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5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가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1993년에 처음 만난 강진이 씨 모습은 지금도 또렷이 떠올라요. 하트를 닮은 뽀얀 얼굴 모양, 동그란 눈, 짧게 친 머리, 그리고 늘 입가에 맴돌고 있던 웃음까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진이 씨 얼굴은 그대로예요. 참 신기하지요? 주름은 조금 생겼을지 몰라도, 피부의 촉촉함은 조금 사라졌을지 몰라도 진이 씨 얼굴은 늘 환한 해님 같아요. 늘 웃음을 머금고 있어서일까요? ● 그렇지만 화가로서의 진이 씨는 20년 전과 사뭇 달라요. 그림책 편집자였던 나는 처음부터 진이 씨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조금 지나고부터는 진이 씨의 글도 참 좋아했어요. 깨끗하고 맑은 느낌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즈음 진이 씨가 쓴 「빨간 털모자」란 글이 있어요. 어린 시절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따스한 글이었지요. 저는 그 글을 꼭 진이 씨의 그림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진이 씨를 못살게 굴곤 했어요. 진이 씨도 그림책으로 완성하고 싶다며 여러 번 도전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작업이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았어요.
내가 작가가 된 뒤로는,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또 진이 씨를 못살게 굴었어요. "내 글에 그림을 그려 달라", "진이 씨의 추억으로 내가 글을 쓸 테니 그림을 그려 봐라". 진이 씨는 그때마다 싫은 기색 없이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하지만 그 작업도 생각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어요. 진이 씨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듯이 보였고, 나는 나대로 안타까워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어요. ●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진이 씨는 화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며 하느님께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나 봐요. 하느님께 길을 보여 달라고 졸랐을지도 모르죠. 어느 날, 진이 씨가 전화를 했어요. 하느님으로부터 답을 얻은 것 같다고. 그러면서 그림책 작가로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고 말했어요. 대신 진이 씨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 나갈 거라 말했어요. 솔직히 그림책 작가 강진이 모습을 꿈 꿨던 저로서는 내심 섭섭했어요. 하지만 진이 씨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풀잎처럼 청량한 기운에 감동해서 응원하겠노라 말하고 말았죠. ● 그 뒤 진이 씨가 간간이 보여 준 그림들은, 진이 씨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장면들이었어요. 청소하다 말고 기도하거나 요리하는 진이 씨 모습, 아이들 키 재는 모습,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는 아이들, 가족 여행 장면 등등. 진이 씨의 일상이 소박하게 한 장 한 장 그림에 담겼어요. 때론 스케치 형식으로, 때론 채색된 모습으로. 그림마다 곁들여지는 글이 그 맛을 더해 줬지요. 사실 진이 씨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모습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진이 씨가 십 년 넘게 써 온 일기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진이 씨의 일기장은 그냥 일기장이 아니랍니다.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진이 씨를 꼭 닮은 글씨체로 차분하게 차곡차곡 써 나간 굉장히 '성실한' 일기장이에요. 거기다 그림도 그려 넣고, 여행 다녀온 흔적(차표나 입장권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붙여 놓고… 그야말로 진이 씨 일기장은 그 자체가 '작품'이었어요. 그렇게 거의 날마다 그런 '작품'을 노트에 채워 넣는 사람이 자기 일상을 그림에 꼼꼼하게 담아낸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겠어요?
그랬기에 나는 처음, 숙명여대 동문전에 걸린 진이 씨의 작품과 글을 봤을 때 좋다고 칭찬만 했지 "아니, 어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며 입을 벌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작업이 일 년 이 년 삼 년 이렇게 계속되고, '일기'라는 제목('일기'라는 제목 아래 연작 형식으로 작품을 계속 이어가면 좋겠다는 건 제 아이디어였음을 여기 굳이 밝히고 싶군요, 하하.) 으로 진이 씨 작품이 쌓여 나가자 전 조금씩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진이 씨의 작품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점점 쌓여가는 진이 씨의 작품 세계는 한 개인 삶의 기록이자 우리 세대의 기록, 더 나아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동시대인 삶의 기록일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죠. ●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예술을 할 때, 그 예술은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거기에 재능과 부지런함까지 곁들여지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겠지요. 강진이 씨는 바로 그런 용기와 재능, 부지런함을 모두 갖춘 훌륭한 화가라는 사실을 20년 가까이 흘러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부디 나의 이 뒤늦은 깨달음을 진이 씨가 용서해 주기를……. ● 드디어 진이 씨는 기지개를 켜며 자기의 작품 세계를 이 세상에 내놓습니다. 진이 씨처럼 좋은 예술가가 될 소질을 지닌 큰딸 이준이의 모형 작품과 같이. 어쩌면 이준이도, 이준이의 작은 세계도 진이 씨의 또다른 작품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으로 가족의 삶을 기록해 나가는 남편 분 주 박사님, 엉뚱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미래의 판타지작가 이진이도 그렇겠지요. 저는 진이 씨의 작품만큼이나 진이 씨 가족이 참 좋습니다. 진이 씨의 일기장이 진이 씨의 작품들로 진화했듯이, 진이 씨의 작품들이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서 계속 진화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더 깊고 더 넓어질 거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진이 씨란 사람은 늘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작가를 따라가기 마련이지요. ● 강진이 씨의 개인전 '일기' 를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합니다. 이번 전시가 큰 결실을 맺으며 10회, 20회, 50회 …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진이 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내가 진이 씨를 사랑하는 친구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 윤여림
나에게 그림은 '일기' 같은 것이다.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교복 맞추던 일, 말을 좋아하는 둘째가 꿈을 들려주던 날 아이를 향한 내 마음, 젊은시절 즐겨듣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이소박이를 담그던 날, 집안 청소를 하다 문득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리게 되는 기도시간. 매 순간의 소소한 일상들이 내 그림 소재가 되고 그 순간들이 그림으로 그려지며 내게는 '위대한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가족과 이야기와 추억을 그리며 나는 행복해진다. ■ 강진이
Vol.20130515e | 강진이展 / KANGJINE / 姜珍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