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Elegy

권경엽展 / KWONKYUNGYUP / 權慶燁 / painting   2013_0613 ▶ 2013_0715 / 월,화요일 휴관

권경엽_Sentimental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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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엽 홈페이지_www.louisekwon.com

초대일시 / 2013_0613_목요일_07:00pm

관람시간 / 03:30pm~07:30pm / 금~토_11:30am~08:30pm 일_02:30pm~06:30pm / 월,화요일 휴관

Dorothy Circus Gallery Via dei Pettinari, 76 00186 Roma, Italy Tel. +39.338.9499432 www.dorothycircusgallery.com

아물 수 없는 상처 ● 권경엽의 그림에는 주름과 잔털은 물론이고 잡티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의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진주 빛 광채까지 감도는 자체발광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전성기에 놓인 이들임을 알려준다. 2차 성징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완전히 성숙해 있다고 할 수 없는 사춘기 즈음의 아이들은 얼굴만 보면 그 또래가 그렇듯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확실치 않다. 가령 작품「Adolescent」(2013)같이 짧은 머리의 인물은 양성적 느낌을 준다. 허연 인물들은 한 꺼풀 벗긴 듯, 또는 한 꺼풀 씌운 듯 인공적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유령 같은 존재이다. 유령, 요정, 괴물 같은 이 경계 위의 존재는 만화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많이 등장한다. 작품 속 인물의 머리칼과 피부색은 하얗다.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자연에서 발견되기 힘든 이러한 비자연적 색깔은 눈이나 입술 같은 감각기관은 충혈 된 실핏줄이 그대로 묘사될 만큼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모노톤으로 변주된 것이 아니라, 색이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작품의 주조색은 분홍, 노랑, 하늘색이 감도는 화이트이다. 화이트는 작가가 작품으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섬세한 감정 선을 위한 중성적 바탕이다. 이 섬세한 표면에서 각인되는 것은 어떤 사소함도 상처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흔적은 눈 덮이듯 희미해질 수 있다. 화이트는 여전히 청결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보다는 지난 시간의 흔적에 가깝다.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나이가 들수록 얼굴과 몸이 하예지고 검은 눈동자도 엷은 회색으로 변한다. 시간이 인간의 색을 앗아가고 흰색으로 되돌려 놓는듯하다. 작가는 퇴색되는 시점을 영원의 느낌으로 고정시킨다. 하얀 머리칼의 백자 빛 피부색 인물상은 권경엽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 피부는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투명하고 창백하다. 진주나 백자 같은 피부 표현은 완전과 영원의 느낌을 인체에 담는다. 인물은 부드럽게 빛나는 대리석 조각이나 백자 인형 같은 분위기가 있다. ● 진주나 백자가 그러하듯이, 그것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상처의 결과물이며 깨지기도 쉽다. 거기에는 활짝 핀 꽃이 시들어갈 기미가 보일 때의 멜랑콜리가 있다. 권경엽의 작품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멜랑콜리는 푸른색도 보라색도 검은색도 아닌 하얀 색이다. 색이 빠지고 빛이 바래고 있는 중의 그들은 하얀 붕대까지 감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붕대는 마냥 불확실한 상황 속에 인물을 방치하지 않는다. 색 바랜 그들은 상처받은 존재임이 확실한 것이다. 권경엽의 인물화는 순진무구의 천사와 상처받은 청춘을 중첩시킨다. 그들은 몸, 또는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환자이다. 양수에 잠겨있는 태아 때부터 붕대를 감고 있는 이전의 작품「in Lethe」(2008)에서 보이듯, 그들의 상처는 운명적이면서도 항구적이다. 환자는 이상(異狀) 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면모를 알려준다. 영국의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인간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 것이다.

권경엽_Elegy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3

자체의 항상성이 무너지면서 허약한 경계면으로 침투한 이질성과 투쟁해야 하는 환자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잠재적 혹은 명시적 환자로서의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또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허공을 응시하며 무위의 시간, 작가 말대로 그저 '시간을 시간이게' 내버려 둔다. 그들이 만약에 그 시간에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인물은 언제나 한 화면에 하나씩 있다. 그들은 홀로 불확실한 배경 속에서 명상과 몽상 사이를 넘나든다. 이번 이탈리아에서의 개인전 부제인 'Elegy'는 슬픈 노래처럼 인물들이 젖어 있는 감정의 상태를 예시한다. 그러나 백발로 온 몸을 휘감은 소녀를 그린 작품「Elegy」(2013)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던 이전과 달리, 다소간 무감각한 표정이다. 작품 속 인물은 그것을 낳은 작가와 함께 알게 모르게 나이를 먹어간다. 권경엽의 인물상들은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라는 점에서 환상적 사실주의의 면모가 있다. ● 그것은 날로 발전해 나가는 그래픽 기술을 활용하는 환타지 속 캐릭터와 중첩되는 이미지이다. 눈모양의 결정체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Snow queen」(2013) 시리즈나 화이트와 대조되는 자극적인 색인 블랙, 레드가 배색된 팜므 파탈 분위기의 여성들이 나오는 작품「Love」(2013)나,「Red Moon」(2013)에는 그 환상적이며 도발적 매력으로 대중성에 호소한다. 이러한 도상의 기원은 미술을 만나기 이전부터 몰입했던 대중문화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반 친구들을 위해 손수 각본을 쓰고 그린, 가녀린 여자 주인공과 악녀, 또는 코믹한 인물들 등이 나오는 만화를 밤새도록 그려서 책으로 만들어 돌려 보곤 했던 경험이 있으며, 미술을 전공한 후에도, 그 잔재가 남아 전통적인 의미의 인물상과는 거리가 있는 작업을 하게 된다. 작가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림에 몰입이 잘된다고 말한다. 남들에겐 지나가버려 무의식 깊은 곳으로 내려앉은 그 시절을 작가는 아직도 앓고, 또는 누리고 있다. ● 권경엽의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순수하고 맑지만, 자기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사춘기적 감성이 투사된 여린 인물들이다. 그 즈음에 처음 맞은 큐피드의 화살은 상처와 상실감 또한 안겨 주었을 것이다. 작가는 회화도 결국은 환영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한다. 환영이지만, 거기에는 강력한 심리적 현실이 투사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이 모호한 이들은 그 누구도 아니고 일종의 원형 같은 인물이지만, 참조대상은 있다. 그림이라는 것에서 계속 나오는 어떤 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 또는 분신이 아닐까. 회화라는 환영의 거울은 나르시시즘의 영원한 장인 것이다. 이번 전시 때 출품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신화적 인물은 2007년의 작품「charon」에도 발견되는데, 이 양성적 인물은 자신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자화상이다.

권경엽_Charon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3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처받은 존재라는 정신분석학의 가설 뿐 아니라, 작가에게는 사춘기 때 실제로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그 육체적 심리적 흔적이 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피 흘리는 직접적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재탄생한다. 완벽한 신체가 손상됨으로서 생기는 결여와 결핍을 상상력으로 메워나간다. 모월모일에 있었던 어떤 구체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을 직시하면 퇴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함, 또는 죽음과 함께 한다. 기억되고 망각되는 것이 바로 젊음이다. 2008-9년의「기억의 공간」시리즈와 2010년「망각」시리즈에는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 표현되어 있다. 권경엽의 작품에서 기억과 망각은 계절도 탄다. 가령 망각은 겨울의 이미지로 그린다. 굳은 표정의 인물에게서 기억은 차가운 지층 아래에 동결된다. 작가는 우리 기억이 인체에 저장된다고 본다. 환상통이라는 증상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퇴색된다. 그러나 더 아름답게 기억된다. 또는 더 아프게 기억된다. ● 젊음은 지나가야 비로소 의식된다. 감정표현의 기복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지금의 인물상이 확립된 2000년 대 중반에 작가가 30대 초반이었음을 생각할 때, 젊음은 이미 망각과 기억의 경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시간을 타고 부침하며, 기억의 속성은 인물을 통해 표현된다. 기억은 아련해지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불현 듯 선명해 진다. 퇴색된 듯 흐릿한 인물에 눈동자와 입술 같은 감각 기관만이 선명한 것은 기억과 지각의 관계를 알려준다. 기억과 지각은 시간과 공간처럼 서로를 활성화한다. 권경엽의 작품을 지배하는 우수에 찬 느낌은 시간적으로는 고정, 공간적으로는 분리로부터 야기된다. 시간은 사기질 피부를 가진 그들처럼 흘러가지 않고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작품 속 인물들은 초시간적인 본질의 세계 속에서 영원을 응시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어떤 시간을 되찾고자 한다. 상실된 시간 속 인물은 우울하다. ● 공간적으로 볼 때 우울증은 분리의 산물이다. 자신이 온전히 속한 한 세계를 찢고 나오는 탄생은 개체에게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사춘기 시절 개체화를 위한 제 2의 탄생에 도 필요한 것은 분리인데, 그 또한 상실감을 낳는다. 또한 이 시절 상실감의 깊은 원천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그것은 2010년 5월에 있었던 개인전 제목『last letter』에 숨겨 있을 법한 러브 스토리이다. 화가가 됨으로서 획득한 상징질서와 언어기호는 존재의 우울을 작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부재와 분리의 슬픔은 상징적 활동을 통해 표상된다. 그러나 완벽한 표현을 획득한 우울은 이미 우울이 아니다. 그래서 큰 변화가 없는 권경엽의 스타일은 그런 정서에 탐닉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물질의 근본을 이루는 원자의 세계에 빈 공간의 몫이 있듯이, 현실을 지탱하는 많은 부분은 환상이며, 환상 속에서의 현실의 몫 또한 마찬가지이다. 극사실과 환상 사이에 있는 권경엽의 작품은 환영의 공인된 전달 수단인 회화의 정점에 있으면서, 붓자국을 철저히 감춘다.

권경엽_Adolescent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3

그녀의 그림은 뵐플린의 어법을 빌린다면, 회화적(painterly)이기보다는 조각적(선적linear)이다. 작가는 그림에서 막 뛰어나온 듯한 조각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실제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듯한 이 중성적 언어는 이 환상적 도상들에게 확실성을 부여한다. 화사한 작품 속 인물들에게선 미소나 웃음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전 작품에서는 맺힌 눈물을 직접 표현하기도 했고,『애가』라는 이번 전시의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권경엽의 작품은 멜랑콜리하다. 권경엽의 작품을 온통 물들이는 멜랑콜리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연약한 자아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우울한 정서는 말이나 행동의 의지를 빼앗는다. 이러한 부동성은 애매함과 결합하여 신비함을 낳는다.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은발의 소녀는 눈의 여왕으로, 망각의 강을 건너는 카론이라는 신화적 존재로 변신한다. 상실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부인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광물질적인 단단함으로 조련된다. 몸은 깨지기 쉽기 때문에 소중한 보물처럼 다루어진다. ● 그러나 혈색이 도는 눈과 입은 상처처럼 외부를 향해 벌어져 있다. 이 구멍들은 자기 방어적 경계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 또는 위험상황을 상상할 때 발동되는 방어본능은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때로는 과도하게 나타나, 작품「Sword」(2013)처럼 소녀는 긴 검을 들고 있기도 하다. 공격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건이 지나간 흔적은 붕대감은 모습으로 확연하다. 작품「Vanished」(2013)는 붕대를 칭칭 감고 한쪽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으며, 작품「Tearful eyes」(2013)는 턱과 머리에 붕대를 감싼 채 관객을 응시한다. 작품「Space of Memory」(2010)나, 작품「Space of Memory」(2011)처럼 얼굴 없는 누드 역시 붕대가 빠지지 않는다. 붕대 안에 기재되어 있는 깊은 충격은 무언극을 지배하는 고뇌의 원인이다. 미성숙한, 또는 훼손된 몸을 이리저리 감은 붕대는 짜여 지고 있는 텍스트로서의 주체에 내재된 파괴와 결여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치유를 촉구하는 현대미술의 비체적(abject) 경향과 달리, 이러한 간접적 드러냄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물들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부착된 붕대는 상처가 곧 나아 벗겨질 것이라는 잠정적 느낌보다는, 취약한 몸의 항구적 세트처럼 보인다. 권경엽의 작품은 마치 이런 상태가 정상인 것 같은 시각적 설득력이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고독한 환자인 것이다. 간혹 일상적인 배경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개 인물은 텅 빈 바탕에 놓이는데, 이는 이 인물의 고독을 더욱 크게 메아리치게 한다. 축축한 우울을 넘어 무감각해지고 있는 작품 속 인물에서 더 이상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탈색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굳이 욕망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증이 아름다운 대상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또 그것을 위해 살아가기에 동의하지만, 그 애착은 이미 분리되어 멀리 떨어졌다고 말한다.

권경엽_Reverie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3

작가는 죽음의 흔적들을 아름다운 몸에 통합시킨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기교이며 상상적인 것이다. 권경엽의 작품에는 멜랑콜리로 향하는 정신의 성향이 존재한다.『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는 멜랑콜리를 가끔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가끔은 색깔도 없이 텅 빈 절망에 짓눌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삶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기를 잃은 삶이다. 살기 위해 내가 하는 노력에 의해 가끔은 열광적이기도 하지만, 이 삶은 매순간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작가는 존재의 무의미의 증인이 되고 인간관계와 존재들의 부조리를 드러낸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권경엽의 작품에 깔린 멜랑콜리는 탄생, 또는 제2의 탄생 자체에서 기인한 트라우마에 기인하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트라우마와 환상과의 관계이다. 상처는 욕망 때문에 생기며, 욕망은 그 원인과 목적을 알 수 없는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상적이다. ● 권경엽의 미성숙한 인물들은 기묘하게 섹시한데, 그것은 단지 변태적 욕망의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바 있는, 이미 어린 시절에도 분명한 욕망의 징후이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유아 성욕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화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유아 성욕은 고통이 기거하는 무의식의 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의 제한된 신체적 심리적 수단에 비해 늘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히스테리 증상의 원천이 되는 유아 성욕은 자아에 비해 커 범람하기 때문에 외상적인 것이 되고 병을 일으키게 된다. 몸은 성욕이 들끓고 있는 온상, 즉 욕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결국 제한 없는 완벽한 향락을 충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그 자체에 싣고 있다. 외상의 폭력성은 의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무의식에서는 감지되어 성적 감정의 범람을 출현시킨다는데 있다. ● 여기에서 외상은 더 이상 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나중에 강조했듯이 외상은 자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적이고 폭력적인 왜곡이다.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외상은 밖에서 가해진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남긴 심리적 흔적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충격의 자연성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자아의 표면에 찍힌 자국이 된다. 그 자국, 즉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까닭에 고립된, 그래서 자아에게는 괴로운 바로 그 영상이다. 히스테리의 기원은 더 이상 외상이 아니라, 허구 즉 환상(fantasm)이라는 것이다. 권경엽의 작품 역시 멜랑콜리나 히스테리같은 정신병적 증상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중요하다. 욕망과 향락이 환상의 범주 속에 기입될 때 갖게 되는 것은 불안이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존재하는 인물에는 환상화 된 불안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것은 체모나 모공하나 보이지 않는 무기질적인 피부와 대조되는, 입술과 눈 같은 민감한 지각 기관에 깊이 새겨진다.

권경엽_Red Moon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3

붕대 속 상처는 더 이상 외적 사건만이 아니라, 감정으로 뭉쳐 있는 심리적 사건으로, 몸의 민감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 환상이 외상이라고 해서 모든 외상이 환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환상이 아닌 외상도 존재한다. 실재적인 외상에 의해 야기된 감정은 불안이 아닌 공포이다. 불행하게도 작가에겐 실제의 외상적 사건 또한 일어났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모든 외상이 실제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반드시 환상의 세계 속에 등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히스테리의 주요 원인은 넘치도록 맡고 있는 표상의 무의식적 활동력에 있다. 이 표상의 내용은 이제 더 이상 신체의 어떤 부분에 대한 한정된 영상으로 귀착되지 않지만, 그것은 환상적 각본에 따라 전개된다. 이 환상은 짧은 연극적 장면으로 상연된다. 연극 속 인물은 가상의 몸을 가진다. 인체 형태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듯한 권경엽의 작품에서 가상의 해부학적 구조는 종종 발견된다. ● 이 가상의 몸에서 제 2의 피부처럼 고착된 붕대는 외상을 초래한 사고 순간과 관계된 신체의 부분과 접촉하는 역할을 한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에 의하면, 표상에 의한 질병인 히스테리는 무의식의 영상이 되고, 상상의 몸(자아)에서 떨어져 나와 외상적인 장면과 관계있는 신체 부분으로 보내지며, 고도의 성적 무게를 싣게 된다. 이 맥락에서 권경엽의 작품은 히스테리의 발생 경로를 따른다. 즉,『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요약할 수 있듯이, 욕망은 향락을 향해 열려 있고 그 향락은 환상을 태어나게 하며, 그 환상은 불안은 포함하고 있고 마침내 그 불안이 고통으로 변형된다. 외상이 남긴 심리적 흔적, 감정을 떠맡고 있기 때문에 자아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이 흔적이 히스테리의 기원이다. 심적 외상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결핍되어 생기지만, 결핍은 근원적으로 메울 수 없다. 그것이 권경엽의 작품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아물 수 없는 상처의 정체일 것이다. ■ 이선영

Vol.20130610h | 권경엽展 / KWONKYUNGYUP / 權慶燁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