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축된 사史

연기백展 / YUONKIBAIK / 延伎栢 / installation   2013_0810 ▶ 2013_0901 / 월요일 휴관

연기백_인왕산이 보이는 남쪽 창이 있는 방_도배지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연기백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810_토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화자(話者)의 선동을 치유하는 청자(聽者)의 미학 - 겸허함의 자리, 청자(聽者)의 미학 ● 연기백이 멈추어 서서 소통하고 사유하고 싶은 대상은 '주변으로 밀려난 잉여의 것들'이다. 그 사물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뜯어진 도배지, 버려진 샹들리에와 풍금... 그것들에 부여됐던 기능적인 시간은 끝났다. 그것들은 더 이상 유용한 물건이 아니다. '사용불능' 이나 '폐기'로 명명되는 것들로, 비로소 유용성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것들이며 유기됨으로써 자유로워진 반정립의 사물들이다. ● 사실, 이 시대를 훨씬 더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건 백화점을 가득 매운 '생산된 것들'이 아니라 소비되고 버려진 것들이다. 양(量)적으로 뿐 아니라, 질(質)적으로도 버려지고 유기된 것들이 더 잘 이 시대의 자화상을 구성한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미국의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쓰레기 매립지 프레쉬킬스(Fresh Kills)일 것이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어마어마한 버려진 물건들뿐인', 이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산은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길고 자유의 여신상보다 25미터나 높다. 이 시대는 생산하는 시대 이상으로 폐기하는 시대이고, 새로운 사물의 시대가 아니라 폐기된 사물의 시대인 것이다. ● 그럼에도 연기백이 버려지고 유기된 것들을 '가장자리'로 정의한 것에는 그의 도적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이 시대가 그토록 버리는 시대인 이유는 소비, 곧 사용 관계에 있다. 연기백이 반정립을 분명히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물건을 대하는 것은 소비하거나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그것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대화, 곧 지속적인 주고받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들려주는, 소비나 사용의 차원에선 결코 제공받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백_농축된 사史展_자하미술관_2013

연기백은 언젠가는 폐기되고야 말 것들-우리가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것들도 포함해서-, 잠정적으로 보류되어 있을 뿐 이미 예고되어 있는 미래의 폐기물 몇 개를 추가하는 것엔 별 관심이 없다. 이는 서구의 낭만주의로부터 발아한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창작태도다.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맥락 안에서 예술은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연기백의 예술론을 대뜸 뒤샹(M. Duchamp)적 개념주의에 귀속된 것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발견된 사물'로부터 출발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포함하는 연기백의 작업이 자신의 신체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것들을 예술품화하는 레디-메이드 미학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적어도 형식의 측면에서 그것은 타당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기성품, 곧 사물을 대하는 태도,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연기백의 입장은 뒤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연기백에게 샹들리에와 풍금은 단지 발견된 임의의 사물이거나 우연히 입수된 중립적 대상 이상이다. 여기서 작가는 돌연한 개입으로 사물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는 작은 조물주가 더 이상 아니다. 새로운 상호성에 의해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 사이의 대립이 현저하게 완화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미학은 전적으로 독일 낭만주의의 산물인 반면, 연기백의 가장자리의 사물들은 낭만주의 미학에 거의 빚진 것이 없다.

연기백_샹들리에 공간 이용 방식 두 번째_단채널 영상_00:10:00_2013

연기백의 '가장자리의 미학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태도가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 담겨진 흔적, 시간의 이야기, 역사다. 여기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어떤 위상( heirachy)적인 질서가 아니라 관계다. 연기백은 버려진 풍금이나 방치된 샹들리에를 자신의 초월적 인식에 복종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예술이라는 신화로 재구성해내는 조물주 흉내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만들어내지 않는다.' 정의하거나 주장하지도 않는다. 웅변이나 선동은 분수를 모르는 부끄러운 짓일 뿐이다. 그는 오히려 그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者)'의 겸허한 자리에 남는다. 그 잠잠함, 겸허의 자리, 청자의 미학이 연기백의 세계의 지평이다. 그의 작업과정은 도처에서 위대한 예술의 세속주의적 신화와 불화(不和)한다. 그의 재료들은 구매된 것들이 아니라, 거리에서 줍거나 전에 살던 집주인으로부터 무상증여 받은 것들이다. 고도의 창작행위는 뜯어내고, 나열하는 등의 단순한 행위로 재정의된다. 통상, 기발한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요구되는 지점들은 최대한 절제되거나 아예 만들어내지 않는다. 결과물도 장식적인 멋 부리기나 윤기와는 거리가 멀다. ● 그렇더라도, 이 세계가 수동적이거나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재화된 약동, 함축된 역동이 오히려 이 작고 소박해 보이는 세계의 진실이다. 이 세계의 느슨한 맥박 속에서는, 그러나 낭만주의의 미학적 맥락에 대한 급진적인 반동의 맥박이 분명하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연기백_남겨진 (   )_혼합재료_3×10.5×5.5cm, 3.5×7×14.5cm_2013

'위대한' 예술의 덫에 걸리지 않기 ● 연기백은 꽤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의 시도는 주관미학의 심층부를 겨냥하고, 그 공허를 거부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낭만주의 미학의 요람이자 강령으로서, 작가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궁극, 곧 '나의 작업', '나만의 기법', '나의 노동', '나의 신념'을 벗어나는 것이다. " '나'의 작업을 위해, 특별히 '나'만의 기술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작품의 완결을 사뭇 다른 것으로 정의하도록 만든다. 연기백은 자신의 작업이 어떤 궁극적인 완결에 도달하는데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에서 최종적인 생산에 이르기까지 어느 단계도 '소유'하거나 '점령'하지 않는다. "나는...잠시 있던 것을 빌려 사용하고, 어느 순간에라도 손쉽게 원래 자기의 순환과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 나는 이 지점이 가장 자연을 담아내는 작업방식이라 여기고, 이것이 가장 일상과 가까이 있으면서 일상을 다시 보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기백)

연기백_인왕산이 보이는 남쪽 창이 있는 방_부분

연기백의 세계에 흐르는 조형의 태도는 '미(美)의 정수를 꿰뚫는 위대한 주체성'의 아집을 내려놓는 것이다. 주체적 노동은 오히려 최대한 지양된다. 기술과 기법, 재료의 가공 및 변형은 극도로 절제된다. 개념의 외현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관에 유폐된 자아의 비중을 감쇄시키기 위해서다. 이 세계에서 예술가의 소영웅주의, 기념비의 생산으로서 창작, 대상 위에 군림하는 미학 같은, 독일 낭만주의 미학의 레토릭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식상한 인식론들을 위한 자리는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 대상과 만나는 방식은 인식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다. 대상 앞에서 인식하는 주체의 수위를 현저히 낮추고, 체험하는 간주체(間主體)로 내려앉는 방식이다. 작가는 그것을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 내재하는 '예측하지 못한 산뜻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말한다. '예측하지 못한 산뜻함'은 대상과의 깊은 관계, 대상이 허용하는 심층적인 체험으로부터 허용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인식론적 각성, 사용자(使用者)의 경사된 감각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이 취급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상대가 되는 때 까지, 느린 호흡으로 더디 다가온다. 숙련된 솜씨와 효과적인 조치들이 멈출 때 비로소 전진하는 감각이다. 연기백의 고백이다. "느리게 가는 것은 어쩌면 그럴듯한 게으른 작태다. 하지만 그 안에 예측하지 못하는 산뜻함 들이 숨어 있다.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 작업의 호흡을 느리게 한다. (그 호흡은) 가늘어질지언정 절대 끊이지 않는다. 내가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 질기고 게으른 욕구가 나의 작업에 원동력이다." (연기백)

연기백_샹들리에 공간 이용 방식 두 번째_샹들리에_가변크기_2013

이것이 그의 미학을 독일 낭만주의의 유산, 곧 인간의 개인적인 기질, 곧 아우토스(autos) 속에 참된 자아가 존재한다는 인식, 결정적으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망상에서 도래한 것들, 질주하는 전위와 다른 것이 되도록 허용하는 요인이다. 그가 '위대한 예술'의 덫에 걸리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근거가 '위대한 아우토스'에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맥락에서 연기백은 경계선에 도달해 있는 작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급진적이다. 기법주의가 제일먼저 포기된다. 첨단 기술과 기법이 동원된 반짝거리는 완결 품에 개입되는 세속주의가 그 다음이다. 지난 세기 내내 서구의 전위주의가 집착해온 새로움의 욕망과 물신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기질 속에 있는 위대하고 충분한 아우토스에 기반하는 인식론적 미학이 마지막으로 버려진다. 그 비우기의 결과가 작가의 담담하지만 단호한 선언에 함축된다 : "나의 이 일이 더 이상 미술이라 불리지 않아도 좋다."

연기백_남겨진 (   )_부분

삶의 바라보기로부터 오는 미학 ● "나의 이 일이 더 이상 미술이라 불리지 않아도 좋다." 바로 이 선언이 많은 것들을 흔들고, 또 흔들어야만 하는 선언이다. 예술이 죽은 토끼에게까지 설명해야 하는 강박증적인 어떤 것이고, 썩어가는 상어의 절단된 사체에서 포르노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로 분류되지 않은 것이 축복이리라! 웅변이 없다고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기백의 이 세계는 조용하고 느슨하지만, 그 침묵과 느슨함이야말로 추악한 열정들, 폭력, 억압, 패권주의, 히틀러와 나치로 대변되는 순혈주의와 분열주의, 블록버스터화된 예술, 신화화된 미학, 과도한 아우라를 정당화하는 거짓들과 공허한 흥분에 맞서는 격한 저항의 형식이다. ● 연기백의 세계는 중심을 등지고 변두리와 마주하는, 사이드(Edward Side)를 빌자면 직업화된 영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마추어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세계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피상적인 신념과 과장된 웅변으로 일관해온 현대미술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바쳐진 세계다. 도덕적으로는 왜곡된 자아의 욕망을 부단히 내려놓는 것이며, 미학적으로는 낭만주의적 관점이 허용한 오만한 자아의 자리를 털고 내려와 사람과 사물들 사이로 귀환하고, 지혜나 감동의 요인을 다시 자연과 세계로 되돌리도록 권하는 세계다. ● 데니스 드 루즈망(Denis de Rougement)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의 자유주의, 곧 일 개인이 정신과 영감의 최종적인 출처가 되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차원도 거부된 이후의 자유주의는 예술가와 시인에게 결코 영감을 불어넣어주지 못했다. 예술가의 아우라에 도를 넘어서는 방점이 찍히기 시작한 이후로, 상상력과 창조는 오히려 혼돈에 빠졌고, 정신적 빈곤함이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단테의 작품을 빛나게 했던 배경은 토마스주의고, 렘브란트의 회화가 영감에 찬 것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로 하여금 겸손과 절제로 신 앞에 무릎 꿇게 했던 캘빈주의의 영향이 컸다. 같은 맥락에서 바흐의 장엄한 선율 뒤에는 루터주의가 있었고, 청교도 사상이 아니었다면 밀턴의 세계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기백_샹들리에 공간 이용 방식 두 번째_종이에 먼지_2013

그 뒤에 세계에 대한 이해의 큰 그림이 결핍된 예술은, 아렌트(Hannah Arendt)의 표현을 빌자면 구체화해야할 세계가 없는 예술이다. 이것이 아렌트가 표현주의에 분노했던 이유다. 나는 예술을 구도(求道)의 일환으로 보는 연기백의 태도를 이러한 큰 틀에서 이해한다. 연기백에게 예술이 인생의 궁극적인 길 찾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가 예술과 인생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부단히 찾아 나서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더 여유로운 세상 바라보기'를 스스로에게 허용하기 위해 삶과 미학의 거리를 조정하는 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내적 공허를 직시하고, 많은 경우 그것의 서글픈 자화상에 지나지 않는 현대미술의 가난함을 알고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더욱 의미있는 모색이요 시도이다. 우리가 연기백이라는 작가에게서 진정으로 귀를 열고 듣고 싶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미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었지만,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심상용

Vol.20130810b | 연기백展 / YUONKIBAIK / 延伎栢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