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816_수요일_06:30pm
참여작가 구제철_권영오_김기래_김승혜_김준성_김태은_김홍기 김화성_노기훈_박균열_성대석_신경옥_신동헌_신문식 신운섭_안우동_유광식_유덕기_유운선_유진성_이동주 이문호_이상봉_이수연_이연실_이연옥_이윤도_이재훈 이주형_이형교_이호진_이희연_임기성_장덕윤_장수선 정은진_조인식_천호선_황태경
후원 / 인천문화재단 주최 / 사진공간 배다리 기획 / 이상봉_이영욱
관람시간 / 01:00pm~06:30pm / 목요일 휴관
사진공간 배다리 갤러리 BAEDARI PHOTO GALLARY 인천시 동구 금곡동 10-12번지 Tel. +82.10.5400.0897 www.photobaedari.co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빔 SPACE BEAM community 인천시 동구 창영동 7번지 Tel. +82.32.422.8630 www.spacebeam.net
아벨 전시관 인천시 동구 금곡동 13-1번지 Tel. +82.32.766.9523
한점갤러리 인천시 동구 창영동 15-7번지 Tel. 010.2778.0268
뫼비우스-띠갤러리 인천시 동구 창영동 15-2번지 제1동 107호 Tel. 018.322.9259
배다리 모닝글로리 인천시 동구 금곡동 33번지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 문제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숭배자로서의 사진가에게는 폐허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그 현장은 마치 사진가들의 성지순례장소처럼 보인다. 사진가들은 이제까지 여러 재개발현장을 어김없이 배회해왔다. 그리고 폐허는 순례자로서의 사진가가 접신(接神)을 하도록 만들었다. 사진의 생생함은 폐허를 더 폐허답게 만든다. 이는 죽은 것을 되살리는 역설이다. 사진의 세계는 사라진 것들을 유령처럼 되살린다. 죽어야 할 것들이 되살아나는 실재없는 현존의'날것'이다. 폐허이미지에서 대개의 사진가들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라지는 흔적의 미학이다. 현장은 사진가의 미학적 코드와 결합한 시대의 사건으로서 기록의 욕망을 부추긴다.
본 전시는 뉴타운 건설에 직면한 인천의 재개발지역에 주목했다. 경제개발논리로 사라질 폐허된 풍경에의 관심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각자의 오브제를 발견하게 했다. 버려진 혹은 남겨진 오브제를 발견한 사진가의 시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사진가들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라난 '나'로 하여금 사라지는 공동체, 존재가 망각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만든다.
시대마다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흔적조차 부정하는 획일적 개발의 논리는 미아(迷兒)가 되는 죽음과 상당한 연결고리가 있다. 여기 이 사진 속 풍경들은 이제 현실에 없다. 글을 쓰는 지금 이미 사라져버린 뒤일 것이다. 현실의 폐허는 개발에 떠밀려 깨끗이 치워졌다. 아니, 진짜 폐허는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전의 사진들은 마치 가상의 이미지 같다. 불길함과 슬픔의 감정을 끌어내는 이 풍경은 결국 유령을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다.
폐허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 고대로부터 이어진 폐허의 유적은 삶의 흔적으로 보존되지만, 현대도시의 폐허는 결코 그런 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현대적 재개발현장은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진행된 노화가 아닌 일순간에 행사된 인공적 폭력과 파괴의 산물이다. 오늘날 빈번히 목격되는 폐허의 사진이미지들은 자본의 폭력 앞에서 무능력한 주체, 사그라진 삶의 터전에 대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폐허의 사진이미지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이 과연 노스탤지어에 빠진 주체의 무기력함뿐일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폐허 속에서 비로소 그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이 꿈 역시 시대가 부른 것이다. 전시는 도시의 은폐된 욕망들이, 폐허의'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욕망에는 모든 것이 다시 폐허로 돌변할 수 있다는 불안 역시 내재되어 있음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폐허된 대상은 언제든 우리의 삶 또한 폐허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현대도시는 희망찬 미래를 추구한다는 착각 속에 새로운 건축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며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그렇게 또 다른 폐허가 중첩된다. 인천의 뉴타운 프로젝트, 새로운 건축도, 개발논리의 힘의 잣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도시의 건축은 일회용품처럼 소비되며 늘 폐허될 운명 앞에 있고, 결국 우리가 이 도시에서 꾸는 꿈 또한 그 불안 속에 존재한다.
자기 투사 이미지 ● 사진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미지와 같다. 우리는 작가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금세 대상 속으로 몰입한다. 하지만 그 몰입은 어디까지나 대상에 반사된 자기투사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진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살았던 공간들이 폐허된 현장에서, 스스로'나'에 관한 물음을 던지도록 만든다. 이는 달리 말해, 작가는 대상을 보여주는 일에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작가는 통제불가능상태의 어떤 모습(의도하지 않은 대상의 흔적)이 카메라 앞에 노출 되게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아래 본 프로젝트의 참여작가들은 사진예술가의 입장이 아닌 사건현장을 방문한 탐험가, 수사관, 고고학자와 같은 입장을 취해보기를 제안 받았다. 기획자는 그로 인해 통제되지 않는 형상의 범위들까지 가시화되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간과해온 건축물의 양식, 다양한 모습으로 폐허화된 현장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취향, 삶의 세부흔적이 포착될 수 있도록 말이다.
본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폐허현장의 대상에 속하며, 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진을 사용한다. 사진은 일차적으로 이미지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포착한 일종의 오브제와 같다. 전시의 포커스는 사진가 각자에 의해 발견된 폐허 속 대상이 사진매체와 어떻게 접촉하고 또 어떻게 전시라는 형식과 연결되는지에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전시배치를 통해 그 의미가 생산되고 보여질 것이다. ● 정확히 부분적인 세부들은 징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 속 무언가를 결코 다 보지는 못한다. 세부적인 대상들은 내 의도에 따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포착돼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무엇에 대한 흔적이다. 그래서 사진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대단히 가식적이다. 그것은 피사체가 어떤 포즈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물은 특정한 주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끼자마자, 의미의 빛 속에서 포즈를 취한다. 여기서 사진의 근본적인 멜랑콜리가 발생한다.
폐허의 사진을 볼 때 모든 것은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그저 감상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 틀림없는 초 현실이다. 차라리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폐허를 간증하는 사진들은 그 속성상 '한 때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만, 그곳이 폐허가 된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폐허사진이 주는 심미적 효과에 주목 할 수밖에 없다. 사진에서 폐허의 미학은 멜랑콜리 환상에 의해 매혹되나 계속해서 대답 없는 질문을 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가? 어떻게 마을전체가 송두리째 굴복하고, 사라지게 되는가? 그리고 어째서 세상은 이러한 붕괴에 그토록 취약할 수 있으며, 사라짐에 쉽게 매혹되는가? 뒤이은 질문도 있다. 이렇듯 폐허의 사진이 주는 매혹이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로 치부되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로부터 다시 진정 신비로운 질문이 솟아난다. 폐허의 사진, 정확히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불과한 사진을 통해 어떻게 시대를 고발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 나 없이도 지속될 세상에 대한 깊고 오랜 환상을 품어오지 않았는가. 인간을 떠난 세상, 인간적 의지에서 벗어난 세상, 우리가 없는 그 세상을 보고자 하는 유혹을 느껴오지 않았는가.
똑바로 볼 수만 있다면! ● 폐허사진 속에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사라질 수 없는 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대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다. 바로 개발논리의 환상,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a) 속으로. 그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우리는 도시가 과거에 꾸었던 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에 투사하여 되돌아 볼 때에만 비로소 그 꿈이 어떻게 변질되었고, 또 무엇 때문에 악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폐허의 이미지는 우울한 감정을 동반하는 한편 미래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어쩌면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영혼회귀일 것이다. 도시개발의 논리에 의해 옛 것이 사라지고 새롭고 편리한 문화가 제공된다는 환상은 폐허 된 과거 도시의 집들이 세워질 때에 역시 기대되었던 바이다. 내 삶의 흔적을 밀어낸 개발이 더욱 세련되고 좋은 것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환상, 이것이 판타스마고리의 주문이다. 허황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그 주문의 경계 안에 있는 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탈출을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이란, 나를 응시하는 사진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시선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는 끊임없는 생산과 동시에 폐허를 만드는 시대다. 상품들은 채 다 쓰이기도 전에 또 다른 상품에 의해 폐기당하며, 새로운 건축물 또한 머지않아 그와 같은 용도 폐기의 운명을 안고 있다. 언뜻 발전을 거듭하는 시대 같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신화이며, 반복적 욕망과 환상인 것이다. 이를 순응한다면 우리는 그 대가로 현실공간에서 자신의 삶의 흔적을 포기하고, 지워내야만 한다. 판타스마고리의 주문으로부터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 주문의 영향 아래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폐허사진 속 공간에 자신을 투사하고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주문으로부터 탈출하기에 좋은 부적 하나를 얻게 되는 셈이다. 내 기억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꿈을 담보물 삼아 미래에 대한 허황된 환상을 투사할 것인지, 욕망의 투사일 뿐인 마술적 환상의 주문으로부터 깨어날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에 달렸다. ■ 이영욱
Vol.20130816a |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Object Found in Ruin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