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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08_목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기획 / 갤러리마크_이재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마크 GALLERY MARK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0-23번지 Tel. +82.2.541.1311 www.gallerymark.kr
'내추럴 픽셀'이라는 인터페이스와 '디지털 미디어'의 따스한 인터랙션 ● 프롤로그_디지털 멀티미디어 시대의 시각예술가 사진, 영화의 등장 이후 미디어의 발전이 다채널화되고 세분화된 오늘날 디지털-멀티미디어의 시대에서, 이미지에 대한 생산자와 수용자 간 간극은 무너진 지 오래이다. 과거의 시대에 회화, 조각, 사진 등 전문적인 시각적 미디어를 다루는 테크놀로지를 함양하지 못했던 대중은 언제나 수용자의 자리에만 머물 따름이었지만, 60년대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의 등장 이후 휴먼 컴퓨팅과 디지털 컨버전스가 창출하는 세계에서 수용자들은 더 이상 수용자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수용자들은 이미지의 또 다른 생산자가 됨으로써, 그간 이미지 생산에 있어서 시각예술가들만이 점유했던 특권의 영역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이제 이미지의 생산, 유통, 소비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건들이 되었다. 이처럼, 미디어가 일상이 된 오늘날 미디어아트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디지털 멀티미디어를 다루는 기술을 일반 다수가 터득하고 있는 현실에서 시각예술가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일반 대중이 쉬이 구사할 수 없는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구현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시대에 미디어 아티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늘날 디지털미디어 환경에서 시각예술은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고 나가야 하는 것인가? 시각예술가 이재민의 미디어아트에는 위와 같은 질문들에 기초한 화두로 가득하다. 광고멀티미디어디자인을 공부한 이후 '아트와 테크놀로지'를 전공하며 미디어아트의 세계에 뛰어든 그의 이력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일견 그의 작업은 누구도 쉬이 모방할 수 없는 하이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매체 탐구에 집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피상적으로는 비예술인들이 미디어를 활용하여 이미지 생산을 거듭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와는 차원이 다른 하이 테크놀로지를 구사함으로써 대중들의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생산과는 차별화되는 미디어아트의 진면목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려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아티스트 이재민의 하이 테크놀로지 작업이 추구하고 있는 본질적 면모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내재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차가운 디지털 테크놀로지' 안에 '따스한 자연의 아날로그적 속성'을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의 미디어아트를 중매쟁이로 삼아 '인공의 테크놀로지'와 '자연(또는 인간)' 사이에서 맞선을 중재하려는 것이다. 차갑고 무감각적일 뿐 아니라 냉혹하기조차 한 미디어가 과연 어떻게 자연(또는 인간)과 더불어 따스한 '관계 맺기'를 실천해낼 수 있을까?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상상하는 내추럴 픽셀 ● 픽셀(pixel)이란 "컴퓨터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의 점"으로서 "컴퓨터 디스플레이"로부터 태어난 지극히 인공의 산물이지만, 작가는 그것에 자연적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공의 이미지'로부터 '자연의 그것'으로 변형시켜낸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에서 명료한 수열의 법칙을 따라 이합집산하는 '디지털 픽셀'들을, 생성소멸의 자연의 법칙을 따라 예측 불가능한 만남을 지속하는 '아날로그 픽셀' 혹은 '내추럴 픽셀(natural pixel)'로 변형시켜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있어 내추럴 픽셀은 삭막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호흡과 생명을 주는 하나의 은유적 장치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은유적 장치인 '내추럴 픽셀'이 인공(또는 미디어)과 자연(또는 인간)을 만나게 해주는 중매쟁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내추럴 픽셀은 그의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을 연애시키는 뚜쟁이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의 형식은 지극히 '디지털 인공'의 산물이지만 그것의 내용은 '아날로그 자연'의 산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창작에 매진했던 그간의 작품 곳곳에는 이러한 '내추럴 픽셀'이라는 은유가 매개하는 아날로그 자연의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자. '빛의 공간(light space)'을 표방하는 작품 「The Stone」(2010)은 대표적이다. 생각해보자. 빛은 애초에 자연의 것이지만, 인공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변형 생산된 '의사자연(擬似自然)'으로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인공(의 테크놀로지)'과 '자연'을 공유하는 시각현상으로 우리에게 밤낮으로 출현한다. 작가는 이러한 빛의 자연성과 인공성을 한꺼번에 작품 「The Stone」 위에 얹어놓는다. 이 작품은 실제로 2000개의 엘이디(LED)가 둘러싸고 있는 전자회로 뭉치이지만, 그것의 이미지는 우리가 어느 산에서나 쉬이 발견할 수 있는 바위 덩어리를 '발포 우레탄'이라는 재료로 형상화한 것이다.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 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로, 세로 각각 2cm 크기의 모듈로 이루어진 무수한 엘이디 전구들은 빛을 감지하는 센서와 연결되어서 주위 환경의 밝고 어둠의 정도에 따라 조명을 조절함으로써 놀랍게도 바위 덩어리의 입체적인 양감과 음영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런 장치는 0과 1의 조합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모듈의 지시적 움직임 자체가 유기적인 환경으로부터 영향 받고 있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자연과 닮은꼴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연 이미지의 복제를 의미하기 보다는 자연의 본성에 대한 모방을 의미한다. 즉 실제적인 '디지털 픽셀'의 움직임을 자연, 환경으로부터 모방하거나 그것들에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아예 그 스스로 '내추럴 픽셀'의 위상으로 변형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품 「The Stone」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내추럴 픽셀을 상상하고 그것에 관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만의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 디지털 픽셀이라는 수동적인 미디어의 존재에 자연의 생명력과 호흡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미지 변형의 인터페이스 ●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내추럴 픽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적 상상력은 작품 「The Stone」(2010) 이전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미 선보인 바 있다. 그것은 '물'이라는 실제의 자연물을 라이트아트 내부로 잠입시킨 「Water Lights」(2004-2012)라는 일련의 시리즈 작업에서이다. 이것은 물을 감지하는 센서와 연결한 각각의 엘이디 전구들을 작품에 무수히 장치한 후, 표면 위로 물이 흐르도록 장치함으로써 물이 닿은 엘이디가 발광하도록 하거나, 표면 위에 관람자가 물을 적신 붓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엘이디가 조명을 밝히도록 하는 작품이다. 여러 에디션을 통해 기술적 변모를 드러낸 이 시리즈물에서 작가가 일관되게 주목하는 지점은 '실제의 자연'이 '인공의 테크놀로지'를 제어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미지의 복제'를 거듭하는 미디어의 그간의 획일적인 존재론에 질문을 제기하면서, 유기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자연과 같은 존재론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도 가능한지를 묻는 작업인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대표하는 속성이었던 이미지 복제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이미지 변형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 말이다. 그것은 그의 라이트아트를 통해서 미디어의 '선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고정된 이미지 복제의 존재론'으로부터 자연의 '비선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인 이미지 변형의 존재론'을 탐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작업태도는 물의 흐름과 양을 조절한다든가 '센서에 닿는 물의 양에 따라 엘이디 조명의 밝기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닮은 미디어의 존재론'을 실험하는 그의 노력에서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표피적으로 인공(엘이디)과 자연(물) 사이의 인터페이스(interface)는 센서 장치와 같은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미지 변형을 실험하는 그의 라이트아트 전체가 된다. 우리가 앞서 인공(또는 미디어)과 자연(또는 인간) 사이에서 작동하는 중매쟁이로서의 '내추럴 픽셀'이라는 은유적 장치를 살펴보았듯이, 그의 라이트아트 역시 중매쟁이, 뚜쟁이이다. 그것은 보다 더 전문적 의미에서 이제 다양한 인터페이스로 확장한다. 예를 들면, 그의 또 다른 작품 「The Light of Waves」(2011)은 부산 송도해수욕장에 설치되어 실제의 파도를 이용함으로써, 라이트아트 자체가 인공과 자연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그의 라이트아트(2500여개의 엘이디가 설치된 구조물)은 그것 자체로 자연(바다, 파도)과 인공(육지, 미디어)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로서의 인터페이스인 것이다. 그것은 낯선 인공(semi-artificiality)임과 동시에 작가의 말대로 "낯선 자연(semi-nature)"이기도 하다. 여기서 세미(semi, 半)란 개념은 원칙적으로 그의 작품 자체가 이미 자연일 수 없는 인공적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동시에 끊임없이 자연이 되고자 그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그가 실제의 자연환경으로 뛰어들며(자연과 접촉하며) 만들어낸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수사학으로서의 인터페이스'의 미학이란 다분히 중의적이다. 이처럼 자연이 결코 될 수 없지만, 자연이 되고자 하는 인공(라이트아트)의 매우 단순하지만 끈질긴 '변형을 지향하는 욕망'은 그의 독특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창출하는 미학이자 그의 작품이 견지하는 근본적 힘이라 할 것이다.
따스한 인터랙션 ● 이재민은 이번 전시에서, 상기의 구작들과 더불어 올해의 최신작들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그간의 작업들을 현재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재성찰하고자 한다. 그가 작가노트에서 「Natural pixel」이라는 타이틀의 이번 전시를 "빛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관객들과 상호작용하는 라이트아트 전시"임을 천명하고 있듯이, 그의 작품에서 인터랙션은 매우 주요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전시명 내추럴 픽셀은 그의 작품에서 인터페이스를 의미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인터랙션을 발화시키는 개념이 된다. 즉 인공과 자연 사이의 인터페이스 개념이 라이트아트와 관람자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확장하는 지점에서 그의 작품이 배태한 인터랙션은 활발히 작동하기 시작한다. 생각해보자. 그의 라이트아트가 표방하는 '내추럴 픽셀'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아무리 자연적임을 지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태생적으로 인공을 버리지 못하는 기계적 또는 전자적 속성을 지닌다. 전자적 속성을 숨기고 자연적임을 갈망하기.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 지닌 인터페이스의 미학이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도, 그 인터페이스 자체를 실감나게 숨기는 것으로부터 관람자의 인터랙션은 활발하게 꿈틀대기 시작한다. 즉 작품과 자신 사이에 놓인 인터페이스가 숨겨지면 숨겨질수록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는 관람자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최근의 신작「I & You」곳곳에는 이러한 차원의 인터페이스와 인터랙션이 관계한다. 이것은 5000개의 엘이디 조명들이 지름 2m의 투과체의 원기둥 형태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작품이다. 각각의 엘이디 조명들이 모여 만든 원기둥 껍질과 같은 '심층 없는 표면'은 하나의 커다란 둥근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카메라 트래킹을 통해 기둥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알맹이가 비어있는 이 기둥의 껍질에 드리워진 인물의 실루엣을 빛으로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층 없는 표면'이란 미디어 이론가 볼츠(N. W. Bolz)의 언급대로 디지털 시대에 마이크로화되고 전자화된 이미지를 지칭하기에 유효한 개념이다. 그것은 촉지할 수 있는 대상들로부터 벗어나 비물질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들로서 대표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념들을 담고 있는 '심층 없는 표면' 혹은 '껍질'로서의 기둥은 움직이는 인물의 실루엣을 사라지게 만들고 자신의 몸에 드리워지는 대로 해당 엘이디 전구들을 실시간으로 밝혀내면서 비물질성을 극대화한다. 따라서 그것은 애초에 있어야 할 '인물들의 검은 그림자'(실제적인 그러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엘이디 빛으로 된 '인물들의 환한 그림자'(허구적인 그러나 비로소 보이는)를 얹어놓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관람객의 형상을 포착하는 카메라, 이것과 연결된 센서, 엘이디 조명 등을 통해서 관람자의 그림자 패턴(부재)을 빛의 패턴(존재)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빛에 의해 형상되는 그림자와 같은 자연적 인터페이스를 숨기고 엘이디 조명으로 된 형상을 치환시켜놓은 이 작품에서 라이트아트의 특성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자연의 속성을 인공의 매체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관객과의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처음부터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인터페이스를 '인공과 자연이 혼재하는 방식으로' 숨겨놓고 관객과의 놀이와도 같은 흥미로운 인터랙션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고려되어야 할 뷰포인트중 하나! 그것은 관객들이 저마다 '신기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놀이와 유희를 통해 숨겨진 인터페이스를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는 인터랙션이, 언어적 메시지의 발견이 아닌 비언어적 메시지 자체를 즐기려는 움직임인 까닭에, 언제나 따스하다는 것이다.
에필로그_감성의 지각에 손짓하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 이재민의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작가노트에서 현재의 작업의 단초를 제공했던 10여 년 전의 어느 날을 회상한다. 그는 무심히 빗방울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추적하다가 그것의 자취를 라이트아트로 표현하려는 구상에 착수한다. 그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재민의 작업의 출발은 자연과 인공의 작위적 만남을 구축하려는 결과적 사유이기보다는 자연의 예측 불가능한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라이트아트의 그릇으로 어떻게 효율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상 속에 느닷없이 개입해 들어온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라이트아트의 본질적 면모는, 초기의 설치작품부터 최근의 평면작품 「하늘 조각」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지각하는 것에 대한 수용자의 인터랙션을 고려한 '따스한 시각예술'이었다. 그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구축한 자연의 이미지는 자연의 복제이기보다는 자연의 변형의 속성이었으며, 그가 늘 화두를 삼고 있던 것은 자신의 라이트아트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숨겨두고 관객이 흥미로운 여러 방식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상호작용적 실험을 거듭하는 일이었다. 나아가 그 실험은 특정한 언어적 메시지를 구체화하는 방식이기 보다는 지각에 반응하는 이미지로 중얼거리는 비언어적 메시지이자 우리의 시각에 호소라는 감성학(感性學)이었으며, 그가 꿈꾸는 소통이란 관객의 지각과 감성에 손짓하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자연의 신비롭고도 정의하기 어려운 변형 이미지를 지금, 여기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실험하면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의 작품들을 성찰하고 미래적 전망을 한꺼번에 고민하는 이번 전시는 분명코 그의 총체적인 자기 점검을 통한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 김성호
Vol.20130808c | 이재민展 / LEEJAEMIN / 李在珉 / media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