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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509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3_0518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 본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2번지 Tel. +82.2.2287.3591 www.galleryhyundai.com
부분 밖의 부분, 일시적 정신 ● 정방형의 도시 맨하튼에서 방향감각을 잃으면 우선 고개를 들어 눈앞의 풍경너머 초고층 쌍둥이 빌딩을 찾으면 됐다. 남북으로 길쭉한 맨하튼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한 이 두 건물을 기준으로 이들을 등지고 걸으면 북을 향한 것이었고 이들을 향해 걸으면 남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이는 매우 유용한 방법으로 적어도 2001년의 한 시점까지 이 두 건물은 맨하튼이라는 체계 속에서 부동의 지표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다운타운에서 올려다 볼 때나 중앙공원 잔디밭에서 그 윤곽을 찾을 때나, 보이는 크기와 각도는 바뀔지언정, 세계무역센터라는 나름의 상태에 어떤 변화를 겪는 일 없이 이들이 서있는 방향이 남쪽임을 알려왔다. 변화 한 것은 오직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위치와 시간이며 대상에 대한 절실함, 또는 반가움일 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이러한 지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전이사(shifter)로, 스스로는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으나 사용하는 이와의 실존적인 관계가 발생하였을 때 비로소 상징성으로 충만해 지는 기호라 할 수 있다. '나' 라는 단어가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단어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체계와도 연관되지 않지만, 누군가가 '나'라고 발성함으로 인해서, 즉 실존적 관계가 형성되자마자 그를 가리키는 지표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쌍둥이 빌딩은 길을 잃은 나의 존재와 위치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라는 물리적인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있어서 충만한 지표로 활성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전이사의 중요한 전제는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없다는 점, 즉 발성자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나'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음성 parole, 형상 écriture)를 가지고도 그 단어 자체를 정의하는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나'는 오직 그 외의 단어 '너' 나 '개', 또는 '나무' 등 언어를 구성하는 타 요소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활성화 하기 위해서는 발성자와의 관계 그리고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하도록 끝없이(너, 개, 나무, 무지개 등과) 차이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전이사는 바로 이러한 그 자체의 빔(emptiness)를 통해 누가 '나'가 되던지 끝없이 받아들이는 대상을 바꾸어 갈 수 있으며, 대상을 통해서만 의미화될 수 있는 것이다.
정주영과 북악산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활성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북악산 주변에 수도가 형성되어 가면서 산은 300여 미터 아래의 바쁜 일상에 가려 스스로에게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일 없이 병풍과도 같은 배경으로 정착되어왔다. 작가는 이 상황에 자신의 비판적 시점을 개입시킴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다. 이전부터 서울 주변의 산과 이들의 재현에 주목해 온 작가는 이번에는 광화문 앞에서부터 삼청동까지의 여정을 거치며 올려다본 북악산의 한 측면을 작품화 하고 있다. 적어도 북악산 No.19(별도의 표기 없는 모든 작품 2012)에서 북악산 No.29까지의 작품은 하나의 연결된 행로를 상정한 것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하여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을 관통한 후 정독도서관을 향하여 이동하는 작가의 동선을 따라 조금씩 달라져가는 산의 조건들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산의 정면 오른편에 있는 특징적인 세 개의 바위를 지표 삼아 그려진 이 작품들은 일견 같은 이미지의 반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산의 남동쪽을 지나며 꾸준히 같은 부분을 응시한 시선 끝에 드러난 형상을 충실하게 화면에 옮긴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북악산 No.19는 이들 중 가장 먼 발치에서 본 산으로, 그 거리만큼 초록색 수목과 암벽 그리고 하늘 빛깔의 차이가 비교적 흐릿하고 모호하며 묘사에 있어서도 면의 꺾임과 명암의 단계가 적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몽롱하다. 그런데 작가가 조금씩 산을 향해 다가가는 No.20에서 No.24로 갈수록 초록의 색조가 파릇파릇해 지며 하늘 빛의 채도도 높아지고 산의 표현이 세밀해져 많은 명확한 면 분할을 볼 수 있게 된다. 일례로 세 개의 돌출된 암벽 중 가장 오른 쪽의 바위의 묘사에 있어서의 변화를 비교하면 No.19에서는 마치 엎어놓은 대합처럼 평평하던 표면이 No.24에서는 꼬막과 같은 부챗살모양의 섬세한 표현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멀리서 뿌옇고 모호하게 보이던 산의 모습이 이를 향해 다가감으로써, 그리고 작가의 눈이 면들의 식별에 익숙해감으로써 마치 렌즈의 포커스가 점차로 예리해지듯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No.24에서 No.29까지는 다시 산을 등지고 U턴 하듯 걸어나오면서 관찰한 결과로 이미지가 또 다시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산과의 거리 외에도 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어서의 다소의 전환은 조금씩 변화하는 하늘의 면적, 즉 화면이미지의 프레이밍의 차이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No.22나 No.27, No.28에서 하늘의 면적이 오른쪽 코너를 향해 밀려가고 그만큼 산의 목선이 올라가는 것은 아마도 보다 산 쪽을 향한 작가의 신체와 이에 따라 바뀐 그녀의 시야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No.30과 No.31는 아예 산의 동쪽으로 방향을 튼 위치로, 산 위 하늘이 양쪽으로 빼꼼히 올려다 보인다.
작품들 속에서 산의 표현이 정선이나 김홍도의 것과 같이 전체의 산세를 드러내는 총체적인 화면이 아니고 답답하리만큼 압도적인 부분의 연속인 점, 또 이 연속성 속에 작가의 물리적 이동과 이에 따른 보이는 방식의 미세한 차이 외에는 변화를 알리는 요소 – 예를 들어 날씨나 시간, 계절 또는 극단적 시점의 변화 – 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들이 북악산의 변화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꾀한 풍경화가 아닌, 산과 작가 사이에 발생한 실존적 관계의 결과, 즉 묵묵부답인 산에 투영된 작가의 의식에 대한 것임을 시사한다. 작가는 들뢰즈가 "무한정한 내포를 지니는 한에서 자연의 개념들은 항상 다른 사물 안에 있게 된다. 즉 그 개념들은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응시하거나 관찰하는 정신 안에, 스스로 자연을 표상하는 정신 안에 있게 된다." (차이와 반복) 라고 한 것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마치 우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반복하듯이 자연은 그 스스로의 결여 때문, 즉 어떠한 계기나 기억 등의 내면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반복한다는 것이다. 마치 공허한 '나'가 발성자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듯이, 스스로의 인식이 결여된 자연은 텅 빈 지표와도 같이 바라보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의미화를 시작하며 이 과정에는 '나'의 구별을 위해 '너', '개', '나무', '무지개'와의 차이화가 반드시 필요하듯, 끝없는 차이의 반복이 필연적이 된다는 것이다.
언어에 있어서 의미와 단어가 그 차이의 효과로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악산의 구현은 이러한 차이에 대한 집요한 반복으로 현실화되려 한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세 개의 암벽을 중심으로 한 북악산의 반복된 표현인 동시에 이들의 동일함 보다는 차이에 대한 끊이지 않는 나열이다. 반복은 그 연속성 때문에 현상적으로 결코 동일한 것의 반복일 수가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일견 같은 것의 반복인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은 서로가 partes extra partes, 각자 다른 부분과 그 밖의(또 다른) 부분이며 마치 수직선상의 0과 1사이에 무한히 펼쳐지는 소수점 이하의 실수의 띠처럼 각자 끝없는 차이를 내포하는 대상들의 무한한 연속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파장의 반복으로 청신경을 통한 환각작용을 가져오는 테크노 음악과 달리, 작가의 유사한 단위의 이미지의 반복이 시신경에 착란적인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작가가 소수점 단위의 미세한 점들을 좌표평면에서 하나씩 끄집어내 지적하는듯한 금욕적인 수학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작품의 표면을 뒤덮는 붓질들이 과거에 추상의 경계에까지 근접하며 산의 재현을 시도해왔던 작가의 그 어느 작업 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겹쳐져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솔잎자국 같은 단위의 축적으로 구축된 이번 화면들은 분명히 하나의 구체적인 구조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분산되고 흩어지면서 결국 비물질로 와해된다. 2000년도까지의 그녀의 작품의 주제가 과거에 그려진 산의 이미지라는 확고하고 대상화되기 용이한 것 이었기에 이를 표현하는 붓질은 단호한 물성을 띌 수 있었고, 그 이후의 현전하는 산을 재현하는 붓질이 그려진 대상의 환영으로 전환되는 찰나의 감각을 얼린 듯한 물질과 비물질의 절묘한 경계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물신적인 쾌락으로서의 회화의 일면을 간직한 일부 작품 - No.32~No.34(2013) - 을 제외한 이번 작품들은 치밀한 관찰과 계산을 대전제로 한 하나의 개념, 즉 '차이'라는 추상적 체계의 표상이기에, 붓질에서도 철저한 비물질감이 감돌고 있다. 이러한 아련함은 필시 북악산의 존재와 이를 탐구하는 작가의 정신이 시간 축이라는 좌표 선상에서 잠시 동안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순간 mens momentanea을 담아낸 것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그 직전의 이미지는 과거로 사라져야만 하는 이들의 운명, 그 덧없는 전제 자체를 체현하고 있다. ● 도상이나 상징과 달리 지표는 그 원인과의 실존적 관계와 이에 따른 물리적 흔적을 통해서 기호화되는데, 마치 화면 위의 붓 자국들이 이미 캔버스와 맞닿았었던 붓끝의 기억의 표상이면서 접촉의 지표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들의 퇴적이 낳은 북악산의 모습은 산이라는 자연과 작가의 시선의 만남의 흔적이며, "산 위에 투영된 의식의 지표이고, 나아가 이러한 산의 반복은 시공간의 틀에 포착된 그녀의 정신성의 궤적들이다." ■ 정신영
Vol.20130514c | 정주영展 / CHUNGZUYOUNG / 鄭珠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