간 살던 집의 지하실 작업장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작품 1012>와 <작품 1013>이다. 둘 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40호 크기(80x100cm)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위 20회전에 출품되었다. 화동화우회전은 그 해 전시장 물색이 잘 안되어서 취소되었다 한다. 바로 이 전시 직후 그의 혈액암 발병이 발견되었다. 2년여의 고통스런 투병 후 그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3. 김홍배의 예술은 생활인으로서의 도락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전업작가로서 예술인의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삶 자체의 미학성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달인과 비슷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거칠게 구분하자면. 첫 번째 시기는 1964년 미대 학생시절부터 혜화동화실전에 출품하기 시작하기 전인 1982년까지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비교적 다양한 그림이 보인다. 이 시기는 그의 대학, 군대, 결혼 등 생활인으로서의 출발시기와 겹친다. 두 번째는 혜화동화실전에 출품하기 시작한 1983년부터 그가 보성고 교사생활을 그만둔 1999년 정도까지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으로서의 그의 성실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안정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2000년 초반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생활과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그가 '도락'으로서의 삶을 보다 폭넓게 즐긴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 시기에 특히 여행을 많이 다녔다. 이것은 그가 이 시기에 만든 여행약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캔버스 회화 작업보다도 더 멋지고 값진 예술적 성취물로 얘기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예술가로서의 열정이라든가, 작업의 성취가 더 활발하고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던 시기는 두 번째 시기가 아닐까 한다. ● 전업작가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생활인예술가' 김홍배의 미학은 매우 순수해서 음악적 영혼의 상태에 근접해 있다. 그의 추상화면은 딱딱한 기하학적 하드에지(Hard Edge)도 미니멀리즘 (Minimal Art)도 아니다. 그것은 비형태(in-formel)의 미학이고 타시즘(tachisme: 얼룩과 흔적으로서의 회화)과 액션 페인팅적 기법들을 통해 에너지와 흐름의 미학을 추구한다. 비형태와 열려진 우연을 통해 그는 시각의 순수한 기쁨, 순수한 음악적 울림으로서의 색채와 빛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 속의 에너지를 자연주의적 방법으로 드러낸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을 '자연주의적 추상(naturalistic abstraction)'이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한국 추상미술의 주류적 특징으로 얘기되는 '서정적 추상'과 공통된 특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존의 그것들과 상당히 구별되는 다른 속성이 있다. ●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김홍배의 작업에 순수시각적 에너지의 동력학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순수시각의 쾌락이 관조적이라기보다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마치 폭죽의 빛이 팡팡 터지는 듯한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에서 내가 상상하는 것들은 솟아오르거나 쏟아지는 운석들, 바다 속 물고기 떼의 유영, 태풍의 눈, 우주의 계곡, 달빛, 용암, 노래, 유성, 오로라, 흐드러진 양귀비꽃밭, 파도, 새벽 강에 비친 하늘, 장엄한 노을, 하늘을 가득 채운 새떼, 폭죽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이 움직임이고 흐름이라는 점이다. ● 블랙홀과 대폭발과 초신성의 탄생 사이에 완성과 미완성의 개념이 있는가. 모든 것은 미완성의 연속이고 운동 에너지고 비형태고 흐름이다. 새벽과 아침 사이에 완성과 미완성의 개념이 있는가. 모든 것, 모든 순간은 대등하게 아름답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가치의 위계가 있는가. 둘 다 똑 같은 가치이다. 순환이 있을 뿐이다. 김홍배의 많은 작품들은 물질과 운동, 빛과 에너지에 대한 찬가처럼 보인다. 허블망원경에 포착된 우주의 대폭발과 분자현미경에 포착되는 미시세계는 서로 닮아있다. 2000년대의 그의 작업의 대부분은 이 같은 매크로와 마이크로 경관의 동시성을 보여준다. ● 김홍배 작업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완성작과 미완성작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어렵다는 점이다. 완성작이건 미완성작이건 그의 작업은 동일한 우주의 에너지의 흐름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완성작이 좀 더 응축되고 단단한 맛이 있다면 미완성작은 좀 더 느슨하고 편안하게, 무심하게 열려져 있고, 자연 그 자체의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김홍배가 남겨놓은 그림, 완성작이든 미완성작이든 모든 것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김홍배의 미학은 흐름의 미학이다.
4. 2010년 아직 혈액암 발병 진단을 받기(9월) 수개월 전 김홍배는 수유동 지하실 작업장에서 위 2010년 혜화동인전 출품작을 준비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30여점의 작은 작품들을 하고 있었다. 금년 1월 이 유작전 준비를 위해 수유동 자택에 남아 있는 고인의 작품들에 대한 1차 조사를 했었다. 지난 40년간 이사하지 않고 한 곳에 계속 살았기 때문에 서너 작품을 빼면 작품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고 미완성작을 포함하여 약 130점의 작품을 유족 소장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 10점미만의 초기 구상화 작품을 빼면 전체 작품은 모두 추상화였다. 의외였던 것은 명제와 제작연도가 분명치 않은 작품이 거의 대다수일 정도로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별도로 작성해둔 전체 작품목록도 없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정규적 의미의 전업작가는 아니었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드로잉이나 스케치가 없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대부분의 작품은 스케치 단계를 생략하고 직접 캔버스와의 대결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었다. 통상적인 의미의 스케치나 드로잉은 아니지만 김홍배 특유의 작업 방식이랄까 작업 도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드리핑(흩뿌리기)과 얼룩의 우연적 효과로 연속된 초벌 그림 위에 여기 저기 놓아보는 데 사용하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창문 같은 4각형 프레임이었다. 이것은 그의 전체 시기의 작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2000년대의 마지막 몇 년에만 해당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회화의 구도와 프레임, 혹은 최초의 회화적 충동이 이런 방식의 랜덤(우연) 속에서 결정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회화의 구도와 형태와 감흥을 발견하고 사전 조율하는 방법적 장치로서 유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묘사'나 '표현'으로서보다는 '발견'과 '우연'으로서의 미학을 추구하는 방편으로서 말이다. ● 유작들에 대한 이날의 조사 과정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약 35점에 달하는 일련의 소품들이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캔버스 그림이고 앞서 언급한 두 동인전 출품작들의 일반적 크기보다 규모가 약간 작았다. 12호 크기와 20호 크기가 각 열점씩, 그리고 25호 변형이 두 점, 30호가 다섯 점, 40호 변형이 세 점이었고 아주 작은 것으로 4호짜리 작품이 두 점 있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김홍배가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거나 혹은 부담 없는 가격으로 팔려고 만든 작품들이라는 것을 유족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혜화동인전이나 화동화우회전 출품작들이 40호, 50호 안팎으로 좀 규모가 크고 대체로 유리액자까지 끼운 무거운 작품이어서 소장하기에 부담스러운 작품이라는 생각을 본인이 하지 않았나 싶다. 작은 작품들은 이와 달리 비교적 부담 없이 소장 가능한 일종의 선물용 특별 제작판같은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작업 방식도 이를테면 12호 크기와 20호 크기 캔버스 각 열 개를 한꺼번에 바닥에 깔아놓고 첫 번째 캔버스에서부터 열 번째 캔버스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물감을 칠하거나 흩뿌리고 테레핀으로 번지게 하면서 말라가는 순서대로 그 위에 또다시 물감을 덧칠하고 흩뿌리고 테레핀을 흘리고 하는 것을 수없이 반복해가며 한꺼번에 제작해나간 것들이라고 한다. ● 김홍배의 대학 후배이자 보성고 동료교사였던 김주호는 "김홍배선생의 그림들은 참 먹음직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형상을 그린 게 아니라 프라이팬에다가 요리를 하듯이 좀 싱거우면 소금을 뿌리고, 색깔이 밋밋하면 고춧가루를 넣듯이 그렇게 만들어 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김홍배의 작업방식의 특징을 매우 잘 형용한 말이라고 본다. 김홍배의 많은 작업들은 그렇게 음식 조리를 하듯이, 마음에 들때까지 무엇을 더 얹거나 빼거나 지우거나 혹은 다시 얹어가면서 작업한 작품들이다. ● 이런 제작 방식은 특히 미완성작을 볼 때 더 잘 드러난다. 위에 언급한 미완성작(혹은 진행작이란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35점을 그의 집 지하 작업실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이것이 완성작이냐 아니냐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완성작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 없는 채로 그 작품들을 보았다. 다만, 좀 오래되고 방치된 것이 뿜어내는 아우라(Aura; 매력적인 후광)를 느꼈다. 고풍스럽고 자연스럽고 잘 익은 듯한, 마치 바람과 햇볕으로 잘 말라서 품위 있게 살아있는 생물체의 피부를 감촉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작품보다는 자연의 살과 피부에 더 육박하는 그 무엇, 냇가의 조약돌이나 바다의 바람, 풀섶의 향기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사람과 그 작업의 흔적이 하나로 어우러져 뿜어 나오는 사물의 독특한 아우라였다. 이것들이 3년 전에 작업 중이던 작품들이라는 걸 알고 나는 나중에야 알고 놀랐다. 그것들은 액자 속에 들어있는 그의 연례 전시회 출품작들보다 덜 포멀(formal)하고 부담 없고 가볍고 자유로운 작업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미완성작 곧 아직 진행 중이고 열려진 것, 아직 닫히지 않고 다만 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의 낙엽 깔린 길이나 무심한 하늘의 구름, 단풍 든 산, 소용돌이치는 물, 나뭇가지들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주는 열려있고 편안하면서도 깊은 느낌 말이다. 김홍배의 선물'이라는 이 전시회의 명칭이 나온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다. ● 홍배는 휘파람을 잘 불었다. 어디선가 홍배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느낌과 소리가 김홍배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 성완경
Vol.20130927b | 김홍배 유작展 / KIMHONGBAE / 金弘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