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틈에 대한 언술-메멘토 모멘트 Memento moment

사윤택展 / SAYUNTAEK / 史潤澤 / painting   2013_0806 ▶ 2013_0822 / 일요일 휴관

사윤택_30 seconds / 5 hours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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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807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_이전 ARTSPACE H_Moved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29-4(원서동 157-1번지) Tel. +82.(0)2.766.5000 www.artspaceh.com

메모란두스 모멘툼 Memorandus momentum - 속도 ● 라켓에 맞아 허공에 솟구치고 있는 테니스볼은 움직이고 있는가, 정지된 것인가? 선승의 화두와도 같은 이러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매)트릭(스)」는 그러나 자세히 보면 화면 저쪽에서 보낸 공을 놓친 두 선수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제논(Zenon)의 역설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만든다. 상대편 선수가 보낸 공을 보고 두 선수가 라켓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 공은 두 선수가 라켓을 들기 이전에 떠났기 때문에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이 그림을 위한 드로잉에서는 공이 두 선수의 라켓 사이를 빠져나가 바닥에 한번 부딪쳤다가 그 탄성으로 다시 튀어 오르며 화면의 가장자리를 향해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두 그림은 테니스코트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찰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편 선수들이 놓쳐버린 공의 궤적이 아니라 그 속도이다. 공이 날아오는 순간 두 선수는 거의 본능적으로 라켓을 휘둘렀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의 '발작'과도 같은 상태에서 화면 속에 얼어붙어 있다. 튕겨나간 공은 공간에 정지해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순간'을 응고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현실에서 이 사건의 순간은 불과 몇 초 만에 종결되지만 그림에서 사건의 순간은 지연되고 있다. 사실 디지털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고성능 카메라를 동원하면 이 정도의 순간이라면 그림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복잡한 사건들이 종횡으로 얽힌 매트릭스이자 눈속임(trick)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시간을 지각할 수는 있으나 그 속에 시간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사이를 가로지르는 격렬한 운동, 즉 속도는 이미지를 통해 단지 재현되고 있을 뿐이다. 긴장을 놓고 있는 사람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공의 속도를 표현한 것은 재미있는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은 속도의 재현, 그것도 회화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착시에 의존한 재현이다.

사윤택_(매)트릭(스)-blow up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13
사윤택_(매)트릭(스)-blow up을 위한 드로잉_종이에 유채_23.6×32.1cm_2013

시간의 지각 ● '메모란두스 모멘툼', 즉 '기억하(되)는 순간'은 사실 회화보다 사진에 더 어울리는 말인지 모른다. 피사체가 카메라를 통해 기록되는 그 순간의 시간은 정지되고, 고착되며 그 순간이 영원한 현재의 모습으로 얼어붙고 방부처리된다. 훗날 이미 박제가 된 한 순간이 고착된 사진을 봤을 때 사진 속의 작고 사소한 한 사물이나 사진 속의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 표정을 통해 죽어버린 과거가 느닷없이 현재로 소환된다면 우리는 망각의 시간 너머에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그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온갖 기억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 기억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진입하는 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현재의 내가 짐짓 조작해낸 기억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그것이 내 기억의 주름을 할퀴거나 찌르는 것이라면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 인간의 눈은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고 끊임없이 운동한다. 세계로 향해 열려있는 이 창을 통해 접수한 무수한 정보들은 시넵스란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치며 뉴런에 저장된다. 그래서 기억된 과거도 사실은 뉴런에 저장된 정보의 일부가 잠에서 깨어나 조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눈을 통해서만 세계와 교신하는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물체를 눈은 보지 못하지만 내 귀와 피부가 이미 그것을 감지한다. 이처럼 정보는 비단 눈뿐만 아니라 귀를 통해, 코를 통해, 입을 통해, 그리고 피부를 통해 내 몸으로 전달된다. 말하자면 신체 자체가 세계와 반응하는 감각기관인 것이다. ● 또한 무언가 열심히 봤지만 즉시 느끼지 못하다 순식간에, 경계심을 무장해제한 가운데 보고 있는 자신이 전면적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존재와 무』에서 열쇠구멍을 통해 실내를 훔쳐보던 사람이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정작 자신이 전면적으로 보여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발자국 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체(sujet)였던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열쇠구멍을 통해 방안을 훔쳐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주체가 아닌 대상(objet)임을 의식하게 된다. 더 나아가 라캉(Jacques Lacan)은 '시선'과 '응시'에 대해 설명하면서 홀바인(Hans Holbein)의「대사들」이란 그림을 예로 들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뭔가 이상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방을 나서며 무심결에 뒤돌아보는 순간 두 외교관의 발아래 그려진 이상한 물체가 해골로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윤택_순간, 틈에 대한 공명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13

사윤택이 작업실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순간, 틈에 대한 공명」은 이러한 전면적 노출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순간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낮에서부터 밤까지 모니터에 매달린 긴 시간, 미처 불도 켜지 않고 앉아있다 보니 실내는 어두워졌다. 순간, 실내를 감싸고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기둥들과 탁자위의 유리가 칼날 같은 섬광을 드리우며 번쩍거렸다. 그 순간 분열증 환자처럼 깊은 공명에 빠져들었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자아는 사라진다. 그렇다고 자아가 해체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문득 책상위에 켜놓은 조명을 받아 빛나는 사물들을 통해 자아가 갑자기 전면적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이것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수 있다. 열쇠구멍을 통해 열심히 실내를 훔쳐볼 때 잊어버렸던 나, 그림 앞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막 돌아설 때 불현 듯 엄습해오는 해골, 그 찰나의 간극, 벌어진 틈을 통해 자아가 존재론적 문제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일 수 있지만 내가 세계와 전격적으로 대면하는, 그래서 나의 주체가 비로소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 틈은 내가 무화된 채 빠져 들어간 구멍이고 다시 나를 세계에 노출시키는 출구인지 모른다. 벌써 시간은 꽤 지났고, 어둠이 내린 작업실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만드는 그 순간은 내 몸 전체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찰나이다. ●「(매)트릭(스)」에서 사윤택은 "순식간에 놓쳐버린 행동의 '발작' 들은 마치 '렘수면' 을 맞은 순간처럼, 그 순간은 우리를 깊은 망각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고 썼다. 정지된 순간은 일종의 덫이다. 즉 내가 빠져 들어가 영속되기를 바라는 구멍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업실에서 불현듯 노출된 나를 발견한 것은 주체의 귀환이라기보다 주체가 다시 망각되는 순간의 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균열의 사이에서 주체는 시선이 아니라 응시에 의해 내가 대상들에 의해 보여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렇다고 작가는 회화를 통해 시간을 결빙시켜 영속화시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양이 지닌 의미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30초와 5시간 (30 seconds / 5 hours)」은 전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자신의 노동시간과 대비시켜 관객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 사이의 간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한 작품 앞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낼까. 작가는 30초 이내라고 단언한다. 회화나 조각은 공간예술이기 때문에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에 비해 작품을 보는 시간이 아주 짧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 작품의 구도, 형태, 색채, 내용까지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5시간이나 공력을 기울여 작품을 제작한 작가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없는 한 30초의 머무름에 대해 실망하거나 분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시각예술과 시간예술의 경계와 특징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윤택_지속의 틈-blow up_캔버스에 유채_42×60cm_2013

메모란두스 모멘툼 혹은 메멘토모리 ● 사람이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을 메멘토라고 하는데 이 개념은 독립된 용어로서가 아니라 덧없는 시간, 임박한 죽음에 대한 경고로서 '죽음이 옆에 있음을 기억하라'란 의미의 메멘토모리(memento-mori)란 용어와 함께 비상한 힘을 발휘해 왔다. 사실 시간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회피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프로이트의 한 임상보고는 그것에 대해 예증하고 있다. 죽은 아들의 시체가 놓인 병상을 지키던 아버지의 꿈속에 나타난 아들이 아버지에 "제 몸이 타고 있어요"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의 꿈속에서는 비록 아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지언정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연상시키려고 하지만 막상 깨어나 보니 침상 곁에 놓아둔 촛불이 넘어져 아들의 시체에 옮겨 붙으려는 찰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기념물은 이러한 죽음의 지연, 즉 시간을 극복하여 그의 영예로운 삶을 영속시키려는 허망한 기획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꿈을 지연시키려는 아버지의 헛된 욕망처럼. 기억은 그것을 작동시키는 동력이다. 시간과 공간은 톱니바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지만 간혹 그 사이에 틈을 내고 그 틈 사이에 사건을 만들 수는 있다.「순간, 틈을 위한 결 -바람이었구나」가 그 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사람을 그린 후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속도에 의해 구조가 일렁거리는 그 혼란의 틈바구니로 어렴풋하게나마 남산이나 주변풍경,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흔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치는 사람을 바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제의 사건은 이미 그의 곁을 통과한 그 사람이 남겨놓은 인상이며 분위기일 뿐 세상이 흔들릴 리 만무하다. 순식간에 지나쳤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상적인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의 상당 부분을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바람은 재조작된 기억의 편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우는 장치는 조작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윤택_지나감-순간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3
사윤택_술 취한 거리의 지나감-순간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3

최근 그는 이러한 지나쳐 사라진 대상, 그것도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을 화폭에 담고 있다. 술에 취해 거리를 걷다 문득 본 장면이거나 차를 타고 가다 마주친 작은 사건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시간의 결로 나타나고 있다. 이 낯선 만남 속에서 그는 속도와 그것이 연결된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속도는 붓질의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나타나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의 틈인 것이다. 그것이 풍경이든, 지나치는 사람들이던 밤의 불빛 속에 나타난 대상들은 그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켜주는 또 다른 자아이다. 그들을 통해 그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라는 암시를 준다. '기억하(되)는 순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메모란두스 모멘툼은 메멘토모리와 짝을 이룬다. 기억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순간, 그 시간은 죽음과도 같은 미명 속으로 유폐된다. 이미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의 기억은 그 흘러간 시간에 대한 부질없는 호출일지 모른다. 그래서 시간을 붙잡고 있는 그의 작품은 시간의 유동성에 대해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공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 반드시 땅으로 내려온다. 그것을 화면에 정지된 상태로 결빙시켜 놓는다 하더라도 시간은 그것을 녹여버리고 만다. 시간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이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비행기를 타고 지구의 반대편으로 간다면 우리의 시간을 열 몇 시간 정도 앞당길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올 때 그 시간은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아무리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들 시간이 역주행하거나 멈추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나마, SF영화나 소설에서나마 시간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된 순간은 죽음의 기억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물의 운동을 보면서 지각한 속도는 실제 태양주변을 돌고 있는 지구의 속도에 비하면 너무도 느리다. 질주하는 크리슈나의 마차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목적지가 바로 죽음이기 때문에. 메모란두스 모멘툼은 메멘토모리이다. ■ 최태만

Vol.20130806e | 사윤택展 / SAYUNTAEK / 史潤澤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