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focus 2 머무름에 길든 시각과 사고의 어리석음에 관해

노천웅展 / NOHCHEONWOONG / 盧泉雄 / painting   2013_0821 ▶ 2013_0831 / 일요일 휴관

노천웅_af20130722_리넨에 유채_145.5×79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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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2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이마주 GALLERY IMAZOO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20길 12 B1 Tel. +82.2.557.1950 www.imazoo.com

 

2008년 어느 날, 시각적 판단의 한계를 깨닫고 불을 끄고 채색했었다. 작품을 준비하고 전시했었지만 전시장의 안전 때문에 결국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전시할 수밖에 없었고, 달빛 아래보다 어두운 실내에서 채색된 그림들은 전시장의 조명 아래에서는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

노천웅_she5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8

2010년, 시각적 판단의 한계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에서 / 시각과 사고는 관점에 빠지는 시각과 사고 스스로의 한계를 의식적인 판단으로는 극복할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 자주 '시각과 사고의 멍한 상태(초점과 관점을 거부하는 상태)'를 즐겼고, '양안시차를 가진 인간의 시각이 초점을 맞추는 과정'과 '인지되는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관점으로 추려내는 논리적 사고과정'의 유사성을 글과 작업을 통해 정리해 '멍(meong)'이란 제목으로 2인 전을 했었다.

노천웅_Just Feel(I have two eyes that never stop)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0

2011년 전시 Antifocus에서는 초점을 맞추는(관점을 쫓는) 것에 길든 시각과 사고의 한계성을 폭로하기 위해 중심 시야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고 주변시야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들어 초점을 맞추는 것에 길든 시각이 지향하는 이미지의 특성에 반하는 이미지를 표현했었다. '시각의 역현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한 작품을 모든 관객들이 추상적 이미지로 받아들였던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노천웅_af20110310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1

그리고 2013년, "시각과 사고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에 관해 고민을 이어왔을 뿐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내겠다는 계획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의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표현은 당연하게 스스로가 고민한 것과 일치하게 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일단 붓을 들었다. 5년 동안 200여점의 유화를 그렸고, 그 중 지인들에게 그냥 줘도 가져가지 않아 내 작업실에 남았던, 어쩜 나조차 관점에 길든 시각적 사고의 판단 탓에, 내게서조차 외면당했던 2011년에 그려진 한 작품에서 이번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터치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 그리고 학자들조차 놓치고 있는 고흐의 작품 속에서의 가장 강한 예술성(=인식 영역의 확장 그로인해 사고와 표현 또는 행위 영역의 확장 가능성)을 지닌 터치들을 이번 작품들의 배경에 활용했다.

고흐展_시립미술관_2008

초점이나 시선의 방향성에 길든 시각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위 그림에서처럼 고흐조차도 저 터치들이 갖는 에너지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 화면에 터치를 던지긴 했으나, 그 역시 저 터치들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없어 그림을 마무리시키지 못했던, 또한 현대 학자들조차 관점에 길든 사고 탓에 저 터치들의 진실을 간과하고 있어  한국의 '고흐전'에는 고흐의 수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러한 작품들을 보다 저렴하게 빌려와서 전시할 수 있었던, 초점에 길든 시각과 관점에 길든 사고로부터 외면당했고 외면당하고 있는, 하지만 이미 존재했고, 터치들 스스로 존재의 가능성을 처절히 외치고 있었던 저 터치들. 이번 작업은 내게서 비롯되었으나 내게서조차 외면당했고, 고흐에게서 비롯되었으나 고흐에게서조차 외면당했던, 너무도 본질적이기에 그 자체의 에너지가 강해 다른 터치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두 터치로 그려졌다. / 완성된 이미지는 초점과 시각의 방향성을 거부하는 이유로 사고까지 멍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생각이 비워지는 상태가 아니다. 인식되는 자극들이 하나의 초점과 관점을 갖는 논리적인 시각적 사고만으로는 정리될 수 없어 순간 혼란이 찾아와 당황하게 되는 상태이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작품 앞에서 단순히 생각이 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혼란을 거부하는 즉, 혼란을 지워버리는 것에 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간의 혼란을 피하지 않고 화면 안에서 시각과 사고를 잠시 가둬, 동시에 날아오는 많은 화살을 보는 것 같은 많은 자극을 그대로 수용하다 보면, 이를 경험하는 것만으로 머무름에 길든 시각(인식)과 사고를 자극시켜 시각과 사고의 자연 발전의 원인을 제공받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천웅_af20130702_리넨에 유채_91×116cm_2013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나조차 완성된 이미지의 느낌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하나의 터치가 그어지는 순간에 그동안의 모든 생각과 민감성(극도의 민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극도의 거침과 함께)은 그대로 녹아들었고, 다음 터치는 사고나 의지의 개입이 아닌 그저 이전에 던져진 터치에 오직 영향을 받으며 화면에 더해졌다.

노천웅_af20130806_리넨에 유채_145.5×79cm_2013

생각의 늪에서 사는 인간에게 개념과 의도를 가지려는 노력이나, 생각을 더하고 다듬으려는 애씀은 필요 없다. 오늘 생각의 늪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면 내일의 나는 그 자체가 완벽히 걸러지고 다듬어진 Concept의, Intent의 덩어리다. 판단하고 결론내리는 사고는 고작 20만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어떤 기원물질에서 비롯되어 나라는 존재까지 이어져온,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그 기원물질들의 파편들은 지구가 탄생한 40억년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최고의 효율성을 선택하는 진화라는 법칙에 따라 스스로(기원물질의 파편)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구조화된 존재를 발전시키며 나에게까지 이어져왔을지도 모른다. 즉, 나는 나의 감각과 사고와 더불어 인식과 의식의 한계 밖에서(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서 여전히 존재하며) 나를 이끌고 있는 그 기원물질의 파편이란 존재의 효율성을 인식했었고, 어느 순간부터 관점이라는 방향성에 길들지 않은, 그래서 시각과 사고보다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그 존재의 의지에 귀를 기울여 왔다. / Dadaism? 다다는 반발과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나의 예술은 나를 비롯한 현상과 대상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의지로 시작되었다. 내게 그 틈은 거대했다. 내게 예술과 철학의 본질은 이해였다. 삶의 가장 큰 행복 역시 깨달음이란 거대한 이해에 있었다. 예술 행위는 나란 존재를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어떤 꾸밈도 없이 나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보다 오해에 익숙하다. 착각과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낭비, 그로인한 비효율성. 착각과 오해는 바로 머무르는 시각과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 나는 오늘도 진실을 그대로 느끼기 위해, 오직 나의 민감성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인식 요소들의 소나기를 그대로 맞아서기 위해 나를 벌거벗겨 길가에 세운다. 지켜온 정직과 순수와 민감성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는 거리에서 혼자 비를 맞으며 때론 비웃음을 당했고, 때론 나조차 불확실성에 떨리는 내 몸을 주체할 수 없어 비를 피하고자 할 때, 발전을 위한 혼란의 당위성에 대한 되뇜으로 내 안에 불안과 두려움을 빗물과 함께 대지로 흘려보내며 그 순간들을 이겨내고 환호했다. 그리고 나는 어릴 적 그리도 꿈꾸던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편견 없는, 하지만 타협을 모르는... / 너무도 본질적인 그래서 너무도 당연하기에 비판 받을 수 없었던 세계, 그래서 너무도 평범하지만 너무도 방대한 스토리가 필요했던, '닿을 수 없는 본질을 향한 항해'에서 나는 드디어 새로운 섬(island)을 만났다.  ■ 노천웅

Vol.20130821c | 노천웅展 / NOHCHEONWOONG / 盧泉雄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