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3_0605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선구_박은선_안경하_오수연 이지향_이희경_조수연_차경화
기획 / 조각그룹 비(飛)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7:00pm
갤러리 시작 Gallery Si:Jac 서울 종로구 인사동 39번지 2층 Tel. +82.2.735.6266 www.artandsmart-gallery.co.kr www.sijac.kr
왜 시작인가 ● 헬라 세포(Hela Cell)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섯 명의 자녀를 낳고 30대에 자궁암으로 사망한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라는 한 흑인 여성의 몸에서 추출한 암세포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세포들이 체외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것에 비하여 이 여성의 세포는 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배양된 후 지구 세 바퀴를 덮고도 남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으로 증가되었다. 그녀의 세포는 지금도 계속 분열중이며, 소아마비 백신 및 각종 의학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헬라세포가 가진 생명 윤리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생명체의 검질긴 특징을 이토록 강렬하게 보여주는 예도 드물 것이다. 작은 세포 하나가 품은 소우주,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뱉어내고 모든 것을 삼키며 자라고 자라 세상을 뒤덮을 만한 힘이 있다. ● 조각가의 작품 또한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 하나의 배아(胚芽)로부터 출발하여 분열하고 증식하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그 고요한 힘을 닮아 있다. 생각과 경험, 기억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작품의 생명이 움틀 라 치면 작가는 자신이 마치 생물학자라도 된 것처럼 생명체의 조직과 세포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추출하여 접시 위에 올려놓고 자랄 수 있는 최상의 온도와 습도, 빛, 공기를 조성한다. 그것이 어떤 모습과 크기로 자라서 어떤 존재가 될지 아직은 모른다. 시기도 알 수 없다. 적당한 조건을 유지시키며 매일 같이 들여다 볼 뿐이다. 그리하다 보면 어떤 존재는 작가가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자라나기도 한다. 때로는 뿌듯하고, 때로는 실망스럽다. 종종 사춘기의 10대 청소년처럼 제멋대로 여서 내가 만들어 놓고도 내 생각을 주입하기 어려워 지기도하고, 한 편으론 너무 성숙해 나조차 쉽게 다가가기 힘든 경우도 있다. ● 여기 8명의 조각가들이 이같이 흥미롭고 비밀스런 그들의 배양실을 소개하기로 한다. 삶의 미세한 떨림과 울림이 작품으로 변화하고 성장하여 자라나는 모습을 갤러리 시작 - 이곳에서 펼쳐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작은 것으로 부터 ● 생명체의 시작은 작디작다. 오수연과 차경화의 시작도 바로 이 '작은 것'이다. 지나치기 쉽고 버리기 쉬우며 무관심해지기 쉬운 바로 그것. 오수연은 개미, 차경화는 나무의 작은 가시를 각자의 배양실로 가져온다. ● 오수연은 어느 한가한 오후 할 일없이 현관 계단에 앉아 있다가 줄지어 가는 개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 사회의 군상을 바라본다. 인간이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나 짊어지고 가는 의미 없고 하찮은 존재. 게다가 수도 없이 많고 많아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발에 채이기만 하는 개미들... 하지만 그 쓸데없어 보이는 행렬도 인간 세상만큼이나 조직화된 그들의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충성스런 행위임을 떠올리는 순간 인간의 모습 또한 줄지어 가는 개미의 행렬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타인의 행동은 또 다른 타인에겐 무의미할 뿐이고 삶을 위해 움직이는 잰 걸음은 그저 오른발을 따라 옮겨가는 왼발의 반복임에 틀림없다. 이제 개미는 작가의 시선이 세상 안으로 침투하지 않고 세상 밖에서 관조의 시선으로 머물 수 있도록 땅이 아닌 배양접시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검은색 몸과 검은색 눈, 검은색 더듬이를 가지고, 검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기꺼이 흰 종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군상의 그림자 되어 준다.
차경화의 샬레에는 뜯겨진 나무 조각이 가득하다. 자신의 손가락을 수도 없이 찔러 곪게 만든 그것들을 세상에 이르기라도 하는 양 신경질 적으로 삐쭉빼쭉 쌓여있다 한결같은 침묵을 지키며 당연스레 서 있던 듬직한 나무가 작은 가시가 되어 손끝에서 탈을 잡기 시작했을 때 작가는 당연히 들어야할 한 배신감 대신'나 여기 있노라'며 존재를 확인하려는 나무의 치기 어린 투정으로 느끼고 받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경화의 시작이 되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잘 뵈지 않는 나무 가시를 빼내느라 긴긴 시간 씨름을 하면서도 나무라는 재료에 진절머리를 느끼기는커녕 버려진 나무에 대한 연민과 반추로 작업이 확장되는 이 장면은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유쾌한 반전일 것이다. 잘 건조되어 아름답고 윤기 나는 목재가 아닌 쓰다 버려지고 뜯겨진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작가에겐 삶의 작은 존재들을 되새기는 중요한 과정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 하려 끊임없는 침투를 시도하는 나무가시들을 달래가며 하나하나 갈고 붙여 나가는 과정을 통해 오늘도 그들과의 평화로운 소통을 꾀한다. 그리고 관객 또한 작품과 그러한 소통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작은 나무 가시의 생명력은 뻗어간다.
죽은 세포를 되살리다 ● 생명체는 성장한다. 생명체는 물질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 세포의 수와 크기를 전투적으로 늘려간다. 그리고 생명이 다한 세포는 몸으로부터 탈락 하여 버려진다. 죽은 세포를 되살리는 일, 그것이 이지향과 이희경의 시작 이다. ● 이지향은 2년 전 받은 유방암 진단으로 고된 항암과정을 거치며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손톱이 검게 죽어가는 몸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최대 50번 분열하고 죽는 일반 세포와 달리 암세포는 무한증식하며 온 몸의 장기와 기관으로 퍼져나간다. 빨리 자라는 암세포의 특성을 이용해 성장 주기가 짧은 모든 세포를 죽이는 것이 그녀가 맞은 항암제 FAC(5-FU, Adriamycin, Cytoxan)의 주된 기능이다. 주사 후 몇 시간이면 어김없이 밀려오는 구토감 과 손으로 쓸어 넘길 때 마다 고통도 없이 빠지는 머리카락은 생명의 태엽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항암기간 중 우연히 본 한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작가는 날 수 있는 새와 날 수 없는 새가 서로 다른 깃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고약한 항암제의 기억, 그리고 때마침 맞아 떨어진 생장조건. 깃털, 날개, 날아오름, 생명, 죽음에 관한 여러 단상들은 어느 순간 신경세포 물질처럼 서로 교감 하고 전달되어 머리카락은 드디어 생명력을 얻고 깃털이라는 더 없이 순결한 생명의 표상으로 자라난다. 날 수 있는 새는 분명한 비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야만 강한 바람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모양을 하고 실제 표본처럼 액자 속에 들어앉은 이 깃털은 발생 목적과 달리 상당히 불분명한 비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깃털을 가진 동물이 날아오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꿈을 꾸는 동시에 깨어나는 새벽의 어느 한 순간처럼 무엇이든 가능한 동시에 불가능 하고, 진짜이면서 가짜이기도 한 그 불완전한 상태의 어정쩡함. 삶과 죽음의 공존. 작가의 불안한 존재에 대한 떨림이 머리카락 끝으로 전해진다.
이희경의 거스러미는 아름답다. 더 이상 허옇게 말라죽은 거죽더미가 아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히듯이 작가는 힘겨운 마음을 위로하고 보호해준 거스러미들을 아름다운 색으로 칠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반짝이는 유리 위에 올려놓는다. 작업의 부재와 반복적인 일상으로 마치 멈춰버린 듯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거스러미를 떼어내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는 작가에게 실로 중독에 가 까운 안정감을 주었다. 그것은 정체성에 대한 강박적 고민에서 벗어나 존재의 망각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시작은 거스러미들이 몸으로부터 깨끗이 사라지는 것 자체에 대한 희열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떼면 뗄수록 생겨나는 그것들과의 추적 놀이에 무섭도록 빠져들었다. 한번 시작하면 손과 손톱이 분리되는 통증을 참아가며 밤을 새우기까지 열심을 부렸고, 그러다 보면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쌓이는 거스러미의 양은 실로 대단해서 그의 몸을 하나 더 만들 수도 있었으리라. 너무 깊게 까지 뜯겨지는 날이면 새빨간 피가 맺혀 똑똑 떨어졌고 뜯겨진 자리는 움푹 패여 선홍빛 속살이 드러났다. 이러한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까지 부질없는 노고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이 행동이야 말로 세상의 무엇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주었기 때문 이다. 이제는 작가가 그들을 되살려줄 차례이다. 색색의 펜으로 아름답게 칠 해지고 배열되어 생명력을 얻은 이희경의 죽은 세포들은 마치 보석처럼 유리 위를 곱게 수놓는다.
기억의 부재 ● 조수연은 최근 몇 년 동안 딱히 떠올릴 만한 기억이 없다. 결혼 후 부모를 떠나 새롭게 생성된 가족, 그리고 5번의 이사. 내 방, 내 작업실, 내 물건, 내 시간 등 자유롭게 누렸던 나만의 공간과 시간은 이제 사치스러운 과거가 되었다. 기억의 축 조차 남편과 아이를 비롯한 주변으로 이동한지 오래다. 고집스럽고 선명했던 기억들은 흐려질 대로 흐려지고, 하도 비슷해서 언제 일어난 일인지 구분조차 안가는 일상은 엉킬 대로 엉켜버려 혼란스럽기만 하다. 너무 평범해서 기억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에 스스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작가의 머릿속 기억의 저장고는 쓸쓸하기만 하다. 아무리 하찮은 기억일 지라도 나에겐 소중한 것일텐데... 하는 생각에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조수연의 돋보기는 그래서 유용하다. 무심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억을 찾아내는 일, 그것은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놀이처럼 삶의 평범한 장면들을 샅샅이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동안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뒀던 물건들을 배열하고 조합하여'나의 사적 공간'이라 명명한 네모진 책상 안에 담고 아주 사적인 시간으로 기록해 나간다. 그 속에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화초를 가꾸며 위안을 얻는 시간, 커 가는 아이들과의 즐거운 놀이시간도 있고, 또 딸아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시간 등 남에게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의미 있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소통의 막다른 골목에서 ● 생명체는 서로 교섭한다. 세포 뿐 아니라 기관들도 서로의 기능을 도우며 간섭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이상한 침묵 은 언어가 없는 여느 생명체의 세계보다도 더 삭막하여 그 온기와 유연함이 사라진지 오래다. 타인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단절의 칼날이 도려낸 가슴 한 켠의 빈 곳, 신축성 없이 깨어지는 인식의 부스러기들 사이에서 강선구와 안경하, 박은선의 작품이 자라난다. ● 강선구의 시작은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에 대한 경계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지식과 경험이 많아지면서 무언가를 인식하는데 있어 자신만 의 기준이 생기고 그 기준이 고착될 때 더 이상 새로운 세 계를 경험할 기회가 박탈될 수 있음에 대한 경계. 배양 접시에 새겨져 있는'나는 널 잘 알아'라는 한 줄의 문구는 대상과 소통하려는 시도 없이 스스로 결론지어 버리고 마 는 일방적 사고방식의 가장 흔한 예를 보여준다. 작가는 확실해 보이는 현실을 모호 하게 기록하는 방법을 통해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리 되어있던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 보다 복합적이고 모호한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상황에 집중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가 모호 하게 만들려는 것은 현실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관점인데, 실의 교직이나 지나치게 거대하고 무거워진 프레임 등이 현실을 현실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현실을 바라보는 틀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 안에 담긴 흐릿한 표상은 한 인물에 대한 텍스트들과 함께 제시되는데, 이 정보를 관객들은 어떻게 활용할 지 의문이다. 인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듯 한 정보들이 결국 어떻게 읽어내고 바라봐야 할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물이나 장면, 혹은 대화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식과정에서 고정된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인 식 층을 발견하고 또 만들어내는 것은 '열정적인 관찰'을 통해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보고자 함이다. 이것이 고정된 가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의미들의 구석구석을 유 영(遊泳)하는 즐거움이다.
안경하의 시작은 종로구 통인동 89-1번지를 나타내는 한 장의 지적도로 설명된다. 땅. 집. 영역. 그리고 그들 사이의 힘겨루기...2011년도부터 시작하게 된 집짓기는 이웃과의 심한 분쟁을 가져왔다. 말도 안 되는 관계와 사건의 반복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해 왔던 작 가에게 그저 혼란스런 기억의 중첩일 뿐이었다. ● 인생은 지옥 같아 / 현실은 실패와 상실로 점철되어있지 / 사람들은 당신을 실망시키고 / 꿈은 마음대로 안 되고 / 마음은 상처받고 / 무고한 사람은 죽고 /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라 봐야 다 끌어 모아도 / 한줌의 모래 같고 / 금방 사라진다 / 하지만 계속하지 않으면 / 다음 순간을 갈 수 없다 / 그래서 / 계속 간다 ● 작가는 TV속 인물의 이러한 중얼거림을 기억할 만큼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사는 모습에 진저리 친다. 외곽선을 그리지 않고 한 부분에서 시작해 한 사람씩 그려 완성한 드로잉은 그들이 살면서 만들어낸 틀 속에서 아웅다웅하고, 자리다툼 하 고, 그러다가 안 되면 벗어나려 하고, 또 무언가를 찾아 가지만 결국 별 거 없이 돌아서는 삶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이어진 듯 끊어진 채 지도처럼 펼쳐진다. 드로잉과 함께 설치되는 유리 기구들은 작가의 생각이 통과해 작품으로 나오는 일종의 생각 배양기구 같은 것인데, 그가 살아온 과정과 이 생각 저 생각을 해 나가는 머릿속 구조의 모양을 닮아있다. 작가는 샬레에서 시작해 유리기구라는 과정을 거치며 드로잉으로 나오게 되는 작품의 순환 구조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며 결과물이 아닌 과정 차체로서의 작품을 제시한다.
박은선의 시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은 수많은 세상의 막(膜)-그 얇은 꺼풀들에 관 한 것이다. 1999년에서 2000년 까지 2년에 걸친 조교생활은 작가에게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계를 확인시켜 주었다. 학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며 그렇다고 직원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교수도 아닌 한마디로 조수생활. 교수에게는 학생과 학 교의 입장을, 학생에게는 교수와 학교의 입장을, 학교에게는 학생과 교수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 애매한 위치. 그 시절 스스로가 만든 벽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첫 작품은 생각의 줄기와 가지를 치며 지금까지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 스스로 감춘 채 드러내지 않는 삶의 부분들은 어쩔 수 없는 소통의 부재를 야기하기도 한다. 작가는 견고하게 분리된 공간과 벽을 만드는 대신 부드럽고 투명한 천을 사용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시각적, 심리적으로 공간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게 한다. 천으로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이 부드럽고 유연한 벽은 소통의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연출하며, 관객은 실제 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경험을 통해 타인과 나 사이의 장벽과 그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 올해로 조각그룹 비가 결성된 지 20년을 맞는다. 그 동안의 여러 전시, 그리고 비를 거쳐 간 많은 작가들은 2013년의 조각그룹 비에게 좋은 배양의 터가 되어 주었다. 이 지면을 빌려 그들에게 짧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각 작품의 시작, 그리고 이루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지금 이 순 간에도 분열중이라는 거대한 생명체 헬라세포를 다시 떠올려 본다. 여기 있는 작품과 전시의 순간들은 또 다른 시작이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분화되고 성장해 나갈 것이다. 조각그룹 비의 모습도 마찬 가지이다. 현대 미술의 난해함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기 위해 각 작품의 시작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그러한 점에서 결과인 동시에 하나의 시작이다. 지금 관객들이 거니는 이곳이야 말로 작품의 생명력이 움트고 있는 조각가의 배양실이다. ■ 조각그룹 비(飛)
Vol.20130606g | 조각가의 배양실 sculptor's culture room-조각그룹 비(飛)展 vi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