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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한국 미술 현장 스케치 우리 미술, 미술인, 미술문화의 풍경 책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세기말과 세기 초를 지나며 바라본 우리 미술과 미술인, 미술문화의 풍경이 담겨 있다. 저자 개인의 관점에 따라 편식한 미술을 다뤘기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나 논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또 한국미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지도 않았다.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 출발하는 미술은 결코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 미술은 얄궂다. 세계의 얼굴이 아주 잠시 드러나는 장소다.
혹자는 현대미술을 생각할 때 세잔의 '사과'를 떠올리지만 내게는 앤디 워홀의 '바나나'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바나나가 참으로 귀한 과일이었다. 현대미술은 바나나처럼 외래종이지만 참으로 귀한 왕좌를 차지했고 광휘에 휩싸여 점차 현대미술을 모방하는 짝퉁 이미지를 양산해왔다. 그렇게 현대미술은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 비이성과 비합리의 경지에서 아우라를 뽐내며 우리 삶의 현실과 욕망을 풍자한다. 저자에게 바나나는 스타일로서가 아닌 실존으로서의 팝의 세계를 사는 범부의 운명을 연상시킨다. 마치 바쁘게 길을 걸으며 무언가에 몰입하다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지는 경험처럼 말이다.
현대미술, 우리 시대의 아주 멋진 문화적 우세종 한국 사회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변모한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해외 유학을 떠났던 이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대거 귀국하였고 그들은 한국 현대미술이 동시대적 문화와 국제적 감각을 공유하며 일거에 도약하도록 만든 주체가 된다. 세대 변화와 더불어 광주비엔날레, 인터넷 상용화 등이 상승 작용하여 그 이전까지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보였던 국내 미술과 국외 미술의 통합으로 동시대성이 가능해졌다. IMF 경제 위기로 큰 타격을 입는 듯 보였으나 불황에도 불구하고 2000년을 전후로 미술시장엔 밀레니엄 특수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2008년 예견되었던 불황이 미술시장에 닥쳤다. 하지만 오히려 이때가 실상은 비전 있는 기획과 활동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현재도 대안공간을 운영 중인 저자는 한국의 현대미술 전개과정을 한국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연결하여 고찰하면서, 대안공간과 창작스튜디오 들의 활동과 흥망성쇠도 살핀다. 통계를 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규모는 대략 3배 이상 성장했다. 상상할 수 없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이로운 미술시장 뉴스가 넘쳐나도 이제는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이란 용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으며, 새롭게 부상하는 분야로서 현대미술의 현장은 역동적이며 뜨겁다.
전시장을 가다 작품을 보다 감상을 적다. 3부에서는 저자가 직접 기획 혹은 비평한 전시, 그리고 강홍구, 현태준, 안드레 세라노, 매튜 바니 등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글을 모았다. 그리고 요즘도 대도시의 길거리 어디에서든 불쑥 마주칠 것만 같은, 아이콘으로서의 앤디 워홀로 책을 마친다. 잠시 짬을 내어 전시장으로 가볼 일이다. 일기를 쓰거나 댓글을 달거나. 아니면 그냥 사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어도 그뿐이다.
■ 본문 중에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우리 모두는 예술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그 질병의 기원은 우리가 언어와 문자라는 것을 갖게 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된 살아있는 화석, 예술은 지금도 그 모습을 바꿔가며 끝없는 진화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있다. 이 교묘한 질병은 한때 종교와 사귀면서 철학과 양다리를 걸쳤고 도덕과 역사를 새 애인으로 갈아치우며 마침내 정치와 사회, 경제를 가리지 않고 분탕질을 했다. 주위에선 이 나이 많은 고고한 친구를 사귀려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운명이란 이런 걸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예술을 어떻게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 42쪽(세상이 넌지시 들려준 쓸모 있는 신념들)
타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 전시 기획자는 다음의 것들을 깨우치고 익히고 길러나가야 한다. 억압되었다거나 심리적인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 또는 소외당했다거나 어떤 음모에 휘말렸고 현재도 그러하다는 느낌이 어깨 위로 느물대며 기어오르는 기분을 끝장내겠다 생각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허황되며 과장되지만 환상적인 요설을 줄줄 읊고 가식적이지만 유혹적인 눈웃음을 잘 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불편하고 까다롭고 대부분 어울리지 않는 취미와 열정과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스크를 쓰고 가명을 쓰며 개성 있는 자기만의 분위기를 풍길 수 있고 볼거리와 먹을거리와 수다거리로 흥청댈 수 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꾸미고 어울리기. 뜨겁거나 차가운 감정을 모두 과소비할 수 있는 시간을 내고 다시 어울리기. 서로의 기억을 더듬으며 애무하는 그런 사이 만들기.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인식할 수 있는 거리에 있거나 혹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주워 모으고 다시 보수하고 채색하고 꿰매는 일들. 주위에 펼쳐져 있는 아이러니, 빈정거림, 비웃음, 권태와 무기력과 강건한 어리석음과 유약한 위트와 유머들을 마치 어떤 빛을 본 양 억지로라도 비전과 낭만을 느끼며 흩트려놓았다 다시 재배열해보는 그런 일들. 그리고 마침내 무엇보다 중요한 펀딩(행사 비용 만들기)과의 아름다운 관계 유지하기. 서로 솔직하지 않으면서 솔직한 척하기. 또는 솔직하면서 솔직하지 않은 척하기 등등. ― 102쪽(비위 좋은 사람)
현대미술 분야가 국제화되고 국경과 지역의 고유성보다는 세계화로 미적 보편성이 확대되면서 전시 형식과 전시 관련 디자인 또한 범지구화 되고 있다. 이것은 시각예술 문화의 국제적 경쟁력 강화(이 말은 사실 미술계에서 정확히 정의되거나 다수의 동의를 끌어낸 말은 아니다)이자 동시에 자기고유성의 약화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문화와 환경이 이로 인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미술 전시와 관련된 홍보 인쇄물들은 시대마다 나름의 의미와 개성을 보여준다. 매 전시마다 인쇄되는 포스터, 엽서, 팸플릿, 리플릿 등은 전시의 주제와 내용, 출품 작가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인 만큼 그 전시의 이면에 자리하는 비전과 욕망과 의미를 시의적절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크게 주의하지 않은 채 생산된 것들이 보다 더 구체적이며 진솔한 욕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 111쪽(전시 이면에 자리하는 비전과 욕망)
어떤 전시가 좋다더라. 어떤 작가가 좋다더라. 어떤 전시장이 좋다더라. 시간을 내어(대신 점심이나 저녁을 포기한다) 전시를 본다. 전시장을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넓게 보고 좁게 보고 이리저리 보다 나온다. 저녁 퇴근 후 일기나 댓글을 단다. 사는 생각을 하다 잔다. 그것뿐이다. ― 139쪽(미술을 느끼다: 미술 감상)
작가는 세상살이에 밝다. 미술관 밖의 현실에 누구보다 정통하다. 미술관은 현실의 밖에 있으나 그 또한 현실의 장이 아니던가. 어쩌면 오쇠리나 드라마 세트장은 우리 미술관의 다른 명칭일 뿐이 아닐까. 오쇠리는 철거되어 세트장이 되고 이렇게 버려진 세트장은 비현실의 이미지에 포섭되는데 오히려 현실은 귀환한다. 강홍구의 작업들이 열어놓은 길은 즐겁거나 심오한 것과는 다르다. 그 길은 비정한 현실과 비현실이 마주하고 그 현실이 진짜 우리 세상살이의 현실인지 반문하게 한다. ― 163쪽(수련자는 어떻게 지옥의 문을 통과했나)
■ 지은이_김노암 회화와 미학을 전공하였고, 미술 현장에서 전시 기획과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고, 개인전을 5회 열었다. 1998년 처음 큐레이터로 입문하였다. 여러 예술축제에서 전시와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1999~2005)의 운영위원, 헤이리판페스티벌(2007), 청계예술축제(2008) 등의 예술감독, KT&G상상마당의 전시감독(2007~2010)을 역임했고, 현재 문화역서울284의 예술감독으로 있다. (사)비영리전시공간협회 대표, 대구예술발전소 운영위원, 한국영상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껏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휴, 창작스튜디오 휴+네트워크, 웹진 이스트브릿지(www.esat-bridge.net)를 운영하고 있다.
■ 차례 서문: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1 미술로 생각하다: 미술 에세이 '추리닝' 찾는 시절의 인상 미래의 예술과 하나의 가설 말문이 트인 남자의 골상학 수의 망상 금지된 것과 훔쳐본 이미지 그림 없는 그림 세상이 넌지시 들려준 쓸모 있는 신념들 동그라미의 불편한 진실 천일야화 上 : 왜 미술 뉴스는 문화란이 아니라 사회란이나 정치란을 선호할까? 천일야화 下 : 말은 부끄러웠고 뜻은 허리를 굽혔다 숨죽이는 일상의 미적 경험들 바나나 리포트
2 미술과 함께하다 : 미술 시평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와 변화 한국화는 현대미술인가? 예술 정책은 구휼인가? 대안공간 괴짜경영론 비위 좋은 사람 전시 이면에 자리하는 비전과 욕망 불투명한 기대를 헤쳐가는 자기 신뢰 메세나 또는 이기적 유전자 선용하기 빨래터와 빨랫감 때마다 찾아오는 축제는 축복인가 재해인가?
3 미술을 느끼다 : 미술 감상 이것이 대중미술이다 _ 2012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기획전 서교육십의 비밀일기 _ 2009 인정게임 수련자는 어떻게 지옥의 문을 통과했나! _ 강홍구展 다방, 낭만과 현실을 담는 매체 그리고 심미적 공간 _ 김창겸展 아저씨의 양지 _ 현태준展 파괴의 몽상 _ 신기운展 보라매 댄스홀 _ 정연두展 레드 후라이드 치킨 _ 고승욱展 친디아 현대미술의 빛과 그림자 _ 『차이나 게이트』展 & 『헝그리 갓: 인도 현대미술』展 불투명한 관람기 _ 2006상하이비엔날레 아름다운 시체의 몽상 _ 안드레 세라노 메스껍고 낯설고 불편한 _ 매튜 바니 중심과 주변 _ 대안공간의 미술 자본의 환영 그리고 우상에 등 돌리기 _ 도미니크 뮬렘 내 친구 앤디 스토리 _ 앤디 워홀
Vol.20130610i | 바나나 리포트 / 지은이_김노암 / 두성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