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

임동식_김성남_구현모展   2013_0703 ▶ 2013_0908

초대일시 / 2013_071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화이트블럭 Gallery White Block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Tel. +82.31.992.4400 www.whiteblock.org

미술작품에서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의 기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예컨대 현재성, 동시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들이 있는 반면, 미래적인 가상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군도 있으며, 지나간 과거의 이미지에 천착하는 작품들도 존재하는데, 각각의 시간에 대한 지향은 작가가 처한 시대와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준다. ● 이번 전시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들은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것으로, 임동식의 경우 과거의 강렬했던 기억을 지속적으로 현재화하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김성남은 태고의 시간을 거슬러 현재의 인간을 재조명하는 작품의 양상을 보여주며, 구현모는 작가의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매혹된 짧은 시간의 지점을 보여준다. ● 세 작가의 시간에 대한 관점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현재 흐르고 있는 시간을 반성하고 반추하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빠른 속도로 급격히 변모하는 세계 속에서 임동식, 김성남, 구현모의 작품은 걸음을 멈추고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특성을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임동식_토끼_캔버스에 유채_182×227cm_200

임동식 : 과거의 시적 현재화 ● 임동식은 1980년대~1990년대 야외 설치작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미술운동의 기획자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1981년에는 '야투(野投)' 프로젝트를 창설하였으며, 1991년에는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을, 1993년에는 공주 원골에서 예술가와 농민들이 함께 하는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그 기간 동안 임동식은 장소특정적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등을 보여주었는데, 이때의 자연에 대한 깊은 시선과 경외심이 이후 회화 작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약 십년전부터 임동식은 미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친구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임동식에게 전망이 좋거나 진기한 형태의 나무가 있는 풍경 등을 소개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이「친구가 권유한 풍경」연작이다. ● 임동식은 다시 화필을 잡은 이래, 풍경화가 기본이 되지만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이는 과거의 경험이나 퍼포먼스 장면을 회고하여 그린 것이다. 예컨대 굴광성 식물인 수선화밭을 지나다가 수선화들이 해가 지는 쪽으로 모두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듯하여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던 경험, 정성으로 기르던 토끼들을 잃고 토끼를 그리워하고 기념하는 퍼포먼스를 했던 경험,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거북이처럼 느리게 살아갈 것을 권유하며 박제 거북이를 등에 이고 엎드려 기어갔던 퍼포먼스의 경험 등은 그의 회화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소재들이다. ● 이밖에도 임동식은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고향 풍경을 떠올리는 작품 등 기억과 연관된 작업을 해 왔다. 임동식이 다루는 시간은 과거이지만, 과거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현재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그에게 기억되는 과거는 '지금 현존하는 과거'로서 의미를 갖는다.

김성남_Red legs_혼합재료_250×291cm_2008

김성남 : 근원기억에의 천착 ● 김성남은 1996년 한전플라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태고적 인류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에 천착해 왔다. 자연과 맞닥뜨린 인간의 생존의지는 직립한 인간의 누드와 동물의 대비로 드러났으며,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 작품들의 제목으로 니체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초인(Übermensch)'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첫 개인전에서 큰 반향을 얻어, 1998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젊은 모색」전의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성곡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 당대의 다른 어떤 작가와도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독특한 작업세계를 구축한 김성남은 2003년 경부터 풍경 연작을 시작했는데, 그의 풍경화는 여느 아름다운 광경을 형상화하는 대부분의 풍경화와는 달리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데뷔시절부터 지금까지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생성과 소멸 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독특한 조형 언어를 개발해 왔다. 그것이 초인을 연상시키는 사람의 모습이든, 동물이든, 숲이나 늪의 모습이든 고래로부터의 인물화, 풍경화와는 다른 의미의 경지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 김성남이 다루고 있는 이미지들은 현대의 이미지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시대라고 특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이미지들은 시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고, 부모의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식의 자식으로 이어져 내려온 긴 인류 역사를 연상케 하는 것들이다. 마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에 정보에 각인된 형상들처럼 보이는 동물과 숲, 인간의 모습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동물을 수렵하여 끼니를 잇지는 않아도 여전히 자연과 대결하고, 인간이기에 다른 생명을 빼앗아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지만 생명을 가진 약한 것들에는 마음을 빼앗기며, 알지 못하는 어두운 숲과도 같은 미지의 영역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태고적 인간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온 인간의 떨어낼 수 없는 속성이다. 김성남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세계 속에 존재해 왔던 인간이라는 테마로 현대인의 삶을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구현모_The Moon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3

구현모 : 강렬한 현재의 매혹 ● 구현모는 회화, 조각, 미디어, 설치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실재와 가상, 안과 밖 등의 개념적 대립쌍을 이용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들은 작가가 경험한 매우 짧고 사소한 시간을 되돌려 의미 있는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 그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Moonlight」는 우연히 발견한 거미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긴 다리를 이용한 움직임의 자태가 무용수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여겨, 달빛 아래 춤추는 듯한 거미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실제로는 막힌 곳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거미의 몸부림이지만, 삽입곡인 베토벤의「월광」의 음률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그 움직임은 마치 한 편의 무용 공연을 보는 느낌이다. 비틀즈의 'Love'가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싱글채널 작품「Love」역시 짧은 순간의 영상으로, 평원에 외로이 선 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몸을 보채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작가는 나무의 흔들림을 마음의 흔들림에 비유하였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화려한 효과나 편집을 사용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이러한 작품들에서, 평범한 현재적 순간이 작가의 손에 의해 간단히 변형되어 소개되는 것만으로 작가의 눈과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작품들은 순간순간 지나가는 경험이 그 자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현재를 지각하며 이해하는 인간의 반성적 태도 속에서 존재한다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망각으로 덧없이 흘러가는 현재가 아니라 머무르게 하여 간직하는 현재, 이 현재의 시간은 구현모라는 작가적 존재에 의해 망각으로 향하는 흐름을 멈추고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것은 구현모가 사용하는 도구들 중 영상기록매체를 통해 그 빛을 발하며, 소위 미디어 아트라고 이름 붙여진 장르가 시류를 넘어설 수 있는 실마리들 중 한 갈래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 이윤희

Vol.20130708f |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