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un)familiar

2013_0624 ▶ 2013_0703

초대일시 / 2013_0624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해진_문지현_송원지_이선옥_이수영_임지현

주최 / 경성대학교 대학원 문화기획행정이론학과_전시공간경영연구 실습기획 기획 / 박대엽_손아영_이보리_이언지_이은경_정유미 (경성대학교 대학원 문화기획행정이론학과 석사과정 재학생) 후원 / 부산프린지네트워크

관람시간 / 11:00am~07:00pm

미광화랑 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 701-3번지 Tel. +82.51.758.2247 www.mkart.co.kr

섬세하거나 거칠거나, 마음을 헤아리거나 풍경을 더듬거나, 친근하거나 낯설거나, 혹은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 우리는 언제나 이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길을 잃는다.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의 면면은 잘 알려져 있거나 낯설거나 그렇다. 그들의 작품 역시 자신에게나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그들과 우리는 자신을 묻고 세계에 대응한다. ● 그들의 질문을 우리의 질문으로 만들고, 그들의 익숙함을 우리의 낯섦으로, 그들의 익숙하지 않음을 우리의 친숙함으로 만나는 설렘이야말로 일상을 풍부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는 작가/작품에 기대서 세계를 보고 세상의 깊이에 가 닿거나 그 속에서 헤맬 것이다. ■ 강선학

김해진_옥상5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2
김해진_옥상6_캔버스에 유채_37.5×45cm_2012

우리 안의 낯선 추억, 낯선 풍경 ● 처음으로 김해진 작가의 작품과 마주한 것은 어떤 병아리에 대한 기억이다. 정확하게는 폐허 속에 거대하게 서 있는 병아리의 모습을 간직한 그림이었다. 병아리는 순수하고 약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림 「버려진 풍경2」에서처럼 커다랗고 무표정한 시선의 병아리가 버려지고 낡아버린 아파트 같은 건물 위로 뜬금없이 서 있다. 건물은 여러 군데 금이 가 있고, 원래 문이었고 창이었던 자리에는 어두움만이 가득하며, 건물이 둘러싼 바닥의 흥건한 물은 핏빛 그림자를 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 「버려진 기억3」에서 병아리는 이제 건물로 들어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듯, 층과 층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이 노란 병아리와 함께 작가가 그린 낯선 풍경 속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곳은 '옥상'이라는 공간이다. ● 회상해 보건데, 옥상은 1970~80년대만 해도 우리와 매우 밀접한 생활공간이었다. 화초나 작물을 키우던 작은 화분들이 즐비했고, 역기나 샌드백 같은 운동 기구를 갖다 놓고 운동도 했으며, 심지어 밤에 친구와 함께 별을 올려다보는 곳이었고,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오르락내리락 거리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집, 특히 주택이라는 장소의 보이지 않는 민낯이 되었다. ● 어느덧 옥상은 추억이 사라지고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추억을 더듬는 작가의 시선은 작은 곳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함으로 점철된다. 그림 「옥상5」는 에어컨 환풍기가 세월의 때와 함께 녹슬어 있고, 오른쪽 한켠 구석에는 엎어 놓은 담갈색 통 안에 고양이가 꼬리만 내어 놓고 숨어 있다. 그림 「옥상6」에서는 샌드백이 옥상 왼편 끝에 하릴 없이 매달려 있는 모습과 군데군데 고여 있는 물웅덩이마저 놓치지 않는다. 정겨우면서도 낯설게 잊혀져버린 형상이다. 그리고 그림 「옥상 5,6,7」을 통해서 보인 옥상은 옥상을 둘러싼 나무들이 푸른 안개처럼 층층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의 집합체는 실제로 있는 것일까? 상상의 산물은 아닐까? 왜냐하면 작가가 옥상을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는 나무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무들은 옥상의 외로움을 감싸주는 듯하다. 동시에 신비로움을 던져주며, 옥상이란 공간이 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작가는 옥상을 그리며 이율배반에 빠진다. 옥상의 적막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우울해 하면서도, 옥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황폐한 세상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순수했던 과거와의 끈이다. ● 그리고 사족을 붙인다면, 작가는 옥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일부러 옥상 탐방을 하기도 하고, 산과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옥상을 보기 위해 아래 세상을 굽어보기도 하며,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 현대의 옥상이란 공간은 때로는 벽돌들이 나뒹굴고, 때로는 외로운 에어컨 환풍기만이 오도카니 앉아 있고, 때로는 빨래대만이 외롭게 서 있다. 어느덧 옥상은 추억이 사라지고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이 되었다. 메마른 세상 속에서 추억을 머금고 사라질 우리 속의 낯선 추억과 낯선 풍경이, 이제는 옥상과 함께 버려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가 잃어가는 그 무언가를, 익숙했으나 익숙함을 잃어버린 풍경을, 계속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다시 보여 주려 한다. 그것은 잊혀져가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작가의 추모이고, 연민이며, 깊은 애정이다. ■ 이언지

문지현_오늘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cm_2013
문지현_피가움직이는상태를기분이라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3

'바라봄'과 '보여짐'에 관해 ●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한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고 한다. 즉 이는 자아가 형성될 때 근본적으로 거울에 비친 타자를 나로 인식하면서 최초의 나를 인식할 때부터 오인이 발생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아가 근본적으로 오인의 구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보여짐'을 모르고 오직 '바라봄'의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바라봄'은 '보여짐'에 의해 분열 되는데 이를 모르는 독선적인 주체,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주체는 심한 경우 광기로 역사를 몰아넣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라캉은 주체를 결핍으로 보고 욕망을 환유로 본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이런 오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체가 안다면 주체는 대상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자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 문지현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방 안 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불안정한 공간은 그나마 짙은 색과 옅은 색의 명암 차이로 바닥과 벽을 구분할 수 있다. 그 불안정한 공간에 한 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창, 무엇인가를 비추지 않는다면 창이라고 하기에는 이 또한 애매모호하다. 공간 안을 부유하다 지친 듯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잠시 안착한 주황색의 불덩어리는 태우기를 멈춘 것인지 아니면 이제 막 자신을 태우며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는 덩어리인지 알 수 없다. 작품을 한 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경계조차 없어진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주황색 덩어리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타자에게 호소하고 있다. 무엇을 욕망하느냐고? ● 문지현의 다른 작품을 보자. 두 남녀가 하얀 시트로 몸을 포장하듯이 감싸고 숲 속에 누워 있다. 그들의 감겨있는 눈은 너무나 깊어 다시는 뜰 수 없는 아니 아직 한 번도 눈을 뜬 흔적이 없어 보이는 듯하다. 남녀 옆 화폭의 중앙 가까운 곳에는 세 개의 알약과 노랑과 붉은 옷을 입은 하나의 캡슐이 공중에 떠 있듯 풀 숲 위에 비현실적으로 떨어져 있다. 그 옆으로 다시는 깨지 말라고 속삭이러 가는 듯 유연한 웨이브를 그리며 가고 있는 뱀, 그리고 리모컨, 어디서 툭 떨어진 듯 숲 위에 놓인 덩어리, 그 뒤로 걸음을 옮기면서 시선을 두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알 수 없는 사람, 이 모두가 짙고 깊은 청록의 숲 속에 펼쳐져 있다. ● 두 남녀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우린 알 수 없는 심연한 곳으로 떠나요. 여기 이 단서들로 우리를 쫓아와 주세요. 혹 찾지 못하면 여기 있는 리모컨이 도와줄지 몰라요. 그리고 푸른 바다색 알약을 삼키고 저희처럼 깊게 눈을 감아보세요. 알록달록한 뱀이 속삭일 거예요. 너희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욕망으로 인해 불안의 파도를 넘고 넘어 또 넘어야 한다고 속삭일 거예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도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본원적 정서라는 것을 알아요. 불안은 자신을 속이지 않잖아요. ● 문지현의 작품 속 공간에는 이처럼 일상적인 사물들과 어디에서든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그리 낯설지도 이질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의 캔버스 뒤로 몇 걸음 옮겨 시선을 모으면 낯설지 않던 화폭 속 공간 안의 것들이 갑자기 낯선 모습을 펼쳐 보인다. 이 설명할 수 없는 낯섦은 아마도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차이를 느끼지만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이것은 작가의 작업에서 주체와 타자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끝없이 묻고 또 묻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주황색, 푸른색 등 색깔만 바뀔 뿐 언제나 그녀의 화폭에서 모든 것을 태울 듯 위협적인 존재로 때로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여기 저기 부유하다 작은 공간에 풀썩 주저앉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메울 수 없는 결핍을 메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어떤 대상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대상은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에 주체는 대상을 바꿔 욕망을 채우고 채워도 채울 수가 없다. ● 꿈을 꾸는 듯 두 남녀가 깊게 눈을 감고 있다. '꿈꾸는 상태'란 타자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뜻하고 이는 동시에 타자를 무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하는 타자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타자와 욕망은 궁극적으로 파악 불가능한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라면 주체는 타자에게서 '위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타자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꿈꾸는 상태는 평화와 조화가 지배하는 낙원이 아니라 불안의 상태인 것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주체는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지만 타자는 주체의 요구를 항상 넘어서며 합일에의 요구는 욕망하는 타자를 묶어두고 심한 경우에는 무화, 제거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타자를 무화할 수도 없다. 타자는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며 인간 정신은 모순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불안하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있는 근본적인 심리현상인 불안을 그녀의 화폭에 잘 녹이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치 않는 꿈틀거림을 준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주체와 타자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이 내면의 꿈틀거림은 '바라봄'만이 아니라 '보여짐'을 인식하라는 그녀만의 메시지가 아닐까? ■ 이은경

송원지_순환8_캔버스에 먼지, 연필, 유채, 아크릴채색_65.1×90.9cm_2013
송원지_순환3_캔버스에 먼지, 연필, 아크릴채색_24.3×40.9cm_2012

흔적을 더듬는 곳에서 ● 이번 전시에서 송원지 작가의 작품으로 빈 집, 폐허와 만나게 된다. 드문드문 모인 집들도 아니고 그러한 터도 아닌, 비워진 집 한 채만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작품에 쓰인 색은 대체로 단순하다. 연필 스케치에 흰색과 회색, 검정 등 무채색의 명암이 주를 이루고 간간이 잡초나 넝쿨의 초록색과 밤하늘에 뜬 노란색 별 만이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게다가 폐허는 먼지를 재질과 색감을 위해 화면 위에 직접 얹어서 더 거칠한 느낌으로 표현된다. ● 집은 혼자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집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함께 하는 존재다. 그런데 작품 속의 집에는 사람이 없다. 살아있는 무언가의 기척이 보이지 않는다. 작품과 마주 선 순간, 텅 빈 집, 혹은 폐허라는 인식이 당장 떠오른다. 폐허라는 것은 쓸모를 다하고 버려졌거나 사람이 더 이상 살지 않아 비워둔 건물, 파괴되고 황폐하게 된 터가 아닌가. 어쨌든 손을 보지 않고서는 그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집이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는데도 역설적으로 폐허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 작품 속의 폐허는 사실적인 모습보다는 어슴푸레한 안개 속 신기루 같은 모습이나 옛 이야기 속 배경으로 등장할 법한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모두가 잠든 한 밤 중, 밤하늘 총총히 뜬 별들이 고요와 침묵을 깨고 오히려 한 밤을 기다렸다는 듯 생기가 살아난다. 수풀을 밟고 들어서면, 여 보란 듯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유혹하는 폐허가 드러난다. 그 공간은 호기심 많은 청춘들이 부모님이 잠드시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빠져나와, 꿈춰 둔 보물마냥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공간으로, 그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지해주는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쓸모를 상실하고 방치된 공간이, 아무나 발을 디밀 수 없게 비밀스런 의식이 행해지는 판타지적인 세계가 되어 버린다. 그러한 폐허, 비어버린 공간의 주변에는 무심코 듬성듬성 난 잡초, 수풀 사이로 인적이 닿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길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길은 분명 사람의 발걸음, 흔적이 만든 길이지만 그곳으로 걸어오라는 무언의 부름을 담고 우리를 인도하는 듯하다. 그 길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든 집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연결된 길이든, 그 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나도 모르는 또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이 든다. ● 폐허를 덮고 있는 넝쿨들은, 눈을 가린 앞머리처럼 어느새 길게 자라나 걷어버려야 할 것 같은데도 왠지 선뜻 범접할 수 없다. 창들은 굳게 닫힌 데다 접근을 거부하듯 넝쿨이 감싸고 있다. 그 창들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 일텐데 어느 것 하나 깨지지도 않았다. 폐허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온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정숙한 것이 부자연스럽게 말이다. 저 창 안은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문득, 아무도 없는 집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 숨어 있을 수도, 혹은 보이지 않는 정령이라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이 폐허들은 언젠가 흔적조차 사라지기 전에 먼지처럼 흩어진 소중한 추억을 붙잡으려는 듯 창문을 굳게 닫고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반대로 사소한 기억, 아련한 추억의 흔적을 공유하도록 누구에게나 허락된 장소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 이렇듯 작품속의 폐허는 수수께끼와 같이 많은 의미를 숨기고 있다. 폐허가 된 장소에 그 흔한 집기류 하나 굴러다니지 않고 오히려 정숙한 모습으로, 나는 이곳에 여전히 있노라고 그 존재를 통해 흩어져버린 향수와 흔적을 더듬게 한다. ■ 손아영

이선옥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2
이선옥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2

분열된 우리들의 자화상 ● 이선옥의 작업은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작품에는 무채색 계열의 단색으로 처리된 배경을 등지고 있는 한 인물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다름 아닌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이자 자신을 대변하는 메타포이다. 마치 사물처럼 대상화하여 표현된 이 인물만이 화면 중심을 점유하고 있을 뿐,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정황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 옅은 녹색의 배경을 뒤로 하고 줄무늬 티셔츠 속으로 몸을 구겨 넣은 인물이 화면 한가운데 앉아있다. 이 인물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줄무늬 티셔츠의 평범함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줄무늬 보자기에 싸인 큰 덩어리의 사물이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인물의 앉아 있는 모양새가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옷깃 부분으로 구부정하게 뻗은 팔과 티셔츠 아랫단 밑으로 드러난 앙상한 발만이 이 덩어리가 사람임을 알게 해준다. 티셔츠의 가로 줄무늬는 웅크린 몸의 윤곽을 따라 울퉁불퉁한 형태로 한껏 늘어나 있다. 티셔츠 위로 흐릿하게 드러난 몸의 윤곽을 살펴보면, 이 인물이 두 무릎을 세운 채 자신의 고개를 무릎 쪽을 향해 깊이 파묻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팔을 끼워넣어야 하는 양 소매부분은 단단히 매듭지어져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상당히 자학적으로 느껴지는데, 티셔츠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줄무늬 탓에 밧줄 혹은 사슬에 몸이 칭칭 감겨져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 역시 자신이 입은 짙은 녹색 반팔티셔츠 속으로 고개를 파묻은 채 무릎을 안고 앉아있다. 옷깃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 전체를 옷 속에 파묻은 것이 아니라 단지 얼굴만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 속으로 얼굴을 숨긴 인물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혹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반듯하게 깍지를 낀 손은 타인의 시선을 외면하며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의지의 몸짓으로 보인다.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파란 티셔츠를 입은 인물이 있는 작품 역시 인물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다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늘어진 옷깃 사이로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서 이목구비의 윤곽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 위에서 묘사한 내용과 같이 이선옥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옷 속에 숨어서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외면함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작가는 어떠한 연유로 스스로를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했을까? 모름지기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시선이 자신의 내부로 향해져 있고 그만큼 자기애 혹은 자기연민의 감정에 몰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선옥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스로를 감추고 숨김으로써 정체불명의 상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은 단지 작가의 자화상이라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분열된 자화상으로 볼 수 있다.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적인 욕망에 치중하기보다는 사회적 질서와 규범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내면의 감정 상태에 충실한 채 사회로부터 고립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반면 사회 규범의 질서 속으로 진입하고 싶어 하는 서로 상반되는 욕망의 공존에서 오는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이런 모순적인 갈등을 겪으며 우리는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무기력하다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감정들은 충분히 공감되고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해주어 위안이 된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우리가 처한 혼란스럽고 불안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속에서 무기력하게 일상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찰적 물음을 던진다. ■ 이보리

이수영_눈물샤워_한지에 채색_189×70cm_2010
이수영_어느 독립영화_한지에 채색_40×60cm_2013

일상, ● 작가 이수영의 작품은 한지에 채색한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색채는 선명한 느낌과는 다른, 그다지 강렬하다기보단 편안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느낌이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마다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게 되는 그냥 평범할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편치 않은 사연을 움켜잡고 있는 듯한 표정을 읽게 된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인물의 시선을 쫓아가보면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작품 속 자신을 보고 있다. 작품 감상하는 이도 이 시선을 따라 함께 응시하게 된다. 계속 그림을 보다보면 첫 느낌의 온화한 색채적 감정은 사라지고 밝지 않은 그림 내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의 인물이 이야기를 담고 등장하여,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배경 곳곳, 표정의 세세한 부분도 말을 건넨다. 작가는 일상에서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을 섬세하게 재현시켜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처음 접하는 작품일지라도 어색하지 않도록 작품을 보는 이에게 그림으로 무언의 언어를 건네고 내면과 교감하게 한다. ● 「눈물 샤워」는 한 여자가 쏟아지는 물줄기 속인데도 안경을 쓰고 발가벗은 채, 뜬 눈으로 앞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면서 앉아 있다. 샤워기 물줄기가 온 몸을 감싸 흐르고 마구마구 쏟아진다. 더운 김 없는 서늘한 물줄기처럼 보인다. 작은 이목구비를 가진 그리 예쁘지 않은 외모와 두루뭉술한 몸매에 두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있다. 샤워기 물줄기 사이로 앞을 쳐다 보기도 쉽지 않을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눈은 정면을 향해 있다. 정면에 거울이라도 있는 듯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힘없는 눈빛과 자신감 잃은 몸짓으로 마냥 쏟아지는 물과 함께 한다. 내면의 모든 것을 흐르는 물 따라 씻겨내고 세상을 원망하듯 체념한 자세이다. 「눈물 샤워」는 힘들고 갑갑함에 수치스러움이 치솟을 땐 더더욱 온몸을 씻고 싶은 충동을 대신해준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개운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다. 찌든 내면을 비우고 싶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몸 어느 한구석 빠짐없이 물줄기를 퍼붓는다. 작품 속 인물의 자세가 왠지 보는 이에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인다. 똑같은 모습으로 샤워기 아래에 앉아보았을 때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도 불편했고 잠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물줄기 속에서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노라면 물줄기에 희석되는 눈물이 보인다. 훌쩍임도 없이 두 눈을 뜨고선 마음으로 주르륵 흘려보낸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샤워기 물속에서 저리 슬피 자신을 에워싸고 있을까? 여자는 아픔을 드러내기 힘들어 혼자 자신을 감싼다. 누구에게 위로받기보다 자기 스스로를 눈물로 위로한다. 눈물과 샤워, 그 동질감에 의지해 자신을 비워낸다. 저 물줄기가 멈추면 여자는 또 다시 일상으로 나와 새로운 호흡을 들이킬 것이다. 그림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혼돈스런 자신을 꿰뚫어보듯 내면의 부끄러움을 치유한다. ● 「어느 독립 영화」는 약간 흐린 하늘빛과 하늘을 가르는 세 줄의 엇갈린 빨랫줄, 그 빨랫줄에 혼자 사는 여자임을 알려주는 듯한 빨래 몇 가지, 그리고 등 돌려 난간에 살짝 기대인 채 서 있는 한 여자가 있다. 멀리 향하는 눈길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림 아래 부분엔 빛바랜 녹색을 띤 선인장과 잎이 길쭉길쭉하게 생긴 식물이 아파트 베란다 화단에 심어져 있다. 바람이 그림 속에 가득하다. 그 바람이 여자 주위를 맴돌고 하늘엔 조각배 같은 작은 구름들이 배회한다. 그다지 맑은 날씨가 아닌 약간 어둡고 흐린 날이다. 덥지 않은 계절 하늘도 낮게 드리운 어느 날 아파트 베란다에서 여자가 밖을 쳐다보고 있는 풍경이다. 여자의 마음에도 흐린 날인가 보다. 여자에게서 바람이 나온다. 사막도 아닌데 사막 한가운데에 여자가 서 있는 것처럼 외로이 홀로 있는 쓸쓸함이 있다. 바람이 그녀의 외로움을 데리고 간다. 눈빛 너머엔 아득한 추억이 구름의 그림자를 만든다. 상쾌한 바람이 그녀의 기분을 돌려놓을 만도 하련만 표정이 미미하게 어둡고 허망함이 묻어난다. 담담하게 바람을 마시며 그 공간을 흡수하는 여유가 보이는 풍경이다. 너무 메마르지도 않게 적당히, 모든 게 감정을 추스르기에 적당한 상황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어느 독립영화』의 예고편을 보다가 마음에 와 닿은 장면을 작품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베란다에서 새벽의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며 먼 곳을 바라보는 여성의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등장하는 여성의 마음이 전해졌다고……. 그리고 작가는 선인장을 좋아하고 왠지 가시가 있어도 따뜻한 식물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이 그림에선 그 따뜻함을 느낄 수는 없다. 오히려 사늘하고 허전하다. 작품 속 여자의 시선에도 무언가 잡히는 게 있을까? 하늘의 움직임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 모호함에 시선을 던지고 그 자신을 들여놓는 건 아닐까? 그 시선이 다가간 곳에 내밀한 메시지를 담아 세상살이 속내를 감추듯 의문을 숨겨두고 오는 것이리라. ■ 정유미

임지현_앞집_캔버스에 유채_45.5×34cm_2013
임지현_Paint It Red_캔버스에 유채_73×117cm_2013
임지현_불완전한 고착_캔버스에 유채_66×117cm_2012 임지현_같이 걸을까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13

가깝고도 먼 ● 임지현 작가의 '앞집'은 전체적으로 무엇을 그린 것인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렵다. 작품의 제목이 '앞집'임을 감안하고 봤을 때, 비로소 중앙 아랫부분의 사람 좌우로 보이는 것이 아파트 같은 형태를 가진 '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때 사람 역시 얼굴만 사람일뿐, 몸만 봤을 때는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우며, 사람이라 생각되는 얼굴의 반(半)도 붉은색의 새같이 생긴 모호한 형태에 의해 가려져 있다. ● 사람의 좌측, 즉 사람의 뒤편에 보이는 집은 전체적으로 붉은색 계열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맞은편 집은 푸른색 계열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게 붉다, 푸르다 말하기 어렵다. 붉은색 계열의 따듯함이나 푸른색 계열의 시원함 등으로 보자면 한쪽은 따듯하다기보다는 불에 타는 듯 뜨겁고, 나머지 한쪽은 얼어붙은 듯 차갑게 보인다. 여기서 사람은 불에 타는 듯 뜨거워 보이는 집 앞에서 얼어붙은 듯 차갑게 보이는 집을 향해 서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푸른 물속에 잠겨 있는듯하다. 바다 속에 잠겨 있는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처럼. ● '앞집'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접하여 가까이 있는 집'이다. 비슷한 말로는 '이웃'이 있다. 예전에 우리에게 있어 앞집은 이웃사촌이다. 길흉사 때는 일의 절차를 상의하고 직접 '몸 부조'를 하거나 물품 부조도 한다. 별미 음식을 장만했거나 의례를 치르고 나면 그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평소에도 이웃간에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하거나 일상생활을 논의하기 위하여 서로 자주 내왕한다. 이런 앞집(이웃)과의 이와 같은 협동적 관계를 통해 우리는 앞집(이웃)과의 정을 나누었다. ● 오늘날 서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지역공동체의식이 존재하고, 이웃간에 상호부조와 사회적 교류를 통하여 친밀한 이웃관계가 유지 되는 곳도 있지만, 상류층의 거주지역이나 고급 아파트 지역에서는 각 가구가 고립적,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바로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웃과는 거의 접촉이 없는 차갑고 냉정한 관계가 형성되어지고 있다. ● 아파트는 앞집(이웃)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울지라도 심리적 거리는 먼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아파트 형태의 집을 그림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단절적이고 삭막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아파트는 이전의 '집'이라는 개념에 비해 '집'이 가진 거주기능만이 한정된 공간이라 볼 수 있다. 전통 가옥처럼 남들과의 공존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폐쇄적인 곳이며, 이는 이웃과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 모든 사회적 현상에는 득(得)과 실(失)이 있는 법이다. 물질적 풍요가 우리 삶을 보다 여유롭고 편안하게 해준 반면, 더불어 산다는 인간 사회의 기본 속성을 망각하게 하는 실(失)을 낳았다. 개인의 능력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정착됨으로서 이웃(앞집)의 존재이유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작품속의 사람이 바라보는 앞집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 박대엽

Vol.20130624d |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un)familiar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