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3色

홍수정_윤예제_박상희展   2013_0417 ▶ 2013_0502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3_0417_수요일_05:00pm

1층 / 홍수정展 2, 3층 / 윤예제展 4층 / 박상희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홍수정은 일상 속의 생경함에 관심을 가지고 시야에 들어오는 개체의 한 부분을 담아, 낯익은 것이 낯설게 느껴지도록 그림을 그린다. 눈, 코, 입이 없는 백지같은 얼굴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형상으로 뚜렷한 신체의 모습도 없이 발은 바닥에 묻혀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에 얽혀있는 선들은 작은 타원형의 고리로 연결되어 증식되어짐을 보이며, 이것은 실타래, 머리카락 혹은 거미줄처럼 얽혀진 선들로 가까이에서 보면 반복적으로 증식하는 형상을 가진다. 이러한 나의 기호적인 드로잉은 배경까지 번져나가 화면 속의 나의 꿈과 무의식 세계가 뒤섞임을 나타낸다. 명암의 관계없이 평면적으로 처리된 개체에 무수한 드로잉은 나의 꿈과 타자의 꿈을 대변하듯 여기저기를 넘나들며 번져나간다. 세필로 그려지는 기호적 드로잉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자라나고 증식해 나간다. 이렇듯 타자들의 생각덩이들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꿈덩이가 되고, 그 꿈덩이들은 또 다른 형상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소재로 등장하는 타자는 숨을 쉴 수도, 쉬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진다. 여기서 개체도 하나의 꿈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작업 전반에 극대화되는 색면의 이미지는 색의 단순화를 통해서 현실세계 속에 속하지 않고 꿈을 꾸는 주체가 되며, 깨알같이 반복되는 점, 선, 도형들은 하나의 꿈덩이가 되어 숨쉬고 꿈틀대며 화면을 구성한다. ● 활짝 피어날 때가 있으면, 시들어버릴 때도 있는 것이 꽃이자 인생이다. 인생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꽃이 된다. 고로 인생은 꽃이다. 작가는 꽃잎을 통해 인생의 이런 모습을 담고 싶었다. 작가가 관찰하고 만들어가는 작업 속의 세상은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것이다. 더불어 꽃잎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존재 하나 하나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한다. 동시에, 이러한 꽃잎의 연쇄 드로잉이 작업에서와 같이 서로 이어질 때, 비로소 작가의 작업도 '세상'이라는 '조물주의 작품'처럼 '하나의 완성품'이 되어간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도 싶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꿈을 은유화하여 색면의 이미지와 초현실적인 표현의 복합된 뉘앙스로 형상화된다. 이렇듯 내면적 꿈의 형상인 꿈덩이를 드러내고 현실 속에서의 꿈을 억압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고 싶었다.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진술을 통해 타자와의 이야기를 시도한다. 타자가 가지는 억압된 꿈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며 관객의 내면의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결국 홍수정의 작품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을 다양한 꿈을 바라보고 상상하는 자기 고백적 치유의식과 상호작용을 위한 내적 심리세계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홍수정

홍수정_Time to gr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3cm_2012
홍수정_끝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13

윤예제가 자연의 풍경, 혹은 외재하는 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에게 자연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득하는 대상이다. 까닭에 그의 작품은 풍경에 밀착한 듯한 거리감 없는 시선을 화면에 반영하고 있다. 직접 덤불과 습지를 헤치면서 체험한 구체적 풍경을 펼치듯, 작가는 화면의 얇은 표피 위에 풀꽃 하나하나, 나뭇가지 하나하나, 잎사귀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모노톤의 색감으로 정착시켜 의외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요컨대 그것은 실재하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심상이 삼투된 심리적 풍경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화면의 시간대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화면은 백야(白夜)의 박명(薄明)처럼 음울한 회색조나 감미로운 단색조의 파노라마로 마감된 경우가 대다수다. 화면을 가득채운 우거진 덤불과 들꽃과 초록빛 나무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정조는 적막하고 쓸쓸하기조차 하다. 몸으로 부딪친다고는 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고 혼란 없는 정돈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 파노라마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대기는 부드럽게 변화하며 서서히 움직인다.

윤예제_spring_캔버스에 유채_112.2×193.9cm_2012
윤예제_stay_캔버스에 유채_160.3×193.9cm_2012

윤예제 작품의 또 다른 특성은 화면 곳곳에서 시냇물이든, 개울물이든, 웅덩이에 고인 물이든 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윤예제에게 물은 은자의 명경(明鏡)으로 시적 감성의 은유이며 흐릿하고 몽상적인 분위기의 상징성을 승화시키는 장치로도 여겨진다. 나아가 물은 매우 다양한 상징성을 표상하지만 마찬가지로 모순등가성(矛盾等價性)을 내포하기도 한다. 예컨대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이며, 맑음이자 재생이고, 순리이자 역경이며, 풍요이자 차가움이고, 정화이자 순환이며, 양인 불에 견주어 음으로서 달이자 밤이기도 하다. 이런 물 이미지의 다양한 변용은 화면에서 물이 환기시키는 소리와 차가움과 청량감 등을 경험하는 공감각적 효과를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통상 물과 꿈의 긴밀한 관계와 유기적 결합은 윤예제의 작품에 액화된 꿈의 세계라는 독특한 심미적 공간을 창조하면서 작품의 서사 구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근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이런 뉘앙스와 맞물려 시선을 포박하는 듯이 치밀한 밀도와 세기로 그려진 서정적 풍경은 인간 사회의 비속과는 전혀 무관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실은 작가의 시선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서사적 세계이기도 하다. 이 시선은 종종 물속에 잠겨 달콤한 오수 혹은 고독을 즐기는 듯한 인간(작가 자신)이나 신체의 일부를 그 풍경 속에 등장시킴으로서 서정에 서사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전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이런 방법론을 통하여 그의 그림이 시적 풍경을 넘어 초현실적인 차경(差境)의 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이자 꿈같은 화면, 즉 모노톤의 친숙하면서도 낯선 양가적인 풍경과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우리는 재현의 풍경에서 벗어나 나로 향하는 나르시시즘의 발현인 작가 개인의 내러티브와 시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서정/서사의 지평이 교호하는 화면을 목도하는 것이다. ■ 윤예제

박상희_이태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플라스틱 시트_30×130cm_2012
박상희_Hongkong nigh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비닐 시트_97×194cm_2008

박상희는 도시를 그리고 도시의 야경을 그린다. 도시에 끌려서 도시를 그리고 도시가 애써 지워낸 상실감을 들추어내고 싶어서 도시의 야경을 그린다.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이중성과 양가성은 도시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고(현란한 불빛 속에 상실감을 은폐하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고(환락도시와 상실의 도시라는 중의적 의미로 나타난) 도시를 재현하고 있는 시트지 고유의 성질이기도 하다. 고유의 성질? 시트지에 고유성 같은, 본질 같은, 거대담론 같은 어떤 항상적이고 일관된 성질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임시방편의 쓰임새가 있을 뿐. 작가는 원래 이 임시방편의 쓰임새를 간판을 그리면서부터 착안해냈었다. 도시를 도시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도시의 아이콘으로 부를 만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숙고하는 과정에서 찾아진 것이 간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간판을 그리다가 자연스레 간판의 재료인 시트지와 빛(조명빨)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도시의 전형에 해당하는 아이콘이고, 그 아이콘은 조명으로 인해 더 잘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시트지로 그림을 그리게 됐고 도시의 야경을 그리기에 이른다. ● 박상희의 그림은 그림 층과 시트지로 오려낸 층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돼 있다. 외적 인상과는 달리 자세히 보면 이 두 지층은 서로 일치하지도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시트지 층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재현된 그림 층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해체하고 파열한다. 그렇게 파열된 현실의 지층 사이로 무엇이 보이는가. 작가는 시트지를 매개로 표면만 있고 이면은 없는 현대도시의 무미건조하고 창백한 혹은 무색무취의 속성을 드러내고, 그 매끈한 피부를 듬성듬성 오려내 현대도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게 오려낸 표면 뒤쪽으로 이면이 보이는가. 꽤나 잘 그리고 그럴듯하게 그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숨겨져 있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현대도시는 이면이 있는가. 빛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현대도시가 빛의 휘장 뒤편으로 숨겨놓고 있는 어둠을 직시한다면 혹 그 이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박상희

Vol.20130420b | 3人3色展

2025/01/01-03/30