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균형

Balance of passion展   2013_0830 ▶ 2013_0927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초대일시 / 2013_0830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 권기철_김건예_김기수_이지영_이태희_차규선_황우철

주관 / 현대미술연구소 기획 / 정명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웃는얼굴아트센터 두류갤러리 SMILING ART CENTER 대구시 달서구 문화회관길 160번지 Tel. +82.53.667.5735 www.dsac.or.kr

꿈과 열정이 없다면 인류는 오늘날처럼 다양한 문화 예술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열정은 인류의 문화를 잉태하고 꽃피우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기에 열정이 담겨있지 않은 작품은 몇 번을 봐도 감동을 주지 못하지만, 열정이 담긴 작품은 살아 있는 듯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깊이를 더할 뿐 아니라, 보고 또 봐도 감동과 여운을 안겨준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다. 삶도 사랑도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열렬한 애정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운데, 정중동(靜中動)의 마음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 인간은 음식을 만들 때 느끼는 후각과 시각작용 그리고 날씨의 변화에 따른 감성의 변화뿐 아니라, 표정과 옷매무새 목소리와 눈빛 등을 통해 유사한 감각적 경험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주변의 다양한 변화를 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소통한다. 이 여름의 한가운데 매미울음이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청각을 열고, 앙상한 겨울나무에 하얗게 내리는 눈이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시각을 열어 놓는다. 자연의 풍경이나 인간사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가며 사유하는 인간의 균형 감각이 빚어내는 마술과도 같은 힘이다. 그 힘은 세상을 보고 느끼는 평형감각이 있어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 우리는 종종 '열정'을 과도한 감정의 분출이나 발산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창작에 있어 열정이란, 내면에서 일렁이는 뜨거운 파고의 여과 없는 표출상태가 아니라, 예술가의 품속에서 감각의 결을 거쳐 여과되어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 주제인 '열정의 균형'은 평형감각 조절의 출발점이 시각이듯, 시각예술가의 품속에서 잉태된 감각의 균형이 담긴 작품의 면면을 통해 열정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웃는얼굴아트센터」개관전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삶의 한가운데서 그 아픔과 뜨거움을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 가는 작가 7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 주제인 '열정의 균형'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경험한 예술가의 평형감각, 그 감각으로 필터링한 작품,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의 시각,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창작과 감상의 소통이 발생하는 시간과 장소, 이 지점이 바로 '열정의 균형', 즉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순간일 것이다. 알 속에서 나오고자 하는 마음과 알 밖에서 깨어주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시간을 공유하고자 '열정의 균형'전을 열어 놓는다.

권기철_댄싱힐-러브_한지에 혼합재료_162×336cm_2011

한동안 창작을 위한 새로운 동기를 찾아 인도의 성지나 호주 원주민을 찾아 떠나기도 했던 권기철은 근원적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의식과 무의식의 직관이 발하는 흔적 속에서 발견해 간다. 이 발견 속에서 찾은 시각적 경험과 촉각적 경험은 그의 창작을 보다 자유로운 가운데 '열정'을 발하게 한다. 그의 감각적 행위의 흔적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발견한 시각적 환영이자 그림자일 것이다. 예컨대 「무탄트」 연작은 그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무채색의 먹이나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고 또 긋는 행위의 흔적들로 이루어진다. '무탄트'는 호주 원주민중의 하나인 참사람부족이 문명인을 가리켜 '무탄트', 즉 돌연변이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권기철은 말로 모건(Marlo Morgan)의 「무탄트 메시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 그곳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을 직관의 결에 따라 그리고 있다. 그것은 「LOVE」연작과 함께 삶의 의미와 창작 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찾아가는 길, 참사람과 참사랑을 그림으로 담아내기 위한 긴 노정에 서있음을 본다. 그 노정은 바로 삶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작업이 삶의 경험과 여행을 통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창작뿐 아니라, 감상에게도 사유의 깊이를 견인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어쩌면 인간의 삶은 열정이나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균형을 잃어버리고 눈과 귀가 멀어 참사람이 되지 못해 참사랑도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이처럼 균형이 깨진 상황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 것인가? 작가가 작품을 만들지만, 작품이 다시 작가를 만들기도 한다는 이태희는 창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출발이 바로 삶의 자유와 창작의 시작임을 말한다. 이는 '창작과 감상, 감상과 창작의 관계는 결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님'을 말하기 위한 핵심적인 설명이다. 감상과 창작은 상호 교환되고 소통되는 관계이다. 그래서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 역시 선(先)감상을 통해 창작이 가능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표현이 가능한 것이 삶이고 또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작과 감상간의 균형감각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전제이다. 그런데 이런 균형의 관계를 이태희는 「49 : 51」이라는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 「49 : 51」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의 천정화 중에 '아담의 창조'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신과 인간의 대화를 손으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이는 "신에 대한 현대인의 다양한 가치관의 표현으로 절대자인 신과 상대자인 인간의 간격을 좁혀나가는 르네상스적인 친화성,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의 변화를 유희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이태희의 영상설치 작품은 '가위, 바위, 보'라는 게임, 승자와 패자로 균형이 깨지는 순간, 그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쪽에서 응원으로 균형을 채워가는 관계의 설정으로 일 대 일이거나 다수 대 다수 간의 힘의 균형을 확장해 가는 방식이다.

이태희_49:51_비디오설치_가변크기_2013
김건예_maid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81.8cm_2011

가운데에 받침대를 놓아 평형을 유지시킨 긴 널빤지의 양쪽 끝에 무게가 비슷한 사람이 한 번씩 번갈아가며 오르내리는 시소놀이나 널뛰기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며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놀이이다. 그래서 그러한 놀이는 어느 정도 평형상태가 유지된 관계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김건예가 여성을 모델로 그린 그림에는 창작과 감상간의 관계의 설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번 전시를 위해 선택된 두 점의 작품인 「maid1」과 「여전사」는 매우 대조적인 의미관계, 마치 시소놀이의 상승과 하강 혹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대조적인 여성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통해 욕망하는 것에 대한 역할극, 즉 욕망이 투영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maid1」은 하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카드게임의 배경위에 그려진 「여전사」는 강해 보이지만 게임의 규칙이나 상대적 캐릭터에 대응해서 그 '여전사'의 힘은 약하거나 또 강하게 변화한다. 그러한 관계의 설정, 「maid1」나 「여전사」캐릭터는 다시 창작과 감상의 경우 다른 의미로 확장된다. 창작과 감상 간의 소통은 캐릭터가 갖는 일차적 규칙을 갖지 않고 다양한 시선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결합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미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김건예가 그리는 미적 대상은 케릭터를 모방하는 코스프레와 같은 역할극으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코스어의 모습, 이 모습은 작가 자신 혹은 현대인의 욕망이 투영된 미적 대상, 나이면서 너일 수 있는 것에 대한 관계 내지는 소통에 대한 개별적 욕망의 투영이거나 현대인의 열망일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젊은이들의 문화적 현상이고 하나의 취미이기도 한 코스튬플레이(costume play)는 익명의 현대인을 벗어나 이미지로 소통되는 세상 속에서 익숙하고 친근한 그 무엇이 되고 싶거나 욕망하는 너 혹은 나의 꿈이 투영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 인간은 누구나 현실에는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 열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에 투영되어 예술로 소통한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현대사회에서 이미지 예술가는 중요한 시각적 메시지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수많은 광고나 예술적 이미지를 보거나 소비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소비의 시대에 현대의 소통 시스템과 다르게 물성이 갖는 특성을 활용해 자신이나 주변을 반사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가 김기수다. 김기수에게 있어 이미지 소통을 위한 중요한 매개물은 스테인레스 미러(stainless mirror)이다. 이 작가는 스테인레스 미러가 주는 표면의 효과를 조절하는 방식에 따라 보여 지는 것과 비춰지는 것이 교차하는 경계에 그의 회화적 메시지를 새기거나 그려 놓는다. 그리고 그 경계를 기점으로 표면은 수많은 주변의 상을 반영하면서 고정된 이미지 보다 변화하는 이미지를 향해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마치 고정된 하나의 형상에 숨을 쉬듯 흐르고 변화하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지는 크고 작은 연못 같다. 「MOON」연작이 정성을 들여 정밀하게 만든 스테인레스 연못이라면, 「CUBE」연작은 입방체의 스테인레스의 바탕에 색과 질감의 차이가 있는 스틸(steel)로 마치 붓으로 그은 일획을 보는 듯 착시효과를 보여준다. 확실히 「CUBE」연작은 「MOON」연작 보다 회화적인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는 작업이다. 이러한 시도는 조형적 변화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창작을 위한 탐구의 결과이다. 그에게 있어 미끄러지는 듯 반짝이는 표면에 견고하고 차가운 재질의 미러판은 정교한 필선의 효과까지 만들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재료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그 경계에서 실재와 환영의 관계를 조율하고, 또 그 빛을 선사하는 시각적 연주가인 그는 오랜 시간 숙련된 솜씨로 견고한 재료에 회화적 호흡을 불어 넣는다.

김기수_CUBE_스테인리스 거울에 혼합재료, 철강_250×222cm_2013
황우철_오래된 침실_스테인레스 스틸_87×83×80cm_2008

냉정과 열정을 오가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황홀한 연주를 보다가 황우철이 빚어 낸 동일한 재료 다른 느낌이 담긴 「오래된 침실」과 마주한다. 이 작품이 주는 힘은 두 마리의 동물이 붙어있어 '둘인 하나'로 보이는 지점에 있다. 이 강렬한 이미지는 스테인레스 주물을 통으로 떠낸 조형물이다. 그래서 크기에 비해 엄청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이 번쩍이고 묵직한 작품인 「오래된 침실」은 작업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견고한 스테인레스 주물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서로를 향해있는 두 마리의 동물의 형상인 「오래된 침실」은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차갑고 무거운 재료로 만든 작품에서 역설적으로 뜨겁고 가벼운 현대인의 욕망, 현대인의 초상이 담겨있다. 이를테면 견고하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표면과 무겁고 강하지만, 가벼운 욕망을 드러내듯 반사되는 표면에는 소비적 욕망이 비춰지고 있다. 그는 이렇게 강렬한 시각적 효과와 물성이 주는 무게를 침실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 침실은 소비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현대가 아닌, '오래된' 과거의 시간을 상정한다. 과거의 시간을 포함한 「오래된 침실」은 기본 틀을 제작하고 다시 스테인레스 주물로 만들어지기 위해 천도가 넘는 불길 속을 지나온 것이다. 그 뜨거운 불길을 지나온 「오래된 침실」은 어쩌면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냉각시키듯 정지해 놓음으로써 열정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성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것이 유토피아임을 보여주기 위한 황우철의 이상향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오래된 침실」은 생명을 잉태하는 시간이고 장소이다. 이 장소는 잃어버린 고향이자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열정, 그 비상을 위한 '오래된 미래'를 열어갈 메시지일 것이다. ● '웃는얼굴아트센터'개관을 위해 이루어진 '열정의 균형'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났던 권기철의 「무탄드」연작이나 '아담의 창조'를 재구성한 이태희의 「49 : 51」 그리고 타자를 통해 꿈에 대한 욕망을 투사하는 김건예의 코스프레, 실재와 환영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연주하는 김기수의 「MOON」과 「CUBE」연작, 잃어버린 장소에 대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황우철의 「오래된 침실」을 짧거나 긴 호흡으로 지나왔다.

이지영_untitle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10×165cm_2013
차규선_매화_캔버스에 혼합재료_227.3×181.8cm_2011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의 선율을 따라 흐르는 이지영과 차규선이 자연의 풍경을 필터링하는 시각적 감각의 살결을 느껴 볼 시간이다. 이지영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자연을 필터링한다. 이지영이 보는 자연은 「untitled」연작으로 이루어 졌다. 자연의 풍경에 개입된 인간적인 자연, 자연과 인간의 풍경이 나란히 삶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화면에는 익숙하지만 어딘지 정지되어 낯선 그림이 된다.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 발견하는 이국적인 풍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의 풍경도 아니다. 이지영이 그리는 사진 속 풍경은 마치 속삭이듯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이고 삶의 속삭임이다. 그 풍경은 나른한 오후 길을 잃고 들어선 작은 마을 어귀에서 자연과 더불어 있는 무심한 일상의 모습이다. 이 '무심'한 모습이란, 인위적인 욕망의 시선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동화가 이루어진 경계에서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에 있다. 마치 유(有)를 포용하는 공(空)의 시선, 정중동의 시선이자 중도적인 공의 풍경이다. 이를테면 유에 공이 있고 공에 유가 있는 유공(有空)의 중도(中道)를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이지영이 바라보는 풍경에 대한 시선은 자연과 인간이 화합하는 장소의 이면을 관찰하면서 소유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연', 가장되지 않게 공과 색의 경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절제된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 피고 지는 자연을 캔버스에 담아 생명감을 불어 넣는 차규선의 풍경은 자연을 그림으로 호흡하는 그의 회화적 방식이다. 차규선의 고향이기도한 경주의 산과 나무는 바로 자신의 삶의 풍경이다. 그런 풍경을 그는 스폰지가 물을 머금듯, 온몸에 담아서 다시 캔버스에 풀어 놓으면 제3의 세계, 산과 나무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풍경이 된다. 몸과 마음이 만나는 그의 풍경은 도자기를 빚는 고운 흙과 물감에 물을 섞어서 손과 붓으로 시작해 몸에 저장된 풍경을 낳는다. 아마도 그린다기 보다 어미 새가 새끼 새를 낳듯이, 가을 나무가 무성한 잡초들 사이에 떨어뜨린 씨앗이 다시 한그루 나무로 자라듯, 그는 피고 지는 계절 따라 새가 울고 꽃이 피는 풍경을 낳는다. 그가 낳은 풍경에는 차가운 겨울 속에서 앙상한 나무들이 하얀 눈꽃으로 쓸쓸한 감성을 자아내는 겨울정취가 있다. 단연코 으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풍경은 나무 가지 사이에 흰 꽃, 빨강 꽃, 노랑꽃이 피었다. 그 중에도 흰 꽃이 핀 나무의 배경을 하늘인 듯 파란색으로 그린 것은 마치 파란 꽃과 같아 보이는 심리적 효과를 준다. 이처럼 그가 캔버스에 담고 있는 자연의 풍경은 그의 감각에 체화된 회화적 리듬이고, 그림으로 피어난 자연의 정신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속에서도 바람 따라 물 따라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쓸쓸한 가운데 땅과 하늘을 잇는 차규선이 그린 산과 나무는 자연의 몸이고 정신일 것이다. ● 대구뿐 아니라, 국내외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들과 달서구의 새로운 미술 명소가 될 「웃는얼굴아트센터」의 개관전에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20년을 넘게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들과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립니다. 뜨거운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창작의 열정이 담긴 작품으로 「웃는얼굴아트센터」의 새로운 시작을 달서구민과 대구시민이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옥렬

Vol.20130831c | 열정의 균형 Balance of passion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