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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605_수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배 GALLERY LEE&BAE 부산시 해운대구 중2동 1510-1번지 1층 Tel. +82.51.746.2111 www.galleryleebae.com
시선이 차단된 어떤 곳 ● 김해진은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옥상 자체를 그린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장소가 아니라 시선이 시작되는 장소를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어느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의 '옥상' 작업은 이 시대의 풍경화, 가볍고 볼거리로 만들어 버린 가난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현실을 읽는 일은 그리 쉽지 않거니와 어렵지도 않다. 그저 그만그만하게 흥미를 느끼게 할 요량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사실 어떤 현실도 재현하지 못한다. 진지함이나 진정성의 부족이 현실을 보아내지 못하게 할 뿐이다. ● 팝아트의 미술사적 이해나 평가를 마치 시대적 질곡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표면뿐인 기법마저 시대의 특징을 읽어내는 것으로 과장되는 순간들은 우리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현상을 비판 없이 보아 넘기는 것은 예술의 기능에 대한 방기에 가깝다. 물론 형식이 시대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가볍고 재미있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마저 부정하는 그리기를 두고 이 시대의 반어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후적 의미부여의 과정에서 그럴 수 있을 뿐 지금 이 자리의 현실은 그곳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현실을 상품으로 만들고 상품을 예술로 만드는 교환가치만이 팽배한 시대이다. 그조차 중성적인 태도의 하나로 평가하려는 것은 현실의 몰이해일 뿐 작품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옥상 작업은 진부한 이야기나 포스트 모던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대를 말하려는 어설픈 접근이나 낭만적 정조를 넘어선다.
언제부터일까. 우리 주택의 지붕이 평면으로 조직된 것이. 그곳은 시골집 마당을 대신하는 그런 역할이 없지 않다. 도시에서의 좁은 공간, 집과 집 사이의 여유 없는 공간에서 빨랫감을 말리거나 집안에 둘 수 없는 물건들을 두는 곳이 옥상이다. 때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수돗물을 받아두는 커다란 물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빨래대가 놓인 곳이다. 그리고 잠시 도시 여기저기, 집 밖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시선이 시작되는 곳이다. 자신의 눈을 넘어서 장소가 주는 시선으로 다른 장소를 바라보는 곳이 옥상이다. 김해진은 그런 옥상을 두께를 가진 현실태로 구축하기보다 평면의 장소로 파악하고 그리고자 한다. ● 입체감이 있는 현실경이지만 입체는 그저 시선의 방향으로 겨우 드러나고 옥상이라는 공간은 어떤 곳, 그저 그곳에 있는 어떤 장소로 제시된다. 밋밋하게 드러나는 시멘트 자국으로 얼룩진 옥상의 바닥이나 사방을 둘러싼 낮은 난간 구조가 소재의 전부이다. 이런 단순한 구조조차 입체적 묘사에 기여하기보다 평면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이런 특징은 현실경으로서 옥상에 상응하는 기대를 소용없이 지나가 버리게 한다. 시선이 머물 사물이나 특정 이미지도 없다. 텅 빈 어떤 것에의 조우이다. 옥상 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에 대한 예시나 시선의 이동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옥상은 진부한 감상을 거절한다. ● 고립무원의 풍경이다. 옥상이라는 다소 높은 시선의 각도는 아래로 혹은 위로 다른 곳의 풍경들을 드러내 주는 곳이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장소가 열어주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 시선은 풍경에 의해 막혀 있거나 트여 있지 않고 아예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곳으로 제시된다. 그곳에는 타자에 대한 일체의 시선이 부정된다. 자신을 보여줄 뿐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때로 옥상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보이지만 시선의 이동으로 드러나는 풍경이기보다 옥상의 연결점일 뿐이다.
현실을 말하려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나 어둡고 축축한 곳도 이제 소재로 삼기 어렵다. 도리어 소외된 장소를 다룬 많은 작품이 남루를 상품으로 내놓는 지경을 쉽게 만난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일 게다. 여기서 '아무도'는 그림을 살만한 사람들의 전칭이다. 그래서 그 경치는 그저 그곳에 있다는 즉물성을 보여줄 뿐 의미를 포기하거나 배제한다. 의미 없이 그곳에는 화려한 장식만이 필요하다. 남루조차 표면의 반짝거림으로 있으면 된다. 굳이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매체는 흘러넘친다. 도시는 이미 의미를 씹고 소화해야 하는 그런 것을 감당할만한 정서적 여유가 없다. 그런 현실에서 그림은 장식이 되고 휴식이 되고 쾌락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키치로서 그림을 요구한다. 이런 세태에 김해진의 작품은 긴급하고 급진적인 태도를 보인다. 현실을 개선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말하려 한다. 이 시대는 작가를 자신의 상품을 팔려고 애쓰는 비즈니스맨이 되기를 요구한다. 현실적으로 먹히지 않는 작품에 매달려 있기보다 재력가에게 알랑거리기를 바랄 뿐이다. 키치만 양산될 것이 이치다. 다양한 사고도 진지한 성찰도 현실을 넘어서는 호한 결기가 없다면 순식간에 장사꾼이 된다. 현실은 키치를 양산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성과로 호도하고 반복생산을 강요한다. 그런 세태는 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현실의 그늘을 상투화해버린다. ● 김해진이 본 것은 조형으로서 묘사대상인 옥상이 아니라 텅 비어 있지만 그 자체로 드러나는 현실이다. 도시의 모든 것에서 소외된 것으로, 어떤 것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그곳이 거기 있다는 시선의 시작을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현대도시의 과잉의 풍경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닿을 곳이 없는 고립무원의 옥상이다. 그것은 구체적 삶이 전개되는 곳이 아니라 추상으로서 공간이 있고, 최소의 현실로서 옥상이 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지경에서 옥상이 거기 있는 것이다. 견고하고 단호하게 어떤 것의 시선도 거부하면서 어떤 곳도 보이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음을, 혹은 비루한 일상의 잔상들, 빨랫줄, 건조대, 플라스틱 물통, 장독, 속옷 하나, 에어컨 실외기, 티브이 안테나 등이 너절하지만 간명하게 보인다. 겨우 시멘트로 메운 자국이나 빗물 고인 자국이 더 보태진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만으로도 여느 작가의 묘사를 압도한다. 도시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다. 주택이라는 일상적 이미지마저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
옥상 아래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상상하거나 연상할 수 밖에 없다. 밋밋한 회색 조의 옥상 정경, 그것 자체를 보여줄 뿐이다. 철저하게 풍경을 차단함으로 옥상은 옥상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나 문장처럼 보인다. 몸통이 없는 옥상이 집을 지칭하지 못하듯 어떤 것도 지칭하지 않는 그 자체의 성립 불가능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이미지일 뿐 서술이 아니다. 재현이지만 현실적 서사가 없는 사다리꼴 하나가 거기 있다. ● 사다리꼴이거나 직사각형, 비정형의 사각형이 평면 자체로 던져지듯 옥상은 현실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인상보다 구조적인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견고한 주택 지붕이 기하 형태로 부각된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관념으로서 추상화된 도형이다. 현실을 추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옥상인 셈이다. 풍경을 보아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선이 차단된 상태의 어떤 것, 구조화된 현실을 보이려 한다. 역설적으로 추상의 공간이 현실의 구체성을 얻어내는 순간이다. 최소의 현실로 전환된 공간은 현실의 최소한의 소유, 가지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대형 아파트든 작은 주택이든 옥상의 모습은 그만그만하다. 그만그만한 최소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 우리의 거처, 가난한 거처를 지우고 은폐하는 공간으로 옥상이 던져진다. 시선이 트이는 공간이 아니라 진저리쳐지는 현실경의 함축이 거기 있는 것이다. 시선이 차단된 그곳은 소외된 도시의 특정 공간이자 이 시대의 구조화된 장소성이다. 김해진의 옥상은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화된 도시 읽기이며 시선의 출발점이다. (B-ART 수록) ■ 강선학
Vol.20130605i | 김해진展 / KIMHAEJIN / 金海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