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정지현展 / JOUNGJIHYUN / 丁智賢 / photography   2013_0626 ▶ 2013_0702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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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26_수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그녀의 자리, 사진의 사회적 자리1. 도구로서의 카메라와 사진의 사회적 기능 배가 둥글게 앞으로 나온 임산부의 몸. 정지현의 사진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여성의 몸을 일상에서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마주친 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드물지 않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보지 못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몸에 대한 지각이나 인식이 거의 전적으로 의료 권력이나 뷰티 산업에 위임된 현 상황에서 임신한 여성의 몸은 병원이나 사적 공간인 (즉 사적 공간이라고 간주된!) 집안을 제외한 모든 장소에서 비가시적이 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임신한 여성의 몸은 우리가 늘 봐오지만(voir) 보지(regarder) 않는, 그래서 카메라의 눈을 빌어서까지 특별하게 포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몸이다. 꼭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진의 역사에서 임신한 여성의 몸이 피사체로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다거나 (즉 유혹적이지 않다거나, 왜냐하면 이미 누군가와 접촉했음이 너무 역력하니까), 글쎄 인류학적 관심 안에서라면 몰라도 ... 음... 사회학적으로 주목을 받기에는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에 ... 등등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09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12

문화자본의 관점에서 예술의 생산과 유통, 향유를 분석했던 부르디외는 사진 행위의 의도나 동기를 심리학에서 찾으려는 모든 태도를 경계하면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사진은 기술의 발명으로 탄생했다. 기술의 발명품인 카메라는 일차적으로 도구이며, 도구로서 삶의 일상적 현장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사진은 사회적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말은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사진의 정의를 둘러싸고 이전에 벌어진 논쟁들을 어느 정도 진부하게 만드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질서의 역사 속에서 차곡차곡 그 의미를 제도적으로 축적하며 가치를 본질화해 온 다른 전통적인 예술 장르와는 달리 사진은 근본적으로 배타적인 미학문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사진이 발명 초기에 그토록 빨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초상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그 민주적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현재도 사진은 다른 예술보다는 한결 더 미학적 규범이 아닌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 사회적 규범은 미학적 규범과 나란히 사진으로 찍혀야 하는 것과 사진으로 찍힐 수 있는 것을 규정한다. 이것은 카메라를 일상의 의례화를 위해 사용하는 '아마추어'나 전업 사진가에게서 더 명백하지만 사진'작가'들의 경우에도 은밀하게 작용한다. ● 1839년 발명된 이후 19세기 내내 예술성 논란에 휩싸여 있던 사진은 21세기 디지털 이미지 산업 시대에 이르러 무소불위의 지위를 자랑하는 예술'상품'이 되었다. 사진 행위에 작용하는 사회적‧ 미학적 규범이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포획되는 속도 역시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이 이미지 산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신한 여성의 몸, 스타가 아닌 일반 여성의 부른 배가 사진으로 찍혀야 할 필연성이나 찍힐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정지현의 사진들은 어떤 의제를 제안하고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장으로 전개된다. 이 사진들은 수동적으로 보고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견해'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다.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11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08

2. 집안: 공공의 공백, 그녀에게 그녀가 없는 자리 ● 정지현의 사진들에서 임신한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살림의 공간에 일종의 가구처럼 앉아있거나 서있다. 전형적인 인물사진과는 달리 그녀들은 전혀 클로즈업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어떤 정동적(affective) 감흥도 자극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히 사적인 표정을 짓거나 공적인 발언을 하는 대신 약간의 익숙함과 약간의 어색함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그 공간과 자신의 관계를 질문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 "사진을 가정에서 찍는 일이 등장한 것은 공공질서에 속하는 것과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 사이의 보다 정확한 구별이 등장한 것과 일치한다." 부르디외의 이 말은 정지현의 사진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근대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하기 전에 사진을 찍고 보관하고 다시 꺼내보는 (혹은 전시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통합을 강화시키는 의례였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구분됨에 따라 사진은 점점 더 사적 기록물이 되거나 예술/상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시간의 파괴적 힘으로부터의 보호, 다른 이와의 소통과 감정의 표현, 자아실현, 사회적 위세, 오락 또는 도피'라는 심리학적 동기가 더욱 일상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묻는 지표적 질문의 자리에 '얼마나 아름답게, 얼마나 특이하게' 이미지를 채집하거나(image taking) 만들었냐는(image making) 형상화의 질문이 들어서게 되었다. 사진은 점점 더 재현(re-presentation)의 '굴레'를 벗어나 이미지들의 자유분방한 소우주를 창조하려 한다. 그 자유분방함에 뒷심을 대주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산업 논리를 노골적으로 앞세운 채. ● 정지현의 사진들은 예술적 의도를 내세우지도, 진실 탐구라는 지표적 과제를 수행하지도, 사진의 기술적 가능성 그 자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예술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도 않는다. 이 사진들은 예술작업의 미학적 차원을 사회적‧ 정치적 차원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며, 이 시도는 사진의 기술적 가능성을 통해 지각과 의식구조의 혁명을 꾀함으로써가 아니라 사진의 '사회적' 기능 혹은 자리를 환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늘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모습(appearance)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이 모습이 위치한 맥락을 짚어보자고 청한다. 사진은 스스로를 잠재적 공론장으로 제공한다. 1990년 이래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눈에 띠게 활발해지면서 임신, 출산, 양육 등 살림이 행해지는 가정은 더 이상 일/터와 무관하지 않은 곳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기업경쟁력의 향상을 위해서건 인구 재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생활영역과 경제영역을 함께 고려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성을 가정에, 남성을 일터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젠더화되어 있는 공‧사 구분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에서 일터는 단순히 경제적인 영역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많은 여성들이 개별적으로 사회적‧ 정치경제적 주체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의 주체성은 '여성'이라는 기호를 구축하고 있는 상징질서체계와 변함없이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09

정지현의 임산부들은 사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다시 집안이라는 프레임에, 그리고 또 다시 닫힌 창문 안에, 거울에 반사된 결혼사진 안에 '갇혀' 있다. 이 갇힘은 그녀들 개개인의 사적 생활조건이 아니라 공공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에서 연유한다. 여전히 가정은 사적 영역이고 사적 영역은 '공공의 공백'으로 의미화되는 질서체계 안에서 임신한 몸으로 tv 앞에 앉아있거나 혹은 부엌에 서있는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박탈된 '외부'를 건조하게 응시한다. 결혼 이주여성으로 보이는 한 임산부의 손에는 리모콘이 들려있고 그녀 앞에 켜 있는 tv에서는 제주도 은갈치 광고가 명멸하고 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이 은갈치 광고인지 아니면 창 밖 '너머'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녀의 리모콘은 오히려 그 '너머'를 끌어당기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과연 저 창밖 '외부'가 방안으로, 이 '내부'로 들어올 수 있을까. 벤야민은 사진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발명이 가져온 이미지 재생산의 미학-정치적 효과를 무엇보다도 보고 싶은 대상을 가까이 끌어당길 수 있는 가능성에서 보았다. 정지현의 사진이 담고 있는 이 이방인 임산부의 시선에서 사진의 그러한 가능성과 사회적 현실의 불/가능성이 교차한다. 아마도 이 장면을 카메라의 눈으로 정지시키면서 정지현이 느꼈을 이율배반적 고통을 사진을 보는 나도 느낀다.

정지현_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 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10

당대 한국사회에서 임신한 여성의 몸은 가장 복합적인 의미투쟁의 장소가 되고 있다. 점점 불러오는 이 배에는 국가의 인구정책이, 기업의 미래 인적자원이,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경쟁논리가, 숭고한 희생을 칭송하는 가부장제의 모성 신화가 켜켜로 얽혀있다. 사람들 '사이'에 세계가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세계 '내' 실존이야말로 공공선과 정의를 향한 정치적 열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다. 어머니 되기가 '외부'로부터의, '사람들'로부터의, 공론장으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한다면, 그로써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self)가 아닐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정지현의 전시회가 "미영 은정 현주 그리고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에 주목하자.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인 미영 은정 현주 지영은 자기만의 개성과 주체성을 지닌 개별 여성이 아니다. 이름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기의를 가리키지 않은 채, 아니 못한 채 공허한 기표로 나열될 뿐이다. '그리고 ...'는 이 나열의 임의성을 보여준다. 이 '그리고'에 해당되는 여성들이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 자리, 자신의 장소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장. 이것이 정지현의 사진들이다. ● 디지털 시대에 사진/행위의 동기, 의미, 결과물 등은 19세기 혹은 20세기에 사진의 사회적 속성을 논할 때와는 매우 다른 상황과 맥락에 처해 있다. 누구의 손에나 들려 있는 스마트 폰은 확장된 신체가 된지 오래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모든 임의의 '누구나'는 이미지 채집자 내지는 생산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사회적 자리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도구로서의 카메라, 그리고 미학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누구든 생산자로 만드는 '중간 예술'로서의 사진 - 사진의 이 기본 존재조건은 사진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따르는 사회규범에 대해 견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론장이 되게 만든다. 정지현의 사진이 요란하지 않게 펼친 이 공론장이 소중하다. ■ 김영옥

Vol.20130626f | 정지현展 / JOUNGJIHYUN / 丁智賢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