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책임기획 / 김숙경
The Flag Station, Media Art展 2013_0802 ▶ 2013_0815 참여작가 / 김해민_노승복_황은옥
The Flag Station, Painting展 2013_1025 ▶ 2013_1107 참여작가 / 박용일_이보람_이종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 The Flag Station, Media Art展 기억과 반복의 커뮤니케이션 ● 의미가 정보가 될 때, 의식이 기호가 될 때, 그리고 삶이 관찰의 대상이 될 때,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객관적 지표들을 통해 이해 가능한 형식적 질서의 수량적 표상들이 된다. 이처럼 근대적인 기능적 관점에서 비롯되는 태도의 외면화 과정에 관한 설명에서 기억의 운동성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과의 관계와 기억이 심리적인 층위들을 극복하고 표면화되는 발현과정 자체는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의 욕망과 존재의 원초적 기억이 타협을 통해 사회적 수용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망각 속에서 기억을 건져내 의미를 성취하려고 하는 자기 충족의 과정에서 소위 비판적 반성의 과정이 작용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미디어 아트 이전의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의 특성을 규정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다양한 구조적 양태들의 속에는 망각과 욕망과 공포와 같은 것들이 외면할 수 없는 심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소박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은밀한 욕망 속에는 자신이 상실하거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소망충족의 보상심리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가운데 생장하는 욕망의 다양한 분지들은 개인적 행위의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과 타협의 지평 위에 불안정하게 부유하게 된다. 미디어의 속성은 이 세계의 많은 사건들을 정보라는 가치를 생산하는 소스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미디어가 정신의 차원에서조차도 이 세계를 기계적인 명확성을 가지고 조직화 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상식적인 관점과, 이 세계가 해체되어 기술을 통해 유토피아적 형식으로 재구조화 될 수 있다는 기술지향적인 관점이 실재의 요소들과 충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우리의 삶을 역사적인 가치 안에서 양적으로 색다르게 정초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계를 완전히 다른 양태들로 변화시킨다. 이는 자연의 진화라는 시각에서 선험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의 속성들을 존재의 기원에 대한 절대성과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의 차원을 분리시켜 바라보는 태도를 유비시켜 성찰해 볼 수 있는 문제로, 미디어는 더 이상 개별적 영역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독립적인 완전성보다는 이 두 차원의 연결을 통해 새로운 양태의 인식론적 구조틀을 만들어내려는 융합적인 가치들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차원의 미래는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고, 그 경험의 속성에 관한 논의는 어떻게 그런 경험들이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들과 관련된 인식론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황은옥의 작품 「Joksil, 2013」에서 우리는 밀실공포증을 연상시키는 협소한 공간이라는 장소성,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자신의 환경으로부터의 소외와, 소외로부터 소통을 회복하는 방식에 대한 암시를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외부에 대한 정보를 시각과 청각을 중심으로 획득하지만 시청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는 단절의 순간에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촉각과 후각 같은 다른 감각들이 시청각의 부재를 대신함으로써 부재의 공포를 탐색의 적극성으로 대치시킨다. 황은옥이 그녀의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들이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는가의 문제로, 관찰의 관점에서 체험의 관점으로 변화되는 상황(감각의 변화는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잠시 동안은 놀이의 규칙이 되기도 한다)을 대중 퍼포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 자신이 조성한 환경(작품)에 참여한 그들의 반응이 어떻게 미디어라는 결과물을 통해 작품으로 성립되는가와 같은 비판적인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황은옥은 존재의 가능성이 추구하는 진화의 또 다른 양태들(미디어를 통한 참여와 체험)을 작품의 모티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동영상 미디어라는 것이 어떻게 미학적 차원을 구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그녀는 외부와 분리된 환경 속에서 감각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제시함으로써 소통에 관한 문제를 감각과 욕망의 근본적인 차원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작품의 미학적 차원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디어에서 욕망의 치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은 무엇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삶의 다양한 가치들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욕망들을 어떤 형태를 지닌 것으로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인터넷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상거래 행위로서 수용하고 대가를 지불해온 컨텐츠는 포르노 산업이었다. 노승복은 이번 「무제, 2013」작품에서 원시적 욕망의 거래행위를 그녀의 동영상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면 속의 작가는 포르노를 본다. 그리고 그 포르노를 보는 안경 쓴 눈을 클로즈업해서 마치 검열의 상징처럼 희미한 소리와 안경 렌즈에 비친 희미한 동영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미디어는 소통의 기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성행위 장면들과 욕망이 직접 만나기 때문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의 관음증과 그 관음증적인 상태를 바라보는 관객이 만나지만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바라보는 시선은 성에 대한 원시적인 욕망의 보편적 흐름 속에 소멸되어 버린다. 관객의 욕망은 작가의 욕망을 통해 검열을 당한다. 말하자면 작가가 바라보는 포르노의 시선은 관객에게 포르노를 욕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린 동영상과, 그 동영상 속의 주인공인 작가의 눈이 포르노에 반응하는 장면을 갤러리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시선에 반사되어 관객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자기검열의 상태로 몰고 간다. 이런 면에서 노승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의해 반추되는 개인과 사회라는 심리적 경계상태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하고 있는 것이다. ● 두 작가의 작품(황은옥의 퍼포먼스의 기록 동영상과 노승복의 동영상 작품)에서 소통과 욕망의 기술적 언급들이 개념적인 상황들을 지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미학적 단계를 성취하려고 하는 노력이 보여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이 두 작가의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특성은 존재의 위상 학에 관한 문제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스캐닝의 차원으로 사물의 표면을 포착하고 그 표면의 조합을 통해 드러나는 형상이 내적인 속성들을 언급할 수 있게 해준다는 면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에서 편집이나 기술적인 장치들을 통해 해리포터적인 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태도와는 달리 외면적인 형상과 내용의 해석을 통해 본질적인 것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철학적인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반면에 김해민의 작품은 미디어의 기술적인 차원들에 충실한 작품이다. 「옛날 옛적 판문점에, 2013」는 6.25 전쟁을 겪은 한 노인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한국의 예언서들을 통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된 영상에서 노인의 기억은 이야기를 통해 부활한다. 그 기억들은 예언서를 통해 그가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으며, 예언과 관련되어 풀이되는 언어들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 될 수 있는가의 관계를 기의 적으로 지시한다. 작가는 이 영상에서 텍스트적인 내용들, 말하자면 기표의 기의적인 해석과정과 노인의 기억이 이야기를 통해 전개되는 의미화 과정은 기표의 기의화 과정이라는 차원에서 관객과의 소통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텍스트는 인간의 사고를 자유롭게 해준 반면에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는 존재라는 강박관념 속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상상력이 텍스트에 의해 검열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역사시대 이후 텍스트는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미디어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기술되는 정보들(사회적으로 공인된 가치를 지닌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은 마치 경전과 같이 인간과 자연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언어 이후의 미디어의 기본적인 가치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텍스트가 일방적인 정보 전달의 매체였던 반면에 영상에 의해 기록되는 구술적인 차원들은 대중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공간을 주기 때문이고, 대중들 스스로에 의해 수정이 가능한 정보가 됨으로써, 특정 저자가 아닌 집단지성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 텍스트가 기억을 정제하는 역할을 하고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면, 기억 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반복적인 특성을 보이면서도 스스로의 상상력을 가지고 감각적 차원에서 새로운 진화 상태를 결정하는 광범위한 소스들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김해민 작품의 영상이 환기시키는 것은 단순히 한 노인의 기억이라기보다는 그 노인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의 흐름에 관한 것이다. 20세기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와 한국전쟁 을 겪은 부모를 가지고 있는 세대들은 대다수가 부모들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했고, 부모들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생생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이미지들은 아니지만, 한 인간이 스스로의 경험을 이야기화 시키는 과정에 대응하여 재생되는 상상력이 작용할 수 있는 기억의 창고이고, 구술적인 문화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적인 상상력과 인간의 기억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와 같은 구술적인 상황들은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라기보다는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혁신될 수 있었던 구술문화의 확장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 결국은 21세기 미디어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라 소통이다. 특히 미디어 아트는 소통과 참여와 글로벌이라는 차원을 아무런 경계 없이 포용할 수 있는 미학을 추구한다. 물론 기술적으로 표준화된 디지털 코드의 집합적인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런 기술적인 언급들을 넘어서는 예술적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한 차원들이 미디어와 결합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새로운 관점과 진화 상태를 제시하는 것이다. 텍스트 문화의 의미는 기호를 창조하지만 21세기 미디어 아트의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용도
■ The Flag Station, Painting 현실을 보는 눈, 현실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세 갈래 시선 ● 현실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는가? 변하고 있다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이전에 작가들은 현실에서 시작해 재차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작가들은 가상현실(아님 대체현실?)을 전제하기 시작했고, 현실을 가상현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작업환경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로. 현실인식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로 채워지고(아님 아예 대체되고), 덩달아 창작 역시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술이 된 것일까. 현실이나 가상현실 모두가 현실이고 현실인식으로 볼 수가 있다면, 현실 내지 현실인식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까. 여기에 현실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아님 포개지면서 차이 나는 세 갈래 시선들이 있다. ● 이종구. 다른 사람들이 도시의 현실을 그릴 때, 이종구는 농촌의 현실을 그렸다. 정부양곡 종이부대에 그림을 그렸고, 쌀자루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전상서와 월급봉투를, 무슨 철새나 되는 것처럼 잊힐 만하면 찾아오는 정치인들의 찢겨진 선거 포스터를 그렸다. 농촌의 현실을 증언하기 위해 그림과 함께 오브제를 도입해 실감을 더한 것. 그렇게 오지리 농부들의 삶이며 일상을 그렸고, 그들과 동고동락했을, 그네들의 살림밑천이면서 살붙이이기도 했을 소를 그렸다. 존재에겐 존재다움이 배어들고, 농부들에게선 농부다움이 묻어 나온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입었던 꽃 분홍 문양이 프린트된 몸뻬 바지를 빨면 분홍색 물이 묻어 나오고, 파란색 바지를 빨면 파란색 물이 묻어 나온다. 아마도 농부 자신을 빨면 흙물이 묻어나올 것이다. ● 그 농부들의 들녘 위로 세계 최대의 항공사인 텔타 항공 소속 여객기가 날아오르면서 동체보다도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는 대개 전운과 전조 그리고 암운과 같은 좋지 않은 기운을 동반하고 암시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텔타 항공은 무슨 좋지 않은 기운이라도 몰고 오는가? 세계 최대의 텔타 항공기 밖으로 세계 최고의 기동 타격대 텔타포스의 낙화 꽃이 흩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 동안 같으면서 다른 하늘에선 철새들의 대오가 또 다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과는 무관한(?) 농촌 들녘의 아침을 깨운다. 그렇게 작가는 오지리 농부들을 그리고 농부들의 들녘을 그리면서 그 들녘에 포개진 미국의 그림자를 그린다. 아마도 한미연합훈련을 그린 것이거나 그로부터 착상된 것을 그린 것일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때로 한미관계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 현실적이고 실감할 때가 많다. 그렇게 실감나는 현장 중 하나가 황해에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황해의 수평선에 맞춰 가로로 뉘어 그렸다. 이렇게 누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보루 내지 마지노선 같고, 철거되어야 한다는 코멘트 같고, 한미관계가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수평적인 관계로 고쳐져야 한다는 제스처 같다.
박용일. 작가는 재개발건축현장을 그린다. 왜 하필 재개발건축현장인가? 재개발건축현장은 작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풍경-바람 시리즈, 어수선한 풍경 시리즈, 종이배풍경 시리즈, 그리고 목련이 피기까지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줄곧 풍경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은 언제나 자연풍경이 아닌 재개발건축현장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담벼락에 빨간 페인트로 넘버링 된 어수선한 풍경 위로 바람이 분다.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 법칙의 바람이 불고, 살가운 삶의 풍경을 일소하고 천지개벽하는 광풍이 분다. 작가는 무슨 떡시루처럼 생긴 스트라이프 줄무늬의 가림 막 사이로 그 광풍이 흩어놓은 삶의 흔적을 본다(재개발현장을 임시방편으로 덮어서 가리는 가림 막과 타폴린 천은 그 이면에 도시의 부도덕과 불합리를, 폐해며 폐부를 숨긴다). 그 흔적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흔적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도(그리고 잊혀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작가는 그림 속에다 종이배를 슬쩍 밀어 넣는다. 종이배는 한때 그곳에 살았었을 사람들의 삶이며 꿈을 싣고 희망의 나라로, 좀 더 살만한 나라로 항해중이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광풍은 종이배라고해서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일소된 삶의 풍경이며 광풍에 휩쓸려간 종이배의 형해 위로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목련이 피는데, 세상사에 무심한 개화여서 더 화사하고 더 처연한 느낌이다. ● 미셀 푸코는 있으면서 없는 장소,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들지는 못하는 장소, 그래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소, 잠정적인 장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장소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군대와 감옥, 기숙사와 정신병원을 포함시킨다. 여기에다 재개발건축현장을 더할 수 있겠다.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이며 이행 중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장소 혹은 초장소에선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온갖 억압의 계기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인다. 억압의 저장고(폭탄?)라고나 할까? 그래서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의 계기를 본다. 어수선한 풍경이며 일소된 삶의 흔적 위로 흐드러진 개나리며 진달래며 목련의 개화를 이런 혁명의 메타포로 볼 수가 있을까? 아님 그저 세상사와는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한 자연의 본성을 확인시켜줄 뿐인 걸까.
이보람.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싫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윤리적 공감이며 참여적 연대를 호소해오는 것과 같은 양심에 가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인식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혹 불편하거나 불쾌해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예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이미지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좋다. 현실이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미지가 유해하거나 적어도 직접 해를 가해올 일이 없기 때문이며,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이 나의 현실이 아닌 너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너의 현실은 구체적 현실이 아닌 추상적 현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관한 한, 그리고 너의 현실에 관한 한 그 이미지며 현실은 폭력적일 수록 좋고 자극적일 수록 좋다. 너의 현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헤매는, 기꺼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줄 준비가 돼 있는, 권태와 무의미로 무장한 타임킬러인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구실이며 스펙터클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런 인식도 건드린다. ● 현실은 경험으로 축조된다. 그렇게 축조된 사람들의 현실은 좁다. 생활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좁아진 바운더리를 인식으로 채우고 확장한다. 현실인식은 직접경험으로부터도 오고 간접경험으로부터도 온다. 직접경험이 만들어준 현실인식의 영역은 자꾸 좁아지고(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권이 가속되고), 간접경험에 의한 현실인식의 범주는 점차 확장된다. 그래서 종래에는 마침내 간접경험에 의해서만 현실인식이 축조되고, 현실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한 인식만으로 대체된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현실을 현실 자체로서 경험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경험한다. 현실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을 본다. 이미지의 눈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것. 물론 현실과 현실이 반영된 이미지는 다르고, 앞으로도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공연하게는 이미지를 현실이라 생각하고, 현실을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미지는 현실인식을 삼키고 현실 자체를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작가는 바로 이런 문제 곧 사람들이 어떻게 이미지(그 자체 현실이 된)를 소비하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불현듯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 대한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소사이어티가 생각난다. ■ 고충환
Vol.20130810f | The Flag Station 2012'-2013'-2013년 쿤스트독 연례 프로젝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