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동호_김명훈_김성진_김원화_김진희_박기일 박안식_박종영_손종준_심성운_이병주_이장원 임동열_장승효_장재록_박귀흠_우상운
관람료 / 미취학 아동(48개월 이상)_1,000원 / 성인_4,000원(단체_2,000원) 학생,군인,청소년_2,000원(학생단체_1,000원) 경기도민 50% 할인, 7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와 그 배우자, 인솔교사 1인 무료 * 단체_20인 이상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_10:00am~07:00pm / 둘째,넷째 월요일 휴관 *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 전시휴무기간 / 2013_0923 ▶ 2013_0929
경기도미술관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초지동 667-1번지) 2층 기획전시실 Tel. +82.31.481.7005,7007 www.gmoma.or.kr
기계, 새로운 꿈을 꾸다. 인간의 새로운 욕망의 꿈을 기계로 실현한다. ● 1. 기계의 순수한 아름다움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도구는 기능의 아름다움과 함께 진화하고 있다. B.C 8000년 전에 최초의 도구를 사용한 인간은 도구에 인간 운동에서 극대화 된 한 부분의 운동 원리를 적용했다. 이후 인류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소재를 이용한 도구의 발달과 기능성의 집약으로 직결되고 도구에서의 기능 다양성은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치며 소재의 변화와 외형적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기계의 발달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형태의 기계를 창조하며 기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심상(心想) : 아름다움, 차가움, 순수, 복잡함, 거대, 파괴를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심상의 종류는 창조물에 대한 강한 집착의 원인이 된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움이라는 심상은 시각, 후각, 청각, 그리고 미적 감각을 종합한 인간 감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의 유연한 라인_line(시각), 윤활유의 냄새(후각), 자동차의 배기음(청각)은 자동차를 더 뜨겁고 강렬하게 만든다. 석기시대의 투박한 돌도끼나 나무 수레바퀴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기계문명은 '산업'이라는 틀 안에서 미적 심상을 배제하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기계는 인간이 인지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새로운 종(種)으로 진화하고, 동시에 기계 특유의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인간 자신을 닮은 '인간형'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심취해왔다. 그리스 조각에서부터 현대의 인간적 기능을 대변한 기계 오브제들은 단지 형태의 변형만 있었을 뿐 내면의 모습은 '인간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전제 이외에도 헤컬(Erich Hekel, 1883~1970)의 주장인 "자연이 곧 예술이다"라는 '자연모방'주제가 존재하지만 헤켈 역시 그러한 주제 안에서도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간의 운동을 닮은 기계들이 뒷받침 하여, 그런 기계들을 통해 인간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꿈꿀 수 있게 된다.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비행기부터 인간의 몸속을 침투하는 초소형 나노머신까지 기계는 기본운동인 '회전운동'을 벗어날 수 없다. 기계 엔진의 회전운동은 동력을 만들어내는 '심장'이다. 이러한 '심장'을 기본으로 인간은 인간 자신 한 부분의 운동을 극대화하여 그 능력을 기계에 부여한다.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하는 행위를 통해 신과 같은 능력을 꿈꾼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불완전한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보고 애증과 불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만든 기계의 완벽한 제어능력, 즉 기계의 순수성에 빠져든다. 불완전한 인간이 기계의 순수성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예술에서도 나타난다. 기계예술 ( machine art , 機械藝術)의 등장은 1934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계미 전시회'를 계기로 미술의 한 장르를 이루었다. 본래 기계란 미적인 표현과는 관계없이 설계·제작되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디자이너·건축가·미술가 등이 독자적인 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기계미는 근대 조형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래주의·구성주의·퓌리슴 등은 기계를 찬미하고, 그 역동성·질서·합목적성·기능·형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의 주장은 기계의 역동성은 순수한 기계 기능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한다. 20세기 초 벨데(H.van de)는 "공학적 고찰의 세계에는 아무런 추한 것이 없다. 모든 기계·기구는 건축이나 공예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정녕 그 진리에 입각한 감동적인 형태는 새로운 미래의 아름다움을 감정적으로 기대하던 사람들을 흥분시키거나 감동시켰다"고 하였다. 이렇듯 많은 건축가들은 기계와 그 미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V.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계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 후 기계예술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라고 인식되었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예술을 통해 기능이라는 심미적 가치를 표현하였다. 예술은 순수 기계 기능성에 동조하며 인간사회 역설적 모순을 비판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계는 차가움을 간직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며, 완전한 인간형을 꿈꾸는 창조물이다.
2. 기계 : 인간=1:1_인간의 도구의 발달 ● 인류역사의 초기에는 우연적인 도구제작과 시행착오적 단계도 있었을 것이나 마침내 인류는 갖가지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지는 요인으로는 첫째, 인간의 생존에 있어 도구를 필수 불가결하게 만드는 '외적상황' 둘째, 도구의 제작과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신체적 메커니즘'의 작용이 있다. 첫째, 인간의 생존에 있어 '외적상황'은 수렵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 목적성은 기계의 외적분류와 동일하다. 자동차, 선박, 비행기, 공구, 컴퓨터등 목적을 기분으로 분류되는 기계들은 인간의 수단을 대신하여 외형적 형태가 변화되고 새로운 종(種)이 탄생되는 중요한 의를 갖는다. 둘째 '신체적 메커니즘'은 인간이 가진 운동성을 기계에게 부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어떠한 종의 기계라도 신체적 운동 원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엔진, 모터, CPU, 제어장치 등도 역시 기계의 운동성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작용(作俑)제 역할을 한다. 기계 운동장치 구현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신체 모델을 통해 기계의 구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계의 운동력은 '회전운동'에서 비롯된다. 초기에는 작은 힘을 극대화 하는 바퀴(원)운동 원리만이 작용했지만, 산업혁명 이후 톱니와 기어의 등장으로 바퀴(원)운동을 직선, 곡선, 수직, 수평으로 변화할 수 있게끔 하는 원리를 발견했고, 이 때문에 유압, 수증기의 압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운동 에너지의 극단적 상상력을 더한 무기체계와 그러한 무기의 구동력은 인류에게 '기계 공업'을 가능하게 했다. 현대의 많은 기계와 반도체의 원리를 보면 초기 바퀴(원)운동의 시간성, 연속성, 기능성을 어떻게 순차적인 신호로 제어 가능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반도체라는 집적체(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集積回路])는 무수한 신호를 암호화하고 집약한 물건이다. 결과적으로는 인간이 반도체에게 순차적으로 신호를 주는 것이지만 마치 기계가 기계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는 듯이 보인다. 기계의 이러한 반도체(집적체)제어와 자기기능 및 연산 활동을 보면서 인간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를 상상하게 된다. 기계의 움직임은 예술 안에서 새로운 오브제로 발견된다. 움직이는 오브제는 보는 관람자를 시각적 반응자 또는 움직임의 촉발자로 만들어 작품의 효과창출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20세기 미술 안에서 움직이는 오브제는 하나의 틀 안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 관객은 시각적 반응과 신체적 행위에 의한 참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오브제들을 조작해 봄으로써 창조력을 발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기계 : 인간 = 1 : 1』파트는 작품 안에서만 작용하는 관계성(인간과 기계)보다는 사회적으로 우리가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느끼는 많은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다. 작게는 컴퓨터 자판이나 마우스를 통해 정보를 얻는 행위에서부터 대형 플랜트 기계를 조작하는 통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기계와 인간은 서로의 운동을 통해 하나의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기계는 어느덧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이끌어 냈으며,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상호작용이라는 논지를 작품 안에서 관람객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였다. 이렇게 21세기 예술 안의 기계장치를 이용한 작품을 키네틱 아트(Kinetic Art)같이 특정한 범위의 의미로 규정짓기 보다는 선택된 오브제의 차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기계에 대한 순수한 동경에서 출발하는 외형적 형상을 빌려 내면적 메카닉(움직임)을 차용한 작품 안에서 소통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관람객뿐만 아니라 작가가 기계구조를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말하는 '예술작품의 제작과정 또한 하나의 예술적 결과물'이라는 개념과 상통한다. 물론 하나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 현대사회에 반(反)하는 행위자체가 예술적 반론이 될 수 있으나,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러한 논지보다는 기계와 인간사이의 접점에 대한 고민과 사회 속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으로 기계적 메카니즘을 이용한 '예술반론(藝術反論)'이라 하겠다. 이후 전개되는 『기계 독립과 사회성』이라는 공간에서는 표면적 접근에서 내면적 예술 수용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이 공간은 기계가 미래사회를 지배한다는 디스토피아 공산과학 같은 부정적 내용도 아니며 휴머노이드의 핑크빛 유토피아를 꿈꾸는 긍정적인 내용도 아닌,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 안에서 각자의 역할만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기계적 부속품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인간이 기계에 단지 인간의 욕망만을 투영해 기계 자체를 차가운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냉혈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객관적 자기인식을 취한다고 믿는다.
3. 기계의 독립_기계의 긍정적 부정적 미래 ● 앞서 본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서 출발한 기계구조는 우리의 삶속에 녹아있다. 사회의 시스템 자체도 하나의 거대한 기계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 속한 인간의 역할은 세분화되고 가용기한을 간직한 부품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더 인간의 사회 역시 기계적 메커니즘을 담고 있다. 기계의 복잡한 알고리즘(algorithm)과 인간이 사회 구조 속 형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구조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사회의 법, 규칙, 시스템은 기계적 메커니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입력된 제어명령을 통해 움직이고 행동하는 기계의 프로세스는 인간의 사회처럼 법과 규칙으로 움직이며, 작동 프로세스의 오류는 기계를 멈추는 원인이 된다. 인간의 사회구조가 기계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이 철학, 도덕, 감정이라는 제한요소를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지만, 사회의 시스템을 해석하는 맥락에서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한 예로 도로의 신호체계 안에서 사인을 무시하고 운전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인다면 교통사고가 발생하며 사고의 결과는 도로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처럼 기계적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이 제시한 기계의 명령은 원칙에 의한 명령체계이다.
인간이 창조한 기계와의 미래사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 밖의 기계들이 스스로를 자위적 조치로 인간을 지배한다는 측면이다. 둘째로는 인간과 기계의 소통이 긍정적으로 가능하며, 기계 자체로 인성(人性)을 갖고 인간과 동등한 사고가 가능하다는 예측이다. 둘째의 긍정적 견해로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차가움을 느끼기 보다는 첫째의 부정적 견해로 인한 반기계론이 사회불안성을 야기한다. 하지만 많은 가설을 통해 실현가능성이 희박함을 제시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공상과학 영화와 소설의 이야기는 인간이 상상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부정적 꿈이 기계라는 대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는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를 기계라는 대상으로 의인화 하였을 뿐이다. 기계의 움직임은 인간이 만들어낸 프로그래밍 안에서 그 생명력을 갖는다. 기계 홀로 무엇인가 판단하고 사고하는 모습은 인간이 제시한 알고리즘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제어기능을 파과하고 자율연산을 한다는 가설은 희박하다. 물론 기계가 스스로 연산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사고능력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자율적 연산이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인간 스스로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며 기계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 연산 자체도 인간이 제시한 사고능력 안에만 존재하며, 사고능력이라는 것도 인간 사고능력이지 또 다른 종의 사고능력은 아니다. 기계의 연산이 인간의 예상범위를 넘어서는 당황함은 조물주가 인간을 프로그래밍하고 창조하였으나 그 연산범위를 뛰어넘는 돌발행위가 인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같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도 신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정적 논지는 독일의 과학자 프란츠 르로(Franze.Rulo)의 가설로 설명된다.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을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기계에 대하여 이를 불신하거나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기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결여 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체계적인 구조분석 및 기계운동에 관한 새로운 미학적 해석을 발표한 이론 운동학을 전제로 지적하고 있다. 두 가지 이론을 바탕으로 전제되는데 첫째, 기계란 무한한 자유 하에 작용하면서 반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자연의 힘에 대하여 법칙과 질서를 부과하는 것이며, 변칙적인 자연의 힘을 세련되고 규제된 운동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즉 운동의 연결과 운동의 원리는 인간의 손과 발, 지각기능의 모방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인간적 기능에 국한되는 것이다. 둘째, 기계의 회전운동(Rotary motion)에 대한 지적이다. 기계는 회전이라는 원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무수한 회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인간에 영혼이 있어 육체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의 영혼은 회전에 있으며 기계 운동, 그 자체를 지배한다.'라고 한다, 즉 기계 회전운동의 원동력으로 움직이며, 그 회전력을 제어하는 것이 기계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된다. 쉬운 예로 자동차의 엔진이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는 자동차의 생명력이 정지되며, 그 기계는 효용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계의 형태가 새로운 종의 모습으로 보인다 해도 그 내면의 매커니즘과 운동기능의 원형은 인간자체 모방과 극대화한 인간기능의 실현이다. 이 전시에 등장하는 예술작품들의 외형적 측면이 기계적 모습이라 해도 인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기계적으로 등장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기계자체의 기능이 인간을 표상으로 존재하는 한 이 기능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SF저널리스트이며, 공상과학작가인 제이가몬(Jay Gamon)은 "공상과학 소설 속의 거대로봇은 멍청한 생각인가?"라는 컬럼에서 로봇의 직립보행, 도구사용, 휴머노이드(humanoid)는 불필요한 생각이며,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라 지적한다. 그의 세 가지 전제는 인간기능의 극대화한 기계의 순기능에 대한 이론으로 험한 지형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에서 직립보행보다는 바퀴나 궤도를 이용하는 것이 능동적이며, 거대 로봇을 제작하는 마당에 두 손을 주고 무기를 들고 조작하는 번거로움은 그 효율성이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간보다 뛰어난 연산과 이해력(?)으로 독립적 행동을 하는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지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 되며, 그 연산의 제한이 인간을 넘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 즉 프란츠 르로가 지적하는 인간모방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전제로 이해된다. 휴머노이드 스스로 자기 방어적 수단을 치르기 이전에 인간 방어적 조취를 취할 전제가 높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목숨을 담보로 미래의 도박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위의 논지와는 달리 인간의 예술은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확장되고 움직이고 있다. 예술속의 창의적 상상력과 가능성이라는 희망은 언제나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며, 그 능력을 실현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라는 것 자체도 인간의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중심의 사고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과 과학 테크놀리지가 하나의 결합이라는 것 자체가 동떨어진 지점이 있으나(과학적 논증과 예술적 감각성의 차이) 그 상상력을 현실적 논증으로 막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꿈을 꾼다. 새로운 생명력을 바탕으로 말이다.
이 전시에 모인 17명의 작가는 인간 사회 속에 존재하며 그 매커니즘을 통해 예술이라는 언어로 호소한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긍극적 목표를 이룩하고자 창조한다. 그렇다면 전시에 등장하는 기계들이 거대하거나 비예술적 오브제를 사용한다고 예술이 아닌 기계의 모방이라는 논지는 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수예술이나 키네틱, 기계미학으로 정의되는 미적 논지보다는 현실을 수용한 예술가들의 태도가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을 보며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안드로이드가 아닌 순수한 인간이 관람자이며, 인간이 창조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 최기영
Vol.20130705i | 기계, 생명을 꿈꾸다 Machine, Dreaming of Lif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