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번 4-7악장

감연희_노영선 2인展   2013_0601 ▶ 2013_0630

감연희_꽃다방 이야기_천막 천, 공단, 철사, 바느질_200×200×200cm_2007 노영선_Hangul-11-15 믿음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

초대일시 / 2013_0601_토요일_06:00pm

진주 미술관 기획초대 현대미술 릴레이展 1관 / 감연희展 2관 / 노영선展

관람료 / 어린이_500원 / 성인_1,000원 * 관람료는 전액은 경남 사랑의열매에 기부됩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일요일,공휴일_10:00am~07:00pm * 4월~10월 토요일_10:00am~09:00pm

진주 미술관 JINJU MUSEUM OF ART 경남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466-3번지 Tel. +82.55.744.7220 jinju.misul.co.kr

후기 20세기 이후의 미술 - 감연희의『WHAT IS』-언어의 줄기-展에 부쳐 ●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앞으로 100 간 전개되어질 새로운 예술의 등장을 예감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왕정시대가 끝나면서 19세기의 근대가 부르주아적 시민의 경제와 정치가 지배하게 되지만, 20세기의 자본주의 경제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로서 확립되면서 자본주의와 식민지주의를 만들어낸다. 사회적 구조의 변혁은 이 시기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면서 이데올로기의 냉전시대가 시작된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관찰할 때, 이 시기에 미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사건들이 발생되는데 그 중 하나가 미술관과 갤러리의 탄생이다. 서구에서는 20세기 초부터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문화를 국가 경영의 중심 가치의 대안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다. 비록 미술관은 박물관처럼 처음에는 미술품의 수집, 감상, 계몽, 연구와 전시의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역사박물관과 달리 회화, 조소와 같은 순수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20세기 미술관은 로버트 스미스슨(R. Smithson)의 말처럼 "정신병원이나 감옥 - 다른 말로는 '갤러리'라고 부르는 중립적인 방들 - 이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무덤이나 묘지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미술관(museum)과 능묘(陵墓 ; mausoleum)는 발음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museum'의 의미는 미술품의 가족묘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미술관이 미술품의 최후의 안식처이며. 일정한 연구 평가 기간을 거쳐 불후성을 인정받게 되면 영원히 다시 태어나는 곳이기도 한 곳이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등장이 미술이라는 것에 있어서 꼭 긍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감연희_내가 꽃인가 꽃이 나인가_광목, 철사, 바느질, 퍼포먼스_130×130×50cm_2007

토마스 쿤(1922~1996)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예술 모든 분야에 똑 같이 적용되게 된다. 특히 예술에서는 기존의 패러다임(paradigm)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기존 전통양식의 이디엄(idiom 관용구)을 사용해서는 더 이상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예술 양식, 새로운 언어가 부재할 때,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비(非) 기존양식의 작품을 창출해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근대에서 현대로의 전이는 시간의 전이에서 구분되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등장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양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가치의 변화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20세기 말의 산업 시스템은 과거의 뉴톤의 물리학에 기초를 둔 공업, 산업 구조에서 70년대 말부터 부상하는 정보(information), 소통(communication), 전산(computer) 시스템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렇게 20세기 후기 과학은 물리학에서 정보과학으로, 산업구조의 인식론적 기초를 변형시키게 되며 후기공업사회를 태동시킨다.

감연희_다면체 인간_광목, 구름솜, 바느질_30×20×20cm_2007

다니엘 벨(Daniel Bell) 교수는 그의 강론 현대미술에 대한 비평에서 후기공업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문화 양식에 따라 '포스트 모던'의 등장을 말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리오타르드(Jean F. Lyotard)는 벨의 논지에서 발전하여 현대 예술은 계속해서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오타르드는 후기현대과학은 뉴톤적 과학의 목적이나 연구태도 및 방법과는 완전히 다름을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이디엄에 의한 예술이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과학사란 계속 바뀌어 대치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의 연속이다."라는 말은, 과학에서도 똑 같이 적용되며 지금까지의 통설과 같이 자연의 진리를 지향, 발전해간다는 과학사의 점진적 발전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즉, 아인슈타인적 과학 패러다임은 뉴톤적 패러다임보다 더 자연과 세계의 진실에 가까운, 더 발전된 과학이 아니라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자연관을 내포함으로써 상호비교가 불가능함을 주장과도 일치한다. 심지어 포이에라벤드와 같은 사회과학자는 "현대과학이란 인간이 자연에 대응하고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방법 중의 하나 일뿐, 이것이 미신, 연금술(alchemy), 무속신앙 등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확증도 없다."고 하였다.

감연희_부딪침, 때로는 축복_눈썰매, 맥주병, 광목, 공단, 구름솜, 퍼포먼스_50×120×70cm_2007

미술에 있어서 전통적 개념이란 그 당시의 객관적 사실(reality)에 대한 재현적인 것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사실적 상황이라는 진단에 따른 지식(과학)의 묘사일 뿐이다. 이것은 외부의 현실을 지각, 이해, 설명, 묘사, 이론화하는 과학이론을 정당화할 기준을 찾을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혁은 거의 동시에 미술에서도 발생된다. 종래의 과학에 대한 불신처럼 종래의 재현에의 기준에 대한 불신은 회화에서 재현적 위기를 맞게 된다. 리오타르드의 주장처럼, "재현적 위기 바로 이 위기들을 통해, 예술도 과학도 재현적인 것에서 비 재현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재현적 경향에서 비재현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의 의미는, 현대화의 부정적인 문제 때문에 야기되는 인간 문화적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인간 정신성의 유지를 위한 자구책이다. ●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몇 가지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 - 근대미술에서 미술관은 미술품의 최후의 안식처이며. 그 미술품이 불후성을 인정받게 되면 명작으로 부활되는 곳이다. / - 미니멀 아트의 무미건조한 작품들이 미술관에서 아우라를 갖게 하기도 한다. / - 뒤샹의「샘」에서 볼 수 있듯이 미술관 안에 놓여 있으면서 그 위상이 변하게 된다.

감연희_그곳에 언어가 있었다_플라스틱, 신문, 페인팅_250×500×800cm_2012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근대 이후 미술은 미술품 그 자체가 주체가 되질 못하고 미술관이라는 추상적 시공간에 예속되어 지위를 부여 받게 되는 기이한? 상황에 있게 된다. 그러나 미술의 초기 역사는 구석기시대 원시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의 미술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적 관점과 신화적 관점이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미술 창조와 인간의 조건이 동일시되어 있었다. 미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치되어 있었다. 미술관에 갇혀있던 미술품들은 세잔, 마티스, 뒤샹, 피카소, 올덴버그 등과 같은 천재 예술가들에 의해 형식적 변화의 위대한 혁명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도 비록 작품 자체의 구조를 허물었을지언정 미술관의 두터운 벽을 허물지 못하고 미술관의 시공간 속에 갇혀 있었다. ● 미술관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미술이 독립돤 미술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환경미술이 등장 된 이후라고 생각된다. 환경미술은 작품을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 생각지 않고 언제나 그 주변 환경과 감상자와의 관계에서 설정되고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지위가 갤러리의 시공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관람자와의 소통에 의해서 해석되고 결정되고 있다. 실제로 환경미술은 살아있는 환경 속에 실제의 인간과 실제의 대상물을 결합시킴으로써 주제의 의미를 제기하기 때문에 미술품을 미술관의 개인주의적이고 고립적인 폐쇄된 공간에서 해방시키고 있다. 환경미술의 가장 효율적 대안으로써의 설치미술은 자연예술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사회적 현상을 고려하는 새로운 작품을 위한 새로운 수법의 전시 형태를 요구한다. 따라서 작품과 관람자와의 전체적인 교류를 의도하고, 보는 사람의 주위를 작품(회화, 조각, 오브제 등)으로 둘러싸이게 하고, 때로는 소리, 빛 따위도 가해서 독특하게 꾸민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감연희_영혼의 무게 21g_피아노, 풍선, 구름솜, 철망_120×146×65cm_2012

설치작가 감연희의 작품세계는 환경미술에서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갤러리의 시공간에서 전시를 하며 화가로서 데뷔 한 것이 아니라 공공 예술 현장에서 연극을 하며, 음악을 즐기면서 자신의 '끼'를 마음껏 즐기면서 현대미술 부류에 합류하였다. 그는 여타 미술가들이 모더니즘의 아카데믹한 과정을 학습하는 동안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삶을 유희한 작가라고 생각된다. 그의 미술에서 모더니즘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미술은 "형태를 만들고 이미지를 구속하고" 하는 방법을 학습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모더니즘에 그 어떤 부채도지지 않았다. 그의 예술은 처음부터 '탈 모더나즘'의 바탕에서 출발하였고, 그의 예술의 메리트도 여기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 작가 감연희는 지금도 현대미술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여전히 질문하고 있다. "What is"~, 예술이 뭐야~. 결국 그의 물음의 본질은 데리다의「참」의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 모더니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해체와 탈구조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 김재관

노영선_Hangul-11-19 소망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60.6cm

'한글'에서 우리 의식의 근원과 자아발견의 모색 ● 노영선이 미술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노영선이 자신의 숙명이 화가였음을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많은 작가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미술대학, 미술관 그리고 갤러리를 접하고, 또한 화가란 직업에 익숙하게 되고 스스로 화가가 되기 위해 정해진 길을 걸어 왔지만, 남원에서 자란 노영선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혹은 무언가 금을 긋거나 오려 붙이는 일이 취미는 있었지만, 자신도 그냥 남들처럼 안정되고 평범하게 살게 되는 인생으로 생각하였다. ● 노영선이 뒤늦게 미술대학에 가서 미술수업을 받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노영선은 직업적인 표현행위 보다는 아무런 편견 없이 여러 가지 만드는 행위를 하였다. 실크스크린, 도자공예, 염직 등을 해보는가 하면, 복식, 꽃꽂이 등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 노영선은 문득 자신의 인생은 화가의 길을 걸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깨달은 시기가 있었다. 아무튼 노영선은 미술계에 모습을 보일 때까지 여러 가지 인생경험을 하게 되며, 그러한 경험과 이 작가의 깔끔하고 탐구적인 성격은 다른 작가와는 다른 이 작가만의 어떤 특징들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노영선_Hangul story-10-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0
노영선_Hangul story-10-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0

지금까지 몇 차례의 전시를 통해 노영선은 꾸준하게 '한글'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한글' 작업들은 전반적으로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의 기하학적 추상의 화풍에 한글의 조형성을 접목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노영선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주로 이 기하학적 추상의 화풍과 '한글' 작업을 탐구할 때, 노영선의 회화세계가 어느 정도는 드러나리라고 본다. ●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의 경우 처음부터 기하학적 추상 작업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둘 다 모두 회화의 출발점은 '자연'이었다. 오랫동안 '구상미술'의 전통의 강했던 유럽미술의 맥락에서 그들이 기하학적 추상회화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거장은 자신들의 기하학적 추상을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몬드리안 자신도 스스로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이 마치 음악처럼 그 자체로 예술적 완결성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자연과의 대응여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어찌 됐든 그들의 예술수업 여정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두 사람 모두 기하학적 추상을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였다. ● 반면 노영선의 경우 이들처럼 자신의 미술수업을 '자연'으로부터 출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영선이 미술계에서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들을 보면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영선은 자신이 추상작품을 하는 이유는 그저 '자로 금을 긋는' 일이 천성적으로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노영선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자연' 보다는 '긋는다'는 원초적 행위에 더 기인하고 있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그리는 행위'와 '긋는 행위'는 동일한 행위로 비쳐진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자를 쓰는 것을 회피하는 반면, 이 작가는 오히려 자를 사용하여 금을 긋는 행위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 자연히 캔버스는 기하학적 패턴이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몬드리안의 그림에서도 대다수의 직사각형 속에 어떤 '깊이'(depth)가 있듯이, 노영선의 기하학에도 어떤 회화적인 '깊이'가 존재하고 있다.

노영선_Hangul story-10-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0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와는 달리 노영선이 처음부터 기하학적 추상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초반과는 달리 기하학적 추상이 이미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흐름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 '한글'의 도입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화가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연'의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미술사에서의 '자연'은 철학사에서 '세계'와 동일시되거나 더 나아가서 '나' 혹은 '주관' 혹은 '인식'이란 개념에 대응되거나 혹은 동일시되거나 하여 왔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철학에서는 이러한 세계의 이해의 초점이 '주관'에서 '언어'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인식'을 이해하는 일이며, 우리의 '인식'은 결국 '언어'로부터 비롯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자연의 구조와 대응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즉 언어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와 일치하며,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구조를 분석할 때, 곧 세계 혹은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곧 언어는 자연의 대응관계로만 파악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언어의 본질은 보다 더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비트겐슈타인 이후에도 많은 언어철학자들은 이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여 왔다. 어쨌든 언어와 자연 그리고 우리의 의식 사이에는 부분적이나마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명한 것 같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와 한글로부터 출발한 노영선의 방법론은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본질을 접근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노영선은 한글작업을 통해 한글 속에 깃들어 있는 사상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사상을 파악하고자 하고 있다. 한글 속에는 음양오행사상이나 주역과 같은 사상이 깃들어 있으며, 이들 사상은 과거 한국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던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한글의 분석은 곧 한국인들의 의식의 원형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고 노영선은 믿는다. 그것은 결국 더 나아가 한국인들의 자연관을 접근하는 것이며, 이는 더 나아가서 결국 작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노영선_Hangul story-11-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1cm_2011
노영선_Hangul story-11-0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1cm_2011

노영선이 이러한 작업에 천작하게 된 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가는 스리랑카의 여행을 통해 자아발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스리랑카는 아름다웠으며, 곳곳에 사원과 문화유적들이 많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서히 현대문명에 잠식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스리랑카로부터 돌아와서 노영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역사나 의식의 근원과 뿌리를 생각하게 되며, 특히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결국 노영선은 어떤 개별적이고 특정적인 전통 보다는 우리 모두의 의식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는 한글과 한글의 기반인 동양사상의 탐구를 자신의 작업의 주안점으로 삼으면서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회화적 본질을 찾고자 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 노영선을 바라보면서 이 작가의 작업이 아직 덜 정리되고, 완성을 위해서는 보다 더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이 작가의 접근방법 만은 관심을 가져볼만 하다고 여겨진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각자가 독립적인 속성을 지닌다. 특히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이 두개는 매우 상이한 구조를 지닌다. 전통적인 통사론이나 의미론 혹은 활용론적 접근 역시 텍스트에 기반을 둔 접근이며, 이미지적 접근은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보다 더 원초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하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가의 문제접근방식과 해결을 위한 진지한 탐구자세 그리고 본질을 찾으려는 순수함을 고려해 볼 때, 분명 언젠가는 나름의 설득력 있는 해결방안을 보여주리라고 보며, 분명 미술사에서 어떤 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영재

Vol.20130602h | 2013번 4-7악장-감연희_노영선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