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712_금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아트 포인트 Art Point 인천 서구 가좌동 537-1번지 Tel. +82.32.574.8402
공장미술과 의미의 재구성 ● 화용론.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강력한 도발에 해당하는 예로서 마르셀 뒤샹의 「샘」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샘」은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적어도 감각적 쾌감을 위해 제작된 오브제에 맞춰진 전형적인 예술작품으로서의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정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이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샘」의 무엇이 예술작품의 정의에 해당하는가. 원래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었던 남성용 변기를 예술이라는 맥락 속에 옮겨 놓는 행위와 과정이 불러일으킨 도발과 스캔들이 예술작품이고, 이로써 전형적인 예술작품의 정의를 재정의하도록 유도한 행위가 예술작품이다. 무슨 말인가. 예술작품의 정의가 질료적인 차원에서 행위와 개념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이며, 덩달아 예술에 대한 정의 역시 오브제의 차원에서 맥락의 차원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 오브제는 일상의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아님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각각 일상의 맥락 아님 예술의 맥락에 속해져 있을 때 이 오브제의 정체성은 어떻게 달라지고 그 의미 또한 어떻게 다른가. 마르셀 뒤샹은 바로 이런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런 인문학적 배경 위에서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매개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팝의 황제 앤디 워홀은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를 매개로 똑같은 일을 수행한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에 맞춰진 팝아트의 모럴을 마르셀 뒤샹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행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네오다다이스트들은 적어도 외관상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반복하고 변주하는데, 여러 형태의 가전을 예술작품으로 제안한 것이다. 이를테면 키치로 널리 알려진 제프 쿤스는 유명한 네오다다이스트이기도 했다. 네오다다이스트로서의 쿤스가 뒤샹을 반복한다면, 팝아티스트로서의 쿤스는 앤디 워홀을 변주한다.
그리고 배동기는 공장을 예술작품으로 제안한다. 가구와 가전에 예술의 옷을 입히는, 삶에 미학의 옷을 덧입히는 공장이다. 이 공장은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아님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각각 일상 아님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을 때 이 공장의 정체성은 달라지는가. 달라진다면 공장의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배동기의 공장작품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고, 그 질문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마르셀 뒤샹의 질문에 연동되거나 연장된다. 의미 자체는 고정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 의미가 고정되거나 결정되는 것은 의미 자체가 아니라 언어(말과 문자,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와 눈빛 같은 바디랭귀지, 그리고 일체의 감각적 이미지를 아우르는)가 실제로 수신(아님 발화)되는 지점에서이다. 의미의 키가 저자가 아닌 독자에게 주어진다는 저자의 죽음 논의도 알고 보면 이처럼 언어가 실제로 수신되는 지점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사실의 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언어가 실제로 수신되는 지점? 바로 맥락이다. 언어는 맥락을 옮겨 다니고, 그렇게 맥락이 달라지면서 언어의 의미도 달라진다. 바로 화용론이다. 그렇다면 원래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었던 공장을 예술이라는 맥락 속으로 옮겨놓은 배동기의 제스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시, 배동기의 공장작품은 이런 화용론의 문제를, 언어용법의 문제를, 의미부여의 문제를, 맥락의 문제를, 배열과 배치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삶이 이미 예술이다. 마르크스는 미학의 가능성을 학문적 틀 속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자질로 봤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의 욕망을 미학적 가능성이며 자질로 본 것이다. 그리고 요셉 보이스는 예술은 일상 속에 있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잠정적인 예술가라고 본다. 비록 아이러니하게도 더 난해해진 결과를 낳았지만(현대미술이 난해한 것은 실제로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용인과 인정의 문제 곧 현대미술과 관련한 경계설정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여하튼 삶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에 맞춰진 아방가르드의 실천논리를 반영한 발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데카당스의 사제 보들레르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예술이며 걸어 다니는 예술이라고 간주했다. 딜레당트가 개인에 함몰되면 그저 개인적인 취향에 머물지만, 댄디즘이라는 특정의 모드로 승화가 되면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의 발현이며 구현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예술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들 중 절대 다수는 원래 예술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저런 목적을 수행할 요량으로 삶과 현실을 기록한 도쿠멘타였고 르포르타주였고 아카이브였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도쿠멘타와 르포르타주 그리고 아카이브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표현이며 범주개념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이외에도 삶이 이미 예술이라는 증언은 많다. 이를테면 예술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이 지워진 상태를 가정해보자. 그 제로 디그리(0도 지점) 상태에서 예술은 무엇일 수 있는가.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을 반성하고 반추하고 곱씹는 자기 강박적 행위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예술행위일 수 있다. 바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한나 다보벤(Hanne Darboven)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람은 캔버스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보통의 시험지(갱지)에 밑도 끝도 없이 숫자를 기록한다. 바로 시간을 기록하고 삶의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팔카는 숫자의 강박적인 기록과 함께 자신의 초상사진을 시간의 변화된 추이를 강조하는 보조 장치로서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공장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삶의 장을 예술로서 제안하는 배동기의 경우는 어떤가. 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술인가 아닌가. 공장에선 작가의 삶이 진행되고 있고(프로세스아트), 작가의 삶이 축적되고 있고(아카이브), 작가의 삶이 전시되고 있다(도쿠멘타와 르포르타주). 가전과 가구에 미학의 옷이 덧입혀지고 있고(프린트아트), 건조대의 세로 라인을 따라 장착된 LED로부터는 인공의 빛이 발해지고 있고(라이트아트), 기계 중 한 대는 랩으로 포장 설치돼 있다(포장미술). 그리고 평소 기능의 효율성을 따라 배열됐던 페인트 통들이 전시를 위해 재배치된다(의미의 재구성). 이 모든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이 화이트큐브가 아닌 공장이라는 삶의 현장성 속에 전시된다(장소특정성). 공장 전체가 전시를 위해 꽤나 그럴듯하게 탈바꿈되는 것(연출).
이로써 공장이 말하자면 삶의 장이며 예술의 장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공장은 삶이든 예술이든 작가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양육되는 형식실험의 장이다. 이처럼 공장을 예술로서 들이미는 작가의 작업이 어려운가. 작가의 제안이 난해한가. 작가의 작업은 그저 작가의 정체성이 발현되는 장이 다름 아닌 공장의 형식을 덧입은 것뿐이고, 그 정체성의 발현체를 제안하고 있는 것뿐이다. 여기서 공장을 예술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누드와 네이키드의 차이를 따져 묻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편의상 누드는 예술의 맥락에 그리고 네이키드는 일상의 맥락에 속해져 있지만, 그 속함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편의적인(그러므로 가변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편의적인 발상을 걷어내고 보면 누드나 네이키드나 발가벗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또 다시 의미부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결국 의미부여의 문제이며, 공장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의미부여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의미부여는 누가 하는가. 여기서 작가는 마르셀 뒤샹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계의 문제를 건드리고 예술계의 실체를 언급한다(예술계의 실체는 특히 조지 디키 George Dickie에 의해서 정식화된 바 있다).
예술은 결국 의미부여의 문제라고 했다. 의미부여는 예술계의 성원들에 의한 공공연하고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수행되며, 그 자제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일정하게는 그 자체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가변적인 것임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마르셀 뒤샹이 물려준 유산 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이런 예술계에 대한 도발일 것이다. 도발이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고, 덩달아 예술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하게 한다. 그러므로 도발은 예술계를 활성화시키는 각성제가 된다. 화재로 소실된 작업실 그대로를 재현하거나 도서관을 통째로 전시하거나 다만 불을 켰다 껐다 할 뿐인 행위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시대에 공장은 어떤 예술적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배동기의 작업은 그렇게 물어온다. 그 질문은 마르셀 뒤샹의 반복인가, 아님 또 다른 형식의 도발인가. ■ 고충환
Vol.20130712e | 배동기展 / BAEDOINGKI / 裵東基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