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vory, Gray and a Day 일상의 겹

이정현展 / LEEJEONGHYUN / 李정현 / photography   2013_0612 ▶ 2013_0624

이정현_A little 51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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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언젠가 그리고 어디선가 한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장면이다. 하지만 또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아닌 듯하다. 차라리 잠에서 깨어 다시금 떠올려보는 꿈속의 흐릿한 이미지라고 할까, 무심코 지나쳤다가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착각에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되는 미련, 아니면 어쩐지 곧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라고 해야 할까. ● 예술은 공통감각common-sense이라는 너른 터와 그 위에 지어진 각각의 모양새를 한 집들의 총체를 일컫는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집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점차 높이를 더해가는 집도 있으며, 허름한 데를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우는 중에 있는 집도, 다시 짓기 위해 해체의 과정을 겪고 있는 집도 있다. 우리는 이 너른 터를 보편성이라,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의 집들을 개별성이라 부른다. ● 하지만 보편성과 개별성의 영역을 정확히 나누고 각각의 자리를 확고히 정해놓는 것으로 예술의 특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예술은 언제나 논리적 테두리 밖에 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수潮水의 운동처럼 보편성과 개별성 두 사이를 끊임 없이 오가는 과정을 예술의 한 속성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여 우리가 개별성이라 말하는 작가의 입김이 서린 각각의 작품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 앞에서는 공통감각의 일부로 바뀐다. 한 점의 작품으로 인해 보는 이 각자가 품고 있던 내면의 이미지가 드러날 때, 그 이미지 위에 앉은 시간의 더께가 벗겨질 때 비로소 작품은 예술이라는 무정형의 움직임에 동화된다.

이정현_A little 52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이정현_A little 53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이정현_A little 54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회사후소繪事後素.『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말로, 흰 바탕이 마련된 이후에야 채색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란 공통감각이라는 백지 위에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찾는 이들이 스스로의 색을 칠할 수 있는 흰 바탕을 마련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작품이란 그들을 위한 하얀 밑바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란 없다. 모든 작품은 미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정현의 모호한 풍경들은 그런 점에서 미완의 작품이다. 그럴싸한 피날레도 없이 끝나버리는 무언가無言歌다. 하지만 그 모호함과 아쉬움으로 인해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계속 흘러나온다. 나 자신만의 피날레를 지어보기도 하고, 몇 소절의 멜로디를 덧붙여보기도 한다. 느낌에 맞는 가사를 끄적거리는 일도 좋다. 그렇다고 그 모호한 풍경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정의처럼 확실성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이미지가 구체적 형상을, 혹은 작가의 시선만을 제시할 때, 그 이미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보편성, 혹은 개별성이라는 경계에 갇혀 그 두 사이를 더 이상 오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여기, 이정현이 이것과 저곳을 오가며 우연찮게 만난 흰 바탕이 펼쳐져 있다. 속삭이듯 조근조근 들려오는 그 작은 곡조에 귀 기울여본다. 어느덧 새벽 물안개 피어나듯 그 소리에 덧입혀지는 자신만의 내면의 목소리가 그윽하게 울린다. 우리가 이정현의 사진을 밑바탕 삼아 칠한 다채로움이 다른 누군가의 회사繪事를 위한 후소後素가 됨을 잊지 않을 때 그 소리는 더 멀리 퍼질 것이다. ■ 박정훈

이정현_A little 55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이정현_A little 56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이정현_A little 57_잉크젯 프린트_44×56cm_2011

어떤 책에서 한 사진작가를 '유희의 명수'라고 표현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본다는 것이 만들어 내는 유희의 명수. 친구의 딸아이는 방에 걸려있던 족자 모서리를 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사람은 원래 보는 것의 재미를 아는 유희의 명수로 태어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재미를 잃어버려 명수가 아니게 된다. ● 본 것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더 복잡한 일이다. 예측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명수가 되기란 쉽지가 않다. 무언가를 열심히 보다보면 뜬금없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한다. 이게 사진으로 만들어지면 때로는 있었는지도 몰랐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진은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 ● 그러나 살다보면 이 보는 재미를 잃어버리고 보아도 보지 않을 때가 많아진다. 명수는 커녕 점점 더 하수가 되어간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재미가 불쑥 다시 나타난다. 시시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장소일 때가 더 많다. 그 순간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다행, 사진으로 만들어진다. ● 물론 사진으로 만들어졌다고 다 그 재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확률은 사실 극히 낮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사진이 되고 난 후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내가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사진도 많다. 또 그 재미가 꼭 즐거운 재미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잊고 싶었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슬프게 하기도 한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유희가 되고 명수가 생겨나는 듯 하다. 쉽지는 않아도 나는 여전히 다시 그 유희의 명수가 되기를 꿈꾼다. ■ 이정현

Vol.20130612b | 이정현展 / LEEJEONGHYUN / 李정현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