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619_일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부산광역시_부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마린 갤러리 MARINE GALLERY 부산시 해운대구 중2동 1510-1번지 Tel. +82.51.746.4757 marinegallery.co.kr
'되기'의 경계에서 ● 어느 곳에든 삼투해 들어가고, 어느 것에든 물에 기름 뜨듯 이질적 존재로 드러나는 인물의 여정. 김영순의 작업을 보면서 그런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여겨진다고 조금 물러서서 판단을 유보해두기도 한다.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힘든 그의 작품에서 작가의 심리적 여정과 상처를 번연히 보면서도 이렇다 할 어떤 것, 분명하고 이해할만한 어휘를 찾지 못하고 만다.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맥락 때문일까?
인물화임에 분명한데 인물의 정체를 분명하게 잡을 수 없다. 아이인지, 어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항상 불분명하다. 그리고 인물을 싸고 있는 주위의 것들, 물, 언덕, 나무에 스며들어 있거나 하나가 되어 있다.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소재 자체로 있기보다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과의 관계 내지 일체화, 또는 부분화를 통해 관계를 가진다. 이를 두고 세계와 일체화라 하기에 인물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과 무관한 어떤 지점에서 그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때로 자신이 그들이 될 수 없는 거리를 선명하게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체화의 심리적 지향을 보인다고 보기에는 언제나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 이질성이야말로 그의 작품을 읽거나 그의 인물들의 독특한 성격을 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한 인물이 작은 종이배 안에서 사지를 뻗고 누웠다. 물결은 고요하고 그 물결에 조응하듯 배와 인물을 이루는 터치가 물결과 어우러진다. 때로 일렁이는 물이 일렁이는 몽상의 세계 그 자체로 보인다.. 더구나 배를 타고 있는 다른 인물은 어느새 아랫도리가 배에 흡수되어 배인지 몸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사람과 배를 구별할 수 없다. 그 순간 사물로서 배와 인물은 서로의 속성, 어떤 고유성도 소용없게 된다. 일체화되는 지점이다. 등장인물에 기탁된 자신의 몽상 속에서 배가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물이 되는 것으로 그는 세계를 만나고 있다. 어떤 것으로 지향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것이 되려한다. 그 인물의 주위는 언제나 물, 바람, 운동들이 둘러싸고 있고 인물은 그것들이 되려한다. 물결 속에 반쯤 잠겨 있거나 바람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인물이 그런 되기의 심리적 지향을 보여준다.
자주 등장하는 배, 그리고 한 쪽 뿐인 신발, 그것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심리적 지점, 갈 곳을 잃은 심리적 불안과 상처를 보이는 것일까. 배를 타고 있거나 신발 안에 서 있는 인물은 때로 무당들의 제례를 연상케 한다. 망자를 물에 띄어 저 세상으로 보낼 때, 종이배를 만들거나 망자의 신발을 물에 띄우는 것을 연상한다면 작가 자신의 의식, 무의식적 기제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것들을 제 갈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그들에게 보내는 것, 자신이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 그러나 산자와 망자는 있을 곳이 다르다. 그래서 그의 인물은 언제나 물가에서 서성거리고, 물가에 신발을 떠내려 보내고, 촛불이 여기저기 유등처럼 떠 있는 물에 배를 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화면의 인물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 경계에서 서성거리고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어른도 아닌 눈으로 혹은 그들 모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품이 넓은 바지를 입고 두 손으로 꽃다발을 앞으로 안은 채 서 있는 인물이다. 꽃을 든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소재이지만, 이번 작품은 인물의 분명한 체형과 표정, 그리고 배경 없이 인물에 집중한 묘사에서 여느 작품과 다르다. 구체적인 현실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비유적인 정황을 상정하지 않은 즉물적인 묘사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단순하지만 꽃을 든 손의 표정과 얼굴의 표정, 그리고 배경이 어우러지면서 서정적 인상이 강하게 부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몽상이라 표현한 비유나 정황을 제시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묘사된 소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작은 소품으로 신발이 화면 중심에 있고, 멀리 배가 떠 있는데 그 배와 이 신발이 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신발 위에 꽃가지 하나를 놓았다. 그 꽃가지 끝에 같은 색의 작은 배가 있다. 그것으로 그들은 이어진다. 그의 작품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이런 제의적인 인상이다. 신발과 배는 서로 닮으려 하고 그것이 되고자 한다. 여행이라는 은유로, 움직임이라는 상생과 침투로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무언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일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제작상의 이중적인 욕망이랄까 태도를 잘 드러내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동안의 작품에서도 이런 특징들은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심리적 성향, 심리적 상징으로 읽어내는 일은 무의미하다. 심리적 분석이 아니라 형상화의 과정으로 그가 드러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심리적 정황을 재맥락화 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의 심리적 상처와 치유가 서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는 그가 그림으로 전유하지 못하는 부분을 읽어내려 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처도 치유도 아닌, 어느 것으로도 되기를 거부하는 완강한 부정을 보아내는 것이다. 되기라는 경계에서 완강하게 지금을 보아내려 머뭇거리는 이질성이야말로 그가 서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심리적 분석이 아니라 형상으로 던져진 것들의 충돌 위에서 만나는 새로운 의미야말로 그의 작품을 규정하려는 어휘를 선택하지 못하는 망설임일 것이다. ■ 강선학
Vol.20130619a | 김영순展 / KIMYEONGSOON / 金伶盾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