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3_0422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민정_강윤정_계수진_구민정_김남호_김수현 김시화_김신혜_김연식_김영롱_김예임_김유정 김은진_김태은_김한별_문혜림_박아름_박현욱 박현정_신희경_유기재_유홍영_윤여선_윤홍경 이민지_이자란_이지선_장주희_정소희_조은빈 좋은비_차현지_채연수_천승훈_최진하
학술회 / 2013_0422_월요일_07:00pm
주최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동국대_동덕여대_서울대_성균관대_이화여대_중앙대_홍익대 기획 / 7개 대학 석사과정 대표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이화아트센터_이화아트갤러리 Ewha Art Center_Ewha Art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대현동 11-1번지)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A동 Tel. +82.(0)2.3277.2486
오늘날 수많은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소멸한다. 그들 중에는 일회적인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항구적인 공동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어떠한 특정한 목적에 의해 규합하며, 그것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거나 반대로 그러한 성공을 계속하여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때는 해산하기 마련이다. 역사상의 거의 모든 공동체들이 이런 식의 목적론적인 도정을 밟아왔다. 그러나 최소한 예술 공동체들만은 이들과 달랐다. 예술 공동체는 (감히 말한다면) 목적 지향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예술 공동체들도 일정한 목적을 내세웠지만, 그러한 목표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과정, 즉 실천이었다. 이는 예술 공동체들의 세계관이 매우 독특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는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세계는 종말에 이른다. 그러나 예술 공동체와 같이 과정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세계의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시간의 틀 안에서 계속된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전략적 목적의 달성 보다는 전투 그 자체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공동체는 목적에 따라 창설과 해체의 과정을 밟는다. 그것은 어느 모로 봐도 매우 명백한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나 의사와 같은 '다른 이'들에게 그의 존재를 최초로 인증 받는다. -예측할 수 있겠지만, 그가 죽었을 때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다른 이들의 승인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돌려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면 그들의 존재를 보증 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예술 공동체의 시작과 끝은 신(神)적이다. 이들에게는 창설과 해체의 과정이 아니라 선언만이 있을 뿐이다. 선언하는 존재는 세계에 자신이 존재함을 부르짖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 또한 선언을 통해 자신이 결정짓는다. 이러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건대,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회 또는 조직이라는 그물망에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예술 공동체는 그 생성의 과정에서 타인에 의한 승인, 즉 레비-스트로스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통과 의례'의 과정을 겪지 않았으며, 따라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선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끝없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표현과 동의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도와 일반인들의 상식, 그리고 법의 틈바구니에서 예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하고 개척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제도는 젊은 예술가들을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라는 모순된 형식으로 거부하며,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예술가 아니면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을 선택하라'와 같은 규정성의 형식에 예술가 자신을 끼워 맞추도록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 공동체가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아이덴티티 확립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게 만들고, 온전히 사회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 후 '그것만을 하는 존재'로 만들려는 사악한 의도 말이다. 만일 이런 관점에 충실하게 예술가가 예술만을 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선택항만이 남는다. 그러나 예술가는 동시에 시민이기도 하고, 어느 한 젠더 부류에 속한 인간이기도 하며, 지배 권력에 포섭되었지만 한편으로 저항하는 정치적 주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이러한 점들에 의문을 품고 예술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표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체제에 포섭되어 버린다면 이러한 질문들, 즉 구조화된 세계의 빈 틈을 가리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게 되어 버린다. 물론 순응하는 예술가에게도 좋은 점은 있다. 무엇보다 그림이 잘 팔릴 것이며, 그가 하는 말은 신화적 언어로 해석될 것이고, TV출연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를 순응함으로써 서두에 말한 예술의 변증적 기능은 억압되어 버리고, 예술가는 어느 순간 그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단순한 권위체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점은 이러한 것이다. 비타협적이며, 자신이 환원될 수 없는 특수성의 주체임을 세계에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들을 보편성의 객체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장치들이 온전한 것이 아님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사회의 증상(Symptom)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증상을 통해 자신이 병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듯, 예술가의 존재는 보편성을 강제하는 사회라는 장치의 모순을 드러내고 세계가 강박증적인 '의지'에 의해 재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를 통해 이들은 억압된 비보편적 주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세계의 '위대한 변화'를 예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오래된 테제를 떠올릴 수 있다. -억압된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귀환한다.- ● 대부분의 예술 공동체들의 종말에 대해서 혹자는 '흐지부지하게 종료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예술 공동체도 결코 흐지부지하게도, 그리고 종료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찾아내고 전면화한 공백들 속에 아직도 남아있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후대 예술가들이 수행한 온갖 시도들에 들러붙어 계승되고 있다. 즉 예술 공동체는 요컨대 (타인들이 부여하는) 자신의 사망선고마저 예술화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술 공동체는 풀리지 않는 매듭을 던져놓는 자이다. 그리고 그 매듭은 다른 형태로 꼬이기만 할 뿐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2013년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만든 공동체가 던져놓은 풀리지 않는 매듭은 이들의 예술 실천 속에서 계속하여 다른 형태로 꼬일 것이다.
여기에 모여든 다수의 젊은 예술가들은 분명 억압을 강제하는 제도의 틈바구니에서 존재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안 팔리는' 작업에 두려움 없이 뛰어들며, 비난받을 수 있는 주제에 집중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이해될 수 없는 시도를 하곤 한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들은 이러한 이해 불가능성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 자신들이 좋든 싫든, 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은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서 사회(그것이 '예술계'라 불리는 것의 구조이든 정치적 구조이든 간에)에 존재하는 균열을 가시화하고, 거기서 나타나는 주체들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비로소 보통의 사회적 윤리와는 다른 예술가의 윤리가 정초된다. "오직 이 정신 왕국의 술잔으로부터 정신의 무한함이 부풀어 오르는도다." (헤겔) ■ 이정민
Vol.20130422b | 동동서성이중홍-다섯번째 대학원 석사과정 연합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