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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2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토요일_11:00am~03:00pm / 일요일_예약관람만 가능
153 갤러리 153 GALLERY 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 251 운창빌딩 B1(반포동 57-3번지) Tel. +82.2.599.0960 www.153gallery.com
탈회화적 post-painterly 추상의 경계로부터. ● 20세기 초 미술계 전반을 아울렀던 다양한 사조들의 동시 다발적인 발현에는 공통된 개념 하나가 관통하고 있다. 다름아닌 모더니즘이다. 시각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이란 캔버스의 깊이감을 거부하고 평면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캔버스의 화면으로부터 공간적 깊이를 제거해 나가야 한다는 운동을 의미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재현해 왔던 미술이 화면의 평면성을 돋보이게 해야 할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 미술의 형식 가운데 하나가 추상이다. 당대 추상미술의 대표주자로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를 꼽을 수 있다. 완벽한 비구상의 형태를 보이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적어도 이 둘은 각각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으로써 이전 미술과의 차이를 보이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이란 말은 아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기초개념 Principles of art history」에서 역설한 회화와 건축에서의 기초적인 미술사적 개념으로부터 차용된 표현이다. 이 책에서 뵐플린은 회화와 건축의 다섯 가지 개념을 짝지어 정리하면서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미술을 선적인 미술과 회화적인 미술이라고 구분하였고 이러한 구분은 그린버그에 의해 추상미술의 온도감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상적인 이미지 속에서의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이 추상미술로 넘어오면서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으로 그 개념들이 진화되었으며 모더니즘 하에서는 선적인 추상을 차가운 추상으로, 회화적인 추상을 뜨거운 추상으로 특징짓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과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세계대전의 역사적 흐름에 밀려 잭슨 폴록을 위시한 미국과 캐나다 작가들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하는 파괴적 혁신에 추상미술의 권좌를 내주게 된다. 하지만 하지만 "회화의 화면은 평면이다" 라는 슬로건의 관점에서 좀 더 엄격히 본다면, 화면의 평면성을 철저하게 수행했다는 추상표현주의 작품 조차도 지지체와 물감 사이의 미세한 간극이 남아 있다. 결국 이 추상의 단계는 보다 완벽한 평면성의 추구를 꾀하게 되며, 이때 등장한 것이 1964년 그린버그에 의해 기획된 전시에서 등장하는 탈회화적 추상 post-painterly abstract이다. 선적인 것과 회화적이라는 개념은 또 다시 추상미술 속에서 보다 세분화되어 적용된다. 추상표현주의가 회화적이라고 한다면 그린버그의 탈회화적 추상은 선적인 추상인 것이다. 탈회화적 추상은 경계가 뚜렷하고 색채 또한 명확하여 최소한의 환영을 제거하면서 추상표현주의가 맺고 있던 일말의 회화적 속성과도 단절하고자 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하명은 작품세계가 출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팝아트가 아닌 탈회화적 추상으로. 일반적으로 하명은의 작품은 팝아트로 분류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작가의 행위가 최소화되고 작품의 마티에르가 매끈하며 화면에서의 공간감을 제거하려는 점과 대량생산적인 요소들의 등장 등이 일견 팝아트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품 속 이미지들이 주는 일종의 선입견에 의해 하명은의 작품들이 팝아트의 대표적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데, 이런 까닭에 그녀의 작품들은 쉽게 팝아트로 범주화된다. 또한 추상은 아니더라도 팝아트는 탈회화적 개념과 일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 역시 하명은의 작품세계를 팝아트로 범주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중요한 몇 가지가 간과된 오류라고 본다. 팝아트와 탈회화적 추상의 개념적 혼돈 속에서 하명은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가치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하명은 개인전은 그녀의 작품들을 팝아트의 울타리에서 꺼내어 '탈회화적 추상'의 가치로서 재조명하는데 그 의미를 갖는다. 만일 그녀의 작품세계에 스스로가 언급했던 키치나 페티시만 존재한다면 팝아트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의 결과를 모방한다는 키치의 과정이 엄연히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과정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 과정은 보다 더 정교한 평면성의 탐구를 위한 것이며 모더니즘의 맥락을 잇는 추진체와도 같다. 따라서 하명은의 작품세계에서 팝아트적인 과정이 존재할 뿐 궁극적으로 그녀가 추구하는 화면은 '탈회화적 추상' 혹은 광의로서의 '탈회화적 그림' 인 것이다.
'탈회화적 추상'은 선적인 요소와 선명한 색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개방적인 요소다. 뵐플린의 개방적 원리는 선적인 요소와 짝을 이루고 있지만 그린버그는 탈회화적 추상의 성격을 개방성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하명은의 작품에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탈회화적 추상의 원리다. 작가는 대가들의 작품으로부터 과감하게 잘라낸 이미지 조각들을 한없이 확장하여 붙여나갈 수 있도록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브러시 시리즈」 같은 경우, 두꺼운 경계선들과 명료한 색채들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지만 조각난 이미지들의 형태에 몰입하다 보면 이 이미지 조각들이 구성되어 있는 상황을 인지하는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의 대작을 패러디 했다거나 키치적으로 작업을 했다거나 하는 감상의 혼란이 생기는 결과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평면성 획득의 공로자인 미니멀리즘과 프랭크 스텔라의 변형캔버스를 떠올리기만 한다면, 하명은의 작품들을 미술사적인 시간의 축적 위에 세워진 가장 현대미술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보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만을 남기기 위해 최소한의 색채와 단순한 형태의 골격만을 표현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티를 달성하고자 한다. 이는 하명은의 작품을 통해 보다 노골화됨을 볼 수 있다. 대가의 작품들을 거침없이 재단해 나간 작가의 행위 때문이다. 작가 하명은은 맹랑하게도 대가의 작품들을 하나의 사물로 보고 그 사물의 본질을 뽑아 자신의 작품의 본질 일부로 재구성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개념을 자신의 작업 행위에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을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프랭크 스텔라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캔버스 바닥 위에 그려지는 그림은 어떻게 표현을 해도 화면과 그림 사이의 미세한 공간감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예 이 조차도 제거하겠다는 것이 스텔라의 변형캔버스다. 결국 변형 캔버스는 그림의 환영효과를 없애기 위해 화면에 그려진 형태대로 캔버스를 잘라낸 그림을 사물로 만들어 버린 결과인 것이다. 하명은의 작품들이 이미지의 모양대로 잘라낸 것 또한 이러한 차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명은의 조각난 화면과 스텔라의 변형캔버스는 엄연히 다르다. 그녀는 대가의 작품들을 사물로 선택한다는 생각을 우선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명은은 가장 동시대적인 상황이나 경향을 담아 내는데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서양의 팝아트 작품들을 선택하고, 그 가운데서 가장 작품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이미지들을 잘라내어, 그것들을 물성에 가깝게 제작한 다음, 물리적으로 개방시켜 나감으로써 구상적이지 않은 형태들을 만들어 간다. 모더니즘에서부터 개념을 팔아야 한다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에 이르기 까지 긴 역사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모더니즘의 평면성 획득이라고 하는 미술사적 개념을 가장 현대미술적인 개념으로 풀어냄으로써 말이다.
탈회화적 추상으로부터의 확장. 하명은의 작품들은 '탈회화적 추상'에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그 너머의 새로운 개념을 향해 전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우 구상적인 이미지 요소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들을 추상으로 아우르는 것은 바로 하명은의 탈회화적 작품들이 갖는 확장성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 가운데 이러한 확장성의 전조를 보이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브러시 트리 2013」 이다. 브러시의 조각들이 변형캔버스 모습으로 얼기설기 엮어져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지더니 이 작품들을 또 다시 하나 둘 엮어내어 브러시 트리라는 대강의 평면 설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뵐플린의 다양성과 통일성 모두를 펼쳐 놓았다고 해도 될 만큼 작가의 개념은 이미 탈회화적인 추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명료한 색채의 가지들이 브러시의 이미지들로 구축된 작품들을 마치 열매처럼 혹은 잎사귀처럼 연결해 놓고 있다. 이 작품은 지극히 모더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며 그리로부터 현대미술의 다양한 개념들이 뻗어 나와 하명은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되어 나아갈 지를 시사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탈회화적 추상으로부터 확장될 그 무엇에 대한 기대는 간헐적으로 제작된 인물시리즈나 낯익은 이미지들의 구상작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완성된 예술 작품을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는 행위에 있어서 인물이든 구상이미지든 모두가 하명은 작가에게는 이미 오브제이다. 이는 선택과 구성 그리고 구성의 확장이 그녀 작업의 행위적 핵심이자 모더니즘의 평면성과 현대미술의 개념 수립이라는 사고의 행위적 핵심임을 가로지르는 가장 근본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세계다. 따라서 그녀에게 보이는 현실 속 리얼리티는 또 다른 추상이고 그녀의 추상들은 리얼리티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하명은 작가의 작품을 팝아트로 한정 짓기에는 작품은 물론 작가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 많은 오류를 감수해야만 한다. 분명 그녀의 작품에는 일부 팝아트적인 생산의 익명성이나 선명한 선과 색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외형상의 접근일 뿐 개념과 작업 행위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탈회화적 추상과 그 추상을 너머 구상까지 아우르는 탈회화적 회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키치, 패러디, 페티시 등 사실 이 모든 것들이 팝아트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하명은의 탈회화적 그림들은 팝아트의 속성을 함께 갖는 21세기형 모더니즘의 새로운 형식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하명은은 탈회화적 작품세계에서 확장되어갈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 김민성
Vol.20130625b | 하명은展 / HAMYOUNGEUN / 河明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