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설휘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614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상암 DMC 갤러리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366(상암동 1612번지) DMC홍보관 Tel. +82.2.304.9965 www.curator.or.kr
상실의 섬, 이중화면 속에 숨겨진 섬 ● 사람들은 가슴속에 저마다의 섬을 간직하고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러나 갈 수가 없다. 그 섬은 상실의 섬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망각과 더불어 잊히기를 거부하는 심연이며, 어둠이며, 원형으로서의 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형은 상실감과 관련이 깊다. 현대인이 문명화된 사회로 진입하면서,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상실한 고향이다. 이 고향은 지도 위의 좌표(지정학적 고향)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심정적인 것(의식적인 것)이란 점에서 원형과 통하며, 존재의 뿌리(뿌리의식)에 연동된 것이란 점에선 자연과 통한다. 이처럼 현대인은 문명을 취하고, 자연을, 원형을, 고향을 상실했다. 상실감이야말로 현대인의 질병이며, 고등동물의 자의식이다. 섬은 그 상실감을, 상실감의 자의식을 상징한다. 그리고 예술은 이처럼 상실된 것들을 복원시켜주는 일과 관련이 있고, 최소한 이를 상기시켜주는 일과 관련이 깊다. 예술을 통해서 상실된 것들을,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주는 것이다(예술은 잃어버린, 잊어버린 원형을 상기시켜주는 것).
사실 설휘는 근작에서의 섬을 모티브로 취하기 이전부터 진즉에 이런 상실감에 주목해왔다. 이를테면 전작에서의 사라지는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을 테마로 한 주제의식이 그렇고, 이를 조형한 그림들이 그렇다. 나뭇잎과 나뭇가지 등 자연의 편린들을 비정형의 얼룩(사라지는 것들이 남겨놓은 흔적)과 함께 하나의 화면 위에 조합해놓은 그림들이며,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대신 암시적이고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그림들이다. 문제는 이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 왜, 하필이면 자연이 호출되어졌느냐는 것이며, 이로써 자연이 어떻게 사라지는 것들을 증명하느냐는 것이다. 자연은 죽는다. 비록 그 죽음이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해서, 생과 사가 순환하는 자연의 위대한 순환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예비 되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이전에 죽음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개체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개별자가 맞닥트려야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해서, 작가의 그림은 자연에, 자연의 생리에 빗대어,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고, 모든 죽는 것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부터의 노래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상실감의 대상이 섬으로 옮아오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 섬은 있으면서 없다. 실제로는 있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그 실체가 잊혀진 장소를 미셀 푸코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현대인에게 섬은 이처럼 잊혀진 것들(상실된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나 겨우 존재하는, 의식 속의 한 지점이며, 의식의 한 성향이다.
이처럼 섬은 상실(감)을 상징한다(사람들은 섬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상실된 것들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해서, 모든 그리움은 상실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고립을 상징하며, 불통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저마다의 섬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섬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섬처럼 고립돼 있다. 섬과 섬 사이엔 물길이 가로막고 있어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 가닿지 못한다. 이따금씩 나는 너에게 신호(파문)를 보내지만, 그 신호(파문)는 미처 너에게 가닿기도 전에 지워져버리고 만다. 신이 인간을 흩어놓기 위해 언어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그 전에 인간은 몸으로 소통했었다). 처음부터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불통을 위한 것이었다. 개념 언어를 통해선 결코 소통할 수가 없는데, 개념 언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 언어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가 있는데, 몸 언어는 존재(혹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몸 언어는 진즉에 상실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예술은 이처럼 상실된 몸 언어를 복원해 진정한 소통에 이르게 해주는 일과 관련이 깊다. 설휘의 근작에서 모티브로 제시하고 있는 섬은 이처럼 상실을 상징하며, 고립을 상징하고, 불통을 상징한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고독하다는 말은 이런 섬의 상징성과 관련이 깊다.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고독은 진즉에 극복의 대상일 수 없다는 말이다). 고독과 어떻게 친해지느냐에 삶의 해법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상실과 고립과 불통은 닫힌 체계가 아니다. 안쪽으로 열린 체계다. 내포와 내파. 어쩌면 작가는 섬을 매개로 일종의 게임을 걸어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섬을, 그 상징적 의미를, 그 존재론적 조건을 닫힌 체계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열린 체계로 받아들인 것인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 고충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떠오른 태초의 섬 ● 설휘의 작업은 진실, 혹은 사실이 무엇인지를 더듬게 하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집요하리만치 일관 되었던 삶에 대한 의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몰두하고 있는 '섬 시리즈'는, 그간 그가 걸어왔던 궤적을 따르는 순항의 연장선에 올려져있다. 스페인에서 열렸던 2009년의 개인전. 그를 인터뷰하던 방송국 기자에게 설휘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섬은 잊혀진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실의 의미가 아니라, 제게 있어 꼭 찾아야만 하는 희망의 봉우리이지요." ● 매우 혼란스러웠다. 섬을 봉우리로 이해하고 접근한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봐야할 설휘의 섬은 우리가 흔히 상상했던 잃어버린 고향도, 힘겨운 삶속에서 꿈꿀 수 있는 이상향도 아닌, 하나의 평범한 육지로 전락되어야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걱정은 접어도 좋을 듯하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모든 작업들이 누구에게나 쉽게 읽혀지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관객에게 요구하는 무례를 범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설휘가 풀어놓은 부동의 섬은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건 가변적 해석이 가능한 우리 곁의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무심한 발견으로 시작된 설휘의 시선이 어느 사이 '무엇이 진실이냐'는, 그리고 '당신의 감정이 안정되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기까지, 그의 검은 외딴 섬이 얼마나 많은 꽃과 나무와 새들을 그 속에서 피워내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근작들에 나타난 작은 변화에서, 이제 자신의 섬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그의 적극적인 구애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태초의 순수를 간직한 돌들이 붙어있는 그의 캔버스. 정교하게 그려 넣은 또 하나의 돌. 설휘는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질문을 가지고 다시 우리 앞에 섰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지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휘는 그 돌들이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모조품이라는 사실과 함께 바람과 파도에 길들여지던 그들이 점점 부피를 줄여나가, 종내에는 보이지 않는 섬의 역사로 편입될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 때론 달빛에 흔들리고 안개를 휘감기도 하는 설휘의 섬을 구경하는 데는, 어떤 요구조건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만들어 놓은 섬에 가기를 희망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섬과 자신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실체'를 찾아내야만 한다. 설휘가 진작부터 보아왔던 그것! "그것은 벽이다." ■ 김용대
Vol.20130614f | 설휘展 / SEOLHWI / 薛輝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