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 交感

최정희展 / CHOIJUNGHEE / 崔汀熙 / painting   2013_0626 ▶ 2013_0702

최정희_교감-소안도에서1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최정희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626_수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GMA GALLERY GMA 서울 종로구 율곡로 1(사간동 126-3번지) 2층 Tel. +82.2.725.0040 artmuse.gwangju.go.kr

자연이 생성하는 풀들, 인간이 만들어낸 글자, 그리고 그 의미를 교감하려는 작가 최정희 ● 일견하기에 최정희 작가의 작품은 가장 오래된 예술론이라 할 수 있는 예술모방론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n, BC 428/427-BC 348/347)이 확립한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를 거치고 르네상스를 지나 19세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생명력을 이어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정희 작가의 작품을 이 예술론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 예술모방론을 확립한 플라톤의 사상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데아론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가 세계를, 이데아계와 현상계처럼, 둘로 나누고 전자야 말로 참다운 세계이자, 본질적인 세계라 주장하며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말하자면 허상과 같은, 공허한 세계일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이데아의 그림자인, 감각적 현상의 세계를 모방하는 예술은 참다운 인식의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은 가치 없는 인간의 활동이 된다. 하지만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 점에서는 스승의 것을 이어받고 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관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에이도스(eidos)라 부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본질까지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즉 예술은 이 에이도스를 모방함으로써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연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자연은 우연성과 허위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본래의 자태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최정희_교감1_캔버스에 유채_40×120cm_2013
최정희_교감2_캔버스에 유채_40×120cm_2013

이렇게 볼 때 최정희 작가의 작품은 이 둘 어디에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로 그리는 풀들의 그림들이 플라톤이 말하는 사물의 단순한 외관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사물의 에이도스를 모방한다고 보기도, 즉 자연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는 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자로 된 글씨인 추사체도 있으며, 풀들도 때론 둥근 원들 안에 때론 그 원들 바깥에서 부분들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정희_교감-빗방울을 통해서..._캔버스에 유채_160×160cm_2013

이에 필자는 작가가 자연주의미술, 추상미술, 미디어아트 등 모든 종류의 미술형태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당대의 작가임을 먼저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단토가 말한 것처럼, 모든 미술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미술작품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써 첫 번째는 그 작품이 어떤 것에 관한 것인지, 두 번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지이다.

최정희_교감3_캔버스에 유채_40×160cm_2013

최정희 작가의 이번 작품에는 둥근 원들이 캔버스에 점점이 있고 그 안에 자연에서 자라나는 풀들의 그려져 있다. 이와 한 쌍을 이루는 다른 작품에는 정 반대로 둥근 원들에는 빈 캔버스만 있고 원들의 바깥에는 풀들이 있어서, 만약 이 두 개의 캔버스를 겹쳐서 볼 수 있다면, 정확히 하나의 완전한 풀숲이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원들이다. 이 원들을 각각 하나씩 개별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각각의 원안에 들어 있는 풀들이 캔버스 전체에 그려진 풀들보다 더욱 생생하게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작가가 우리의 시각적 선(optical line), 즉 시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맨 처음 인식한 사람은 르네상스의 시대의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였다. 그는 보는 것에는 오직 하나의 분명하고 뚜렷한 시각만이 존재하며 그 주변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흐릿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최정희 작가는 이것을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원 안에 들어 있는 풀들을 보다 자세히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쌍의 반대로 된 작품을 둠으로써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강조함과 동시에 시선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신 한번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풀을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서양의 신플라톤주의 사상가인 플로티누스(Plotinus, c. 204/5 - 270), 그리고 동양의 장자(莊子, BC 4C)의 사상을 예로 들고자 한다. 플로티누스는 모든 것이, 마치 샘에서 물이 자연스레 넘쳐흐르듯, 일자(the One)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일자의 성분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도교에서 신성시되는 장자 역시 인간뿐만 아니라 풀, 심지어 돌에서 조차도 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연의 모든 것에는 어떤 질서나 섭리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최정희 작가는 자연에서 하찮게 보이는 풀을 소재로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이치가 깃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우리의 시선에서 간과되고 있는,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원을 통하여 강조함으로써 자연의 세부적이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함께 최정희 작가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글자 중 하나이자 풀과 비슷한 모양의 추사체를 그림에 포함함으로써 글자 자체에 담긴 하나 하나의 이치와 의미의 소중함을 상기시키고, 나아가 자연이 생성하는 풀들의 이치와 인간이 만들어낸 글씨의 그것이 같음을 관객과 교감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병헌

Vol.20130625f | 최정희展 / CHOIJUNGHEE / 崔汀熙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