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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예술의 기원과 이미지 ● 예술에서 역사는 작품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물리적인 현실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정신적인 반응이 감각적으로 자료화 되는 과정의 축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윤석의 작품에서는 역사를 초월하는 다른 영역들이 작가의 예술적 궤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성과 소멸의 과정에 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예술의 기원을 암시하는 종교적 양태들에 관련된 선험적 세계와 작가의 작업과정에 내재된 예술의 목적성이 드물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작품을 비롯한 세속적인 존재에 스며들어 있는 소멸된 시간과 새로운 생명이 드러나는 과정이 의미의 공간적 구조화라는 테제를 파괴하면서 다른 모습의 새로운 가시적 형식으로 스스로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 작가는 삶과 예술의 탈역사적 조합을 포착해 내기 위해 텍스트를 활용한다. 역사적 특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매체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문자를 통해 인류는 삶의 방식을 기록하고 사건들을 기록함으로써 의미의 영역을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사유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추상적인 정신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역사는 텍스트를 통해 사유의 형식을 만들어 왔다. 오윤석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초기작품들에서 불교경전이나 한국의 토속종교와 관련된 텍스트들을 작품의 구조적 의미와 형식적 내용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텍스트는 원시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주술적인 힘을 가진 치유의 상징이기도 하고, 정신적인 피폐함을 위로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문자를 통해 문화와 문화의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연결된다. ● 21세기는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운 개념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의 탄생을 가져왔다. 기술적으로 조정되는 기기들을 통한 이미지의 생산이 미술의 감각데이터로서의 기능적 한계를 초감각의 사유 체계로 확장시켰다. 말하자면 기술적인 이미지들의 생산은 기존 예술의 재현적인 구조가 가지고 있던 많은 요소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런 변화의 지평 위에서 불변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삶의 다양한 양태들, 예를 들면 정신의 불변성이나 개인의 인성, 삶의 본질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사건들과 같은 것들이 새로운 예술을 통해 물질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차원들에 관한 레퍼런스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술이 공간의 관점에서 변화와 운동이라는 시간의 관점으로 전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삶의 지속성에 대한 설명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정착된 그림과 같은 형상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지만 새로운 기술미디어의 양태들은 시간의 변화 속에 감추어진 개별 순간들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에 집중한다. 헤겔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정체성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의 상황 속에 거주시킨다.
오윤석의 작품에서 공간적으로 현실의 사건들을 특성화시키는 역사의 가장 오래된 관습들이라 할 수 있는 회화적 표현들은 오히려 텍스트를 이미지적으로 번역하는 행위이고, 그 안에서 빛과 그림자의 은유적 세계를 회화의 상황 내부로 편입시킨다. 이는 그가 기술미디어의 변화와 운동이라는 유동성의 미학을 회화의 미학으로 번역하고 수용한다는 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변화를 내포하는 이미지는 실재와 그림자의 구별을 의미 없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동안의 미술의 역사에서 프레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왔지만, 그런 노력이 단순히 프레임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근본적인 조건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추사에 대한 오마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세한도, 2007」에서 오려진 글자의 갈라진 틈을 통해 빛이 투영되어 벽에 비추어진 글자의 그림자는 텍스트를 실재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빛의 기능적 활동의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재현적이고 재현이 현실의 모방이라는 재현의 정의를 빛을 통해 재정의 함으로서, 재현적인 이미지를 빛으로 다시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오려진 글자는 벽에 비추어지지만 그림은 벽에 비추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미술에 대해 세 가지의 형식적 커멘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미지의 재현적 상태를, 두 번째는 빛과 이미지의 상호 작용에서 이미지의 재현과 그 같은 재현을 드러내는 문화의 차원들(예술작품)에 관한 것, 세 번째는 아직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이미지 자체의 실재성에 대한 의심과 같은 것이다. 이 세 가지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는 이미지의 형상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의 존재성을 파괴함으로서 살아남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출발이 주술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가 이미지가 이미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유의 개방성과 의미의 변화작용 자체를 그의 예술적 성찰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오윤석의 작품은 프레임으로 부터의 해방을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이미지나 텍스트의 정적인 차원들이 삶의 동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이유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의식의 제도화와 기억의 축적 같은 다분히 관습적인 인간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 의식이 지향하는 것들이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 되는 순간 삶의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이유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예술은 이성적 사유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 오윤석의 관점은 역사적인 시점에서 분석되고 있는 미술의 플랫폼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예술가라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작가들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작품의 형식을 만들기 위해 찾아내는 것들이 그들 삶의 본질과 관련된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이중적이기는 하지만 오윤석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인간들의 관계를 삶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에게는 꿈과 같은 전의식의 상태 혹은 무의식의 활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인간적 활동들로부터 의미를 추출해내는 과정은 예술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불안과 삶에 대한 희망과 같은 상반되는 것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데, 이는 작가의 관점에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의 사건들과 그와 관련되어 반응적으로 사유함으로서 구성되는 인간적 삶의 활동 범주들이 오히려 예술적 상황들의 구성을 위한 본질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이선란도, 2009」는「세한도, 2007」와 마찬가지로 추사 김정희의 동명의 작품의 재해석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감각과 문화의 관계를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유비시켜 물질적 현실과 정신적 생산물의 관계로 비유한다. 이런 비교를 통해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성질들이 문화의 속성으로 환원되어가는 삶의 양태들이다. 말하자면 성찰적인 의미보다 삶의 함수들이 그에게는 더 앞서있는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사람들 삶의 불변적인 조건들에 관한 고찰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에게 탄생과 죽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죽음과 같은 소멸은 다른 세계로의 전이일 뿐이다. 이런 태도와 의식은「불이선란도, 2009」를 통해 존재의 그림자처럼 관객에게로 드러난다. 인간의 정신은 물질적인 현실처럼 정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들은 흔적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처럼 그것들만의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텍스트를 문자적인 텍스트로 그리고 이미지로 재전유하는 과정에 거주한다. ● 텍스트 문화는 근대의 문화적 사유들, 특히 계몽주의적인 철학적 사유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 사유들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서 불안을 하나의 존재론적인 속성으로 던져주었는데, 이는 철학적 사유들이 삶을 개별적인 사건들과 그에 따르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필연적인 상황으로 인지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하나의 상상력 속에서 연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접점이 된다. 그래서 계몽주의 철학은 삶을 대상화하여 하나의 정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죽음을 비윤리적 상황으로 대상화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를 단순히 인간적 활동의 생산물이라는 물질적 조건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면에서 현상을 성찰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20세기 미학의 개념적인 지평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윤석의 예술에서 정신적인 가치들에 대한 성찰의 두 번째 단계로 제시되는 이미지를 문화의 개별적인 사실들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이는 인간적 차원들이 삶의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작용한다는 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가능한 관점이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그의 작품의 제목들을 통해 계기적으로 구체화되어 드러난다.「The Poem for Destroyed Gods, 2011」,「The Song of the Sea, 2012」같은 작품들은 종교적인 의식 속에서 구술적으로 언급되어온 자연과 종교적인 존재들로서의 자연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Hidden Memories」시리즈 작품들은 삶이라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는 내밀한 종교적 속성들과 관련하여 예술작품이 세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커멘트라고 할 수 있고,「Re-record」시리즈와「Good Life, 2011」같은 작품들은 종교적 기원을 지닌 예술작품이 인간의 삶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언급이 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삶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것은 미술 자체의 근거들에 대한 다양한 성찰들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개념적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태도이다. 다양한 성찰들이 보편적인 일관성 속에서 해석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관성이 현대미술의 필요조건은 아닌 것이다. 삶의 사건들은 문화적인 함수관계 속에서 고유성을 지닌 독창성과 비규정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성찰의 성과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에서는 규칙들이 아니라 삶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행동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특히 문화적인 상황들은 삶의 반영이기 때문에, 예술이 문화에 대한 언급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Hidden Memories-Woman, 2012」에서 작가는 삶을 이미지에 대한 성찰로 환원시킨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미지는 본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이미지 자체의 본질을 이야기 한다면 가능할 뿐, 이미지와 존재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는 표면을 지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미지와 표면성은 현대미술에서 볼 때 오히려 스펙터클한 삶의 과정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는 존재의 생존 방식 자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미술은 무엇이 삶의 조건들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본질적인 한계 같은 문제가 아니라, 삶의 표면적 관계들에 집중하기도 하고, 본질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범주 안에서 존재하는 개별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지와 표면성과 삶의 존재론적인 상황들에 관한 언급이 미술에 대한 개념이거나 언급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내재적인 철학적 차원(예를 들면 표면과 피상성 자체에 관한 사유)이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이 될 수 있고 나름대로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스스로 자기충족적이라는 고전적인 규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작가의 작품세계가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자연스러운 미학적 의식화 과정으로서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존재성의 본질을 획득하는 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술작품에서 현실이 여전히 하나의 이미지적 상징의 체계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삶이 요구하는 것과 예술이 요구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예술은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거대한 내러티브를 구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삶의 가치들이 역사적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은 예술에 목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예술에 스며들 수는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윤석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숨겨진 기억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 칸트의 미학에서 숭고미는 자연에 관한 성찰이고, 인간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존재성에 관한 언급이다. 칸트의 비판철학을 계몽주의 철학의 가장 정점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의 철학적 관점에서 예술작품은 사실주의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재현의 범주를 벗어나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당시에는 칸트의 철학을 예시해줄 작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구상적이고 개념적인 현대미술에서 존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존재의 흔적은 비물질의 세계에 거주하는 삶의 행위들이다. 달리 말하면 행위와 관련되거나 혹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감각적 반응의 양태들인 것이다. 오윤석에게 '숨겨진 기억들'은 단순히 인간의 기억작용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그에게 기억들은 굳이 예술의 종교적 기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분히 종교적인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예술의 흔적들이다. 이것은 삶의 수준에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능들이 아니라 무의식의 원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문화적 행위의 잔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해석의 규칙은 존재하지 않고 상징적 해석의 가능성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는 작가의 작품들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운동성을 지니고 범주적으로 작용하는 바람과도 같은 것처럼 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반응의 양태들을 구성하는 것은 행위의 기억들이다. 이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은 예술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언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원형적 기억 속에서는 삶의 또 다른 양태들이 스스로 그러하듯이 예술도 자연스럽게 철학적인 수준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Hidden Memories-Tops, 2013」에서 이미지는 존재와 인식의 양태들이 뒤섞여있는 인상주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바라봄으로서 작품의 구조가 드러나고 그 구조를 의미의 담지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인상은 의식의 논리적 추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논리적 추론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추상적 이미지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미지의 추상성은 행위의 결과로 생산된 작품이라는 의식적 추론의 피상적인 논리적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추상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감각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적 운동성의 원형으로서의 가능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관객들에게는 예술이 개성적인 그 자체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는 쉽지 않다. 말하자면 삶이 참여의 차원이 아니라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추론의 결과로서의 예술로 존재할 뿐이고, 그런 추론의 과정에서 삶의 양태들을 예술적 기억작용의 본질적 속성인 제의적인 기원과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어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Hidden Memories-Tops, 2013」은 인상주의적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술의 기원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그 작품에 작가의 형상에 대한 사색과 작품형성의 과정적 구체성, 즉 예술을 생명의 기원과 동일시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작가는 초기 작품에서 텍스트를 통해 그의 작품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차원들을 인간적 개념들로 환원시켜 구체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되어 있는 예술적 내용과 삶의 양태들을 객관적 실체로서 제시하려고 하는 미학적 의식의 충돌로 인해 작품을 통한 의미생산의 의지는 자칫하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의 세계로 환원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진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의식의 세계는 삶을 제어하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삶의 행위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런 행위들 속에는 인과적인 필연성이 내재해 있다고 하는 인식 위에서는 결정론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과성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개념적 선후관계에 대한 경험적인 언급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적인 차원의 의심의 세계에 머물러야만 한다. 단순히 과학적인 확실성의 세계, 즉 인과론적인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 리히터는 자신의 기억들을 이미지 속에 넣는 방식으로 사진적인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한다. 그에게 사진은 그의 과거의 기억들을 물질화시켜주는 것이고, 그런 기억들을 그는 회화를 통해 지워나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기억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이미지이다. 물질을 비물질화 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윤석 역시 최근의「Hidden Memories」시리즈 작품들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형식충동과 구조화의 요구를 이미지 자체로 순화시킨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순환시킴으로써 혹은 다른 물질적 기억을 매개하는 매체들의 존재성과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움으로써 예술을 비물질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 오윤석에게 기억은 텍스트와 인간의 삶의 조건들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한편으로는 대립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 자체이기도 하고, 또는 존재의 조건들이기도 하다. 의미의 역사가 시간의 개념을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의미를 증발시켜 현실을 재생하는 방법적인 구체성은 역사적 조건들과 범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예술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행위의 물질적인 구체화가 아니라 삶의 구체성이 예술을 통해 드러나게 함으로서 예술자체를 하나의 구체적인 행위로 등식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예술은 그렇게 존재해 왔고, 오윤석의 예술에서 작가가 성취하는 것은 예술로 부터의 해방이다. ■ 정용도
Vol.20130719c | 오윤석展 / OHYOUNSEOK / 吳玧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