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82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류현민_장하윤_전동진_정지현_카와타 쯔요시
관람시간 / 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대구문화예술회관 DAEGU CULTURE AND ARTS CENTER 대구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Tel. +82.53.606.6114 artcenter.daegu.go.kr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박재환)은 8월 28일(수)부터 9월 8일(일)까지『2013 올해의 청년작가 초대전』을 개최한다. 지난 2월, 작가 공모와 엄정한 심사를 거쳐 회화(서양화․한국화)와 입체(조소․영상설치) 분야에서 선정된 신진 작가 5명의 작품을 한데 모아 대구문화예술회관 1~5전시실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류현민(영상․설치), 장하윤(회화․설치), 전동진(회화), 정지현(회화), 카와타 쯔요시(입체․설치) 등 5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류현민은 현실의 시․공간, 실재의 세계에서 이상을 꿈꾸고, 그로 인한 상실감이 작품의 근간이다. 작품에서 표현하는 의미 없는 행위는 사회성과 사회적 요구를 거부하고 개인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이며 개인의 실패와 불완전함 자체를 예술로 보여주고자 한다. ● "계획된 철없는 짓, 예상된 무모한 도전.실패라는 결말을 미리 계획한 듯한 작가의 쓸데없는 일련의 장난들, 행위들, 혹자에게는 소모적인 에너지 낭비들이 피식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그저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역설적인 면이 있다. 자동문 사이에 위태위태하게 놓인 우유가 담긴 컵을 사수하기 위해 작가는 좌우로 부단이 열심히 뛰고 있다. 하지만, 우유는 자동문 사이에서 처절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우유 컵의 최후는 마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존재하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에서 오는 상실감에 빠진 작가 자신, 혹은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 안에서 요구하는 삶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는 어느 누군가처럼 느껴진다. ● 작가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 또는 치기 어린 젊은 청년의 장난 정도로만 그렇게 조금씩 이렇게 세상에 훅(hook)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미학적인 이유라는 핑계로 거리를 배회하며 마주하는 공사의 흔적인 케이블 선 매듭을 모두 끊어 버렸다. 계속 반복되는 절단 영상과 함께 들려오는 절단음(切斷音)이 매우 신경을 거스른다. 누구에게도 의미 없을 행위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희화하면서 그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힘없는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속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들과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작가로서 이루고 싶은 이상과 그것을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으로 인한 괴리감은 상실감으로 나타난다. 사회 속 불완전한 존재로 자신을 희화할 수 밖에 없는 그는 장난 또는 철없는 뻘 짓을 예술이라는 숙명을 통해 소심하게 현실에 저항하는데, 이는 어쩌다가 지하철을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같은 무(모)한 도전의 유토피아와도 같다. ● 분명 불완전함이라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고, 완전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도 불완전한 존재로 신은 친히 아담의 갈빗대를 떼어 이브를 만들어 서로 의지함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류현민은 갈빗대 대신에 유머라는 가면을 쓴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뻘 짓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통해 작가로서 그의 연약한 면을 더욱 드러내며 예술가의 권위적 측면을 약화하고자 한다. 이는 작가로써 자신의 지위를 낮추고 작품과 관람자에게 상대적으로 그 권위를 넘기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는데 이는 마치 무한 도전 멤버들이 자신을 평균 이하로 자처하여 의도적으로 그 지위를 약화할 때, 시청자는 상대적 위안을 통해 잠시나마 완전함을 얻는 모습과 또 닮아 있다. (중략) ● 류현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실패를 계획한다. 실패 자체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을 때에는 더욱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실패가 무서운 이유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발적 실패 계획으로부터 그의 도전이 시작되는 데 있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아무리 실패를 하더라도 무한 도전을 통해 목표한 것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굳이 계획된 실패를 통해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산된 실패를 이루는 과정 속에 보이는 그의 뻘 짓과 철없는 짓의 결과는 넘을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한바탕 웃음 또는 피식으로 순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무엘 베케트는 그의 소설 '최악을 향하여(Worstward Ho)'에서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라고 말한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정 또는 인식을 통해 실패를 예견한 류현민의 행위와 기록들은 마치 실패라는 전제의 무한 반복을 통한 실패의 본질 자체를 조소하며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일종의 철든 뻘 짓으로 보인다. 이상을 좇든 또는 현실을 도피하든 그의 허무맹랑한 시도들과 자발적인 실패의 반복은 현실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한 생산적인 시도들로 사실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냉철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그 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관조하는 현실주의자인 것은 아닐까." ■ 박가희
장하윤은 집의 두 가지의 의미를 담는다. 첫째는 현대인의 내면에 있는 욕망이고, 둘째는 욕망과 갈등 가운데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말한다. 작가에게 집은 인간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는 것이자 타인과 관계 맺기 과정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 "(전략)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무의미함을 메우기 위해 부조리하고 급진적인 방식을 써서 무의미를 처단하고 그를 대신할 존재의 집을 구한다.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의 세계는 낮과 대비되어 꿈꾸는 '밤의 집'이 되는 것이다. 둘 다 낮에 비유되는 범속한 세계를 부정하고 보다 진실한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 장하윤 역시 밤은 휴식이자 무한으로 열리는 별다른 세계인 것 같다. 밤공기를 마시며 불 켜진 집으로 돌아가는 서정적인 작가의 심상은 세태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섞여 고유한 조형공간을 확보하는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해석을 덧붙여 밤의 집을 타인이나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매개체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이전의 작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실내공간에서 원근법의 극적인 효과는 이제 집 속의 실내를 빠져나와 밖에서 본 집을 담아낸다. 마치 카메라가 클로즈업에서 점점 뒤로 물러나 그 집 주변의 모든 풍경을 화면에 담아내듯 넓어진 조망으로 집의 외양을 담아내는 것이다. 집의 외양은 실내풍경에 적용했던 원근법처럼 극적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이를 조금 더 강화하기 위해 작가는 영상매체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극적인 해석은 표면의 형식적이고 조형적인 해법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말하듯이 자기 삶의 어느 시점에 우연적으로 발생되는 심리적 상황이 하나의 사건이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우연적인 사건들이 자기 작품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원동력이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작가 서로간의 소통의 언어를 만들게 하며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집」 연작 그리고 「밤의 정원」 연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밖에서 바라본 집의 외양은 이리 저리 합체되어 우주를 떠다니는 천공의 섬처럼 하나 둘 실내등을 켠 채 밤의 정원을 수놓는 우주의 별자리로 변모된다. ● 이상의 장면을 우리는 이번 「밤의 정원」 연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환영의 공간은 실질적인 공간으로 확장되고, 이를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판타지의 공간으로 다시 한 번 시선을 보충하고 있다. 불이 켜진 집, 윤곽을 과장하여 해석한 집, 어두운 밤 속에 박혀있는 집, 그리고 포장용기를 집으로 전환시켜 하나씩 들고 갈수 있을 것 같은 봉투 집들. 이 포장지 집들은 작가의 비판적인 시선이 보다 강하게 개입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에게 밤의 집은 세상과의 만남 속에 형성된 사건과 매듭을 타인과 나누는 매체(medium)이자 생산적인 소통의 은유인데, 이런 기능이 시장의 논리에서 사실상 정지되고 있다는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집은 과잉의 재화로 소모되거나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그로써 근본적 소외감을 조장하는 대상임을 작가는 환기시키고 있다. ● 작가는 대량생산되는 값싼 봉투의 외양에 집의 표식을 남겨 포장봉투를 집으로 전환시키고 그 안에 전등을 켜서 어둠 속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이를 한 공간에 수십 개 설치해 또 다른 밤의 정원을 구상하고, 이를 통해 관객에게 집과 밤의 은유를 하나의 문제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작가는 "집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집은 '나' 아닌 것과의 관계,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의 연결고리이며 그 무엇과 관계를 맺게 하는 '틈'이 되며,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조정해 사회화되도록 관계를 맺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후략)" ■ 남인숙
전동진은 '긋다와 반복하다'의 계획된 행위 자체가 작업의 모티브이다.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펜으로 선의 간극들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모노크롬 이미지를 구축한다. ● "(전략) 눈을 그의 화면 가까이 가져가면 중첩된 선들이 무수하다. 한발 물러나서 보면 단일의 선들은 유리되지 않는다. 서로 간 간격을 좁히고 뭉친다.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보면 반복된 선들의 조합이 뚜렷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부분과 전체는 어우러져 하나의 덩어리로 거듭난다. 모두 펜이 남긴 짧고 가는 선의 흔적이다. 흔적은 나무가 되고 산이 되어 공간을 형성한다. 그 시·공의 만남위에 한편의 자연경관이 탄생된다. 계획된 구도 안에 드러나고 묻히기를 반복하던 선의 축적은 철저히 계산된 노동이다. 노동집약적인 드로잉으로 나타난 풍경은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한 줄기 폭포수처럼 유려(流麗)하다. 이것이 이번 청년작가초대전에 전시될 전동진의 작품이다. ● 자연의 외관을 드러내던 그의 선은 우연성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보다 계획적이고 작위적이며 집적적(集積的)이다. 조형적으로 능동성을 갖는 그의 이러한 선에서 아르망 Armand Pierre Fernandez(1928~2005)의 행위와 신사실주의이념의 차용을 엿본다. 단순 반복적이며 계획적인 선은 개별적 기능보다 조합됨으로써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 긴장감 속에서 이미지가 탄생된다. 이렇게 축적되는 선은 많은 시간을 요한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이 노동의 시간은 공간을 낳고 공간은 사색을 머금었다. 일련의 작업 과정이 삶의 여정과 닮았다. 삶은 많은 것을 내포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서정성이 우선된다. ● 보편과 직관이 공존하는 전동진의 작품은 자연이 재현된 풍경화다. 그의 풍경은 서정적이면서도 사색적이다. 응축된 선들이 자아내는 잔잔한 음영처리가 한 몫을 더한다. 그 기운에서 형과 색의 관계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형이 더욱 선명해지는 까닭은 색을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색의 생략은 함축과 절제를 부각시키며 색채이미지에 반응하는 시각을 내적 정서로 안내한다. 생략된 색채와 일관된 터치 사이에 작가의 모던한 감성이 개입된다. 조형성에 개입된 감성은 그의 육안이 공간을 장악한 사물의 형상에 주목한 듯 하지만 그 이면으로 열려있음을 역설한다. 작가가 사물을 통해 표현하고자한 리얼리티는 내적 성찰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대상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이 역설은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씨실과 날실의 엮임 같은 부분과 전체의 조합을 본다. 이 조합은 자연만물 또는 세상이치와 닮았다. 이치가 그렇듯 시작은 늘 소소하고 미세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점과 선, 또는 획 하나가 모여 무리가 되는 과정, 육신의 구조가 DNA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부분과 전체는 서로 밀착되어있다. 전동진 작가는 캔버스 위에서 부분과 전체를 잇는 긴장감을 경험한다. 때문에 일획일사(一劃一思) 즉, 한 선을 그을 때마다 한 생각이 찾아들던 그의 선은 조형성을 넘어선 사유의 집적이다. 사색의 통로이자 몰입의 집결지다. 결과적으로 시·공이 교차된 선의 집적은 자연경관을 형성하지만 그 틈사이로 스민 사색이 삶을 기록한다. (후략)" ■ 서영옥
정지현은 수집한 오브제(생물)의 세밀한 부분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관찰해 미세한 부분에서 보이는 신비한 풍경, 새롭게 드러나는 미지의 세계를 표현한다. ● "(전략) 몇 년간 지속하고 있는 정지현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화면은 거대한 버섯, 브로콜리, 벌집, 만다린, 토마토 등 수분이 거의 증발된 주위에서 채집한 자연물의 섬유질을 해체하듯 화면 가득히 그 섬세한 인상들을 그려내고 있다. 화면은 실물크기를 벗은 신체적 반경의 사이즈로 재현되어 훤히 안팎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때론 화면 전체를 볼 수 있는 몰입의 사정권은 사진적 리얼리티의 감각도 체험케 한다. 이렇게 전시장은 거의 변변치 못한 것들과 작업실 구석의 흔적들이 시간과 주름의 사건들로 옮겨져 숲과 그 속의 풍경이 되어 정지현식의 잠재성의 '장filed'에 배치된다. ● 정지현의 화면 속에 채집된 시간과 퇴행적 주름들은 어떤 것일까? 또 그는 무수한 실제를 넘은 감각소여를 통해 보는 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그 삶과 몸의 대자對自에 흐르는 자연에 대한 감각이나 사물을 대하는 독특한 태態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와의 대화에서 유년의 시간은 촘촘한 자연의 풍경과 함께 그 숲이었고 숲은 현재의 섬세한 떨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자 커뮤니티며 매개자였다. 이에 자신의 몸에 기록된 자연관을 어떤 경계와 위치에서 사물을 우의적으로 바라보기를 즐기는 것이며, 그 엉켜진 숲의 여정에 관람의 시선을 그 몸을 이동에 따라 여행케 하는 것이다. 이에 그의 화면을 마주할 때면 거대한 사물이 아닌 풍경을 옮아 온 듯 장소로 변이되며 어떤 공간으로 읽혀진다는 것이다. 화면의 버섯줄기와 브로콜리는 거대한 산과 절벽의 풍경으로, 겹겹의 흔적이 쌓인 벌집은 거대한 떠있는 섬으로, 말린 만다린은 어떤 찢긴 블랙홀의 시공간처럼 마주하게 된다. 또한 그 시선의 손끝으로 확대된 거대한 화면들은 무수한 경계를 일탈하고 사물이 아닌 어떤 장소, 기억들로 안내한다는 것이어서 보는 자들을 어떤 일탈의 선에 위치시킨다. ● 또 그의 그림의 관람에서 변별력이 감지되는 특이성의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그가 화면을 감각하는 것은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며 생성과 해체가 반복되는 지속의 공간이다. 화면은 정지현식 감각 덩어리를 애무하며 사유하는 곳, 그 감각덩어리를 무수히 그리고 덧입혀 지우고 뭉개는 행위를 마크하는 일차적 영토이다. 이에 어떤 목적의 지점으로 향하는 형상을 얄궂게 배반하는 재현의 감각들이다. 사물에서 풍경으로, 풍경에서 숲으로, 통로 없는 숲을 이리저리 미로의 길을 열어놓아 끝내 다다른 지점이 정지현의 그림이 도착하는 곳, 또는 완성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정지현의 사이트에 서서 보편의 선험(브로콜리, 벌집, 만다린 등)들을 인식으로 해체해 마이크로의 눈으로 이행되는 섬세한 길들을 역추적 하는 것이 그의 화면을 천천히 관람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지현의 그림은 무수한 자기 해체적이다. 정지현의 그림은 일종의 동일자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 의미를 넘어 디지털론에 가까운 개념을 지녔다. 그리드형식으로 긋는 몇 개의 반복된 코드는 사물이 지닌 세부를 해체하고 영토화하여 그 미세한 세부의 존재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와해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욕망은 수많은 셀을 만들며 지루한 숲속을, 엉켜진 마른 섬유질을 통과하며 그 여정의 퇴행된 흔적만이 증식된 것이다. ● 정지현의 작업은 몸적이며 촉각적이다. 몸은 오랜 기억과 수행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라면 정지현의 화면들은 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그의 작업으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어느새 몸을 드로잉의 도구로 일치하는 순간 그 여정을 보는 이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지현의 작업들은 촉각적이며 그 느낌을 일깨운다. (후략)" ■ 김복수
카와타 쯔요시는 「분열, 팽창, 돌기」에서 평면, 도면이 3차원의 형태로 드러나게 하고, 각 부분을 팽창 또는 확장시켜 유기적 모습을 표현한다. 형태를 결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 "(전략) 카와타 츠요시에게 있어 작품의 의미는 오직 작업 안에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작품의 예술적 의미는 매우 제한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언된다. 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종속적인 결과다. 그가 생각하는 미술 행위는 예컨대 많은 화가들이 지켜온 회화적 전통을 작가가 완성한 작품의 공간 속에 물질화 시키는 일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 눈앞에 너무나 인상적이고 분명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재현 대상에 관하여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드물다. 작가는 이를 즐기는 듯하다. 또한 그는 파격적으로 보이는 자신의 작업이 실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같은 화가들로부터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감춰둔 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 현대 미술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다르게, 작품 외부의 총체적 의미를 축소하는 카와타 츠요시의 작가론은 내게 좋은 사회학적 탐구 대상이다. 현대 사회로부터 독립된 예술가 상을 세우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내게는 매우 적극적인 사회적 행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작품을 통한 사회적 발언이나 현 시대에 관한 조망권을 뽐내려는 야심이 없다(나는 이 점을 좋아한다. 한 획을 그어 세상 이치를 통달한 태도를 취하는 많은 작가들의 전략과 다르므로). 그는 자신의 미술을 연구와 수련의 매체로 삼아 서양 회화의 양식들-구도, 기법, 구조-에 응용한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혁신주의자보다는 전통주의자에 가까운 자세다. ● 전통의 축적이나 짜임새 있는 정리는 예술만큼 과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카와타 츠요시의 자기 기술을 따르자면, 그는 미술을 일종의 학문으로 정의한다. 예술과 과학은 엄연히 다른 기능을 가진 제도인 까닭에, 작가의 생각은 미술을 하나의 지식 체계로 접근하는 셈이다. 이 체계는 가령 신학적 지식과 같은 맹목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닌, 합리성과 논리성을 바탕으로 한 인과적인 인식이다. 작가는 작품 창작에서 순간적인 직관보다 꾸준한 연구와 실험에 더 의지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는 18세기 실증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작동방식을 주목하며 미적 형태의 일반론을 도출하려고 한다. 생명체 구조가 미의 완성을 위한 목적을 지니진 않는다. 하지만 그 자체가 관찰자에 따라서 충분히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는 있다(Roald Hoffmann의 소논문 「Molecular Beauty」(1990년 여름호,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가 밝힌, 유전 진화의 점진적 결과로 나타난 생물학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관점을 참조할 만하다). 작가는 생물의 세포 분열과 형태 결정, 성장, 병리 현상 등과 같은 패턴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미를 포착한다. ● 작가가 긍정하는 형태와 구조의 상동성은 단순하지만 강한 인과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생긴 것은 반드시 그럴만한 곡절이 있다.' 기계역학에서든 지질학에서든 생물학에서든 구조가 개체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보는 시각은 한편으로 뜬금없을지도 모른다. 관찰자의 눈에 비친 대상이 언제나 한 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친절할 이유도 없다.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독자적인 기법이나 메시지를 작품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카와타 츠요시의 작품과 외형상 비슷한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몇 명 있다. 물론 그들은 같지 않다. 카와타 츠요시의 작품은 조각에 가깝다. 하지만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회화다. 고전 회화 기법이 세웠던 합리성의 원칙 아래에 하나의 물건으로 존재하는 그림, 나무틀을 짜서 캔버스를 씌우고, 밑칠을 해서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해서 완성되는 절차는 지금 카와타 츠요시가 만드는 입체 작업의 노동과정과 다를 게 없다. (후략)" ■ 윤규홍
Vol.20130828e | 2013 올해의 청년작가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